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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걱대는 내 몸, 아파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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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걱대는 내 몸, 아파서 '다행'이다!

[마녀의 '도서관 편지'] <거부당한 몸>의 수전에게

수전 웬델에게

편지를 쓰기 전에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당신을 수전이라고 불러도 괜찮은지요? 일면식도 없는 손윗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제가 사는 나라에선 아주 무례한 짓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책을 읽은 지금, 수전 웬델 씨나 웬델 교수님 같은 호칭은 내키지가 않습니다. 글에서 느낀 당신의 따뜻하고 깊은 시선을 간직하고 싶어서도 저는 당신을 수전이라고 부르렵니다.

수전, 당신이 1996년에 발표한 장애학의 고전 <거부당한 몸>(김은정·강진영·황지성 옮김, 그린비 펴냄)을 이제야 읽었습니다. 좋은 책이 대개 그렇듯 근 20년 전에 쓴 책인데도 세월의 간극을 전혀 느낄 수 없더군요. 요즘 들어 어지간한 책은 심드렁하기만 하고 읽히지가 않았는데 이 책은 달랐습니다. 강지영, 김은정, 황지성 세 사람의 옮긴이가 쓴 서문부터 몸의 초월을 논한 마지막 7장까지 단 한 구절도 그냥 넘길 수가 없었지요.

▲ <거부당한 몸>(수전 웬델 지음, 김은정·강진영·황지성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내 몸에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장애인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책을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고민하며 공감의 독서를 하게 된 까닭이 뭔지…. 아마도 책을 쓸 때의 당신과 비슷한 나이라서 당신이 겪은 일이 남일 같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당신이 중년의 나이에 갑작스레 찾아온 근육통성 뇌척수염, 일명 만성피로 면역장애증후군을 십여 년간 앓으며 그 경험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접하는 순간 이미 제 마음은 당신을 읽고 있었지요.

대학에서 철학과 여성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활기찬 삶을 살다가 갑자기 쓰러져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을 때, 완쾌를 기약할 수 없는 질병으로 십 년 넘게 고통을 겪었을 때, 그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위 사람들로 인해 죄책감과 외로움을 느꼈을 때, 당신 마음은 어땠을까요? 과연 나라면 하루 열 시간을 자고도 낮에 몇 시간씩 누워 있어야 할 만큼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면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을까요? 비록 속으론 두통, 구역질, 어지러움, 단기기억장애 등을 겪지만 겉보기엔 '정상적인' 자신을 환자도 아닌 '장애인'으로 규정할 수 있었을까요?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서운한 마음을 하소연하는 대신, "장애나 질병이 있어도 일할 수 있고 관계를 맺을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비장애인 대부분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장애인들에게서 배"우고 그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싸우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을까요?

마음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에 답하면서 저는 당신이 얼마나 긴 터널을 지나왔을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면 스스로를 가여워하고 세상을 원망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상황에서 이처럼 뛰어난 책을 쓰기까지 당신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얼마나 강한 의지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했을지 새삼 감탄스러웠지요. 그러나 수전, 당신은 아마 당신의 성취를 상찬하고 감탄하는 이런 말들을 달가워하지 않겠지요. 엄청난 역경을 딛고 '장애를 극복'한 영웅에게 보내는 찬사가 장애를 "사회적 책임의 문제가 아닌 개인이나 가족의 문제"로 생각하게 만들고, 대다수 장애인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理想)으로 장애인을 타자화하는 현실에 누구보다 아파한 사람이 당신이니까요.

당신은 이 책에서 장애는 단순히 생물학적 결손이 아니며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장애(disability)란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 또는 사회생활의 주요한 영역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활동을 수행하는 능력이 일정 부분 또는 어떤 방식으로라도 부족한 것"이라는 언뜻 느슨해 보이는 정의도 그런 시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속도와 경쟁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당신 같은 만성질환자나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한 노인은 모두 장애인이며, 저 또한 머지않아 장애인이 될 사람이지요.

물론 장애 운동가나 이론가들 중에는 나이듦에 따른 취약함과 장애를 한데 묶으면 장애인의 기회가 줄어드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된다고 염려하거나, 장애인은 무능력하다는 통념을 바꾸기 위해선 질병과 장애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의 우려에 공감하면서도, 장애를 정의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사회에 살며 기여하려 할 때 부딪치는 어려움을 밝혀내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즉, 장애를 엄밀히 규정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장애로 인한 차별과 억압이 없어지는 것이 중요하며 모든 사람이 충분한 지원과 기회를 갖는 사회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당신 말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장애를 '개인적 불운'으로 여깁니다. 운이 나빠서 장애인이 되었다거나 요행히 사고를 피했다는 식이지요. 이런 '요행식' 접근은 장애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하는데, 그 두려움 때문에 비장애인 대부분이 장애인과 동일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삶의 속도가 빨라지는 사회에서는 당신이 지적했듯이 누구나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빨리빨리 서두르다 생기는 사건사고는 물론이요, 나이가 들수록 속도에 적응하기는 점점 더 힘들어지니까요. 갈수록 느려지는 몸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는 저는 그래서 응급 의료 서비스나 교육에 대해서처럼 장애인 지원에 대해서도 '자선'이 아닌 사회적 투자를 해야 한다는 당신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런 사회적 지원이 결국 비장애인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1년 한국에서는 중증 장애인들이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리프트 사고로 장애인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자 엘리베이터를 설치해달라고 나선 것이지요. 비장애인들은 그들의 싸움에 냉담했지만 막상 서울시가 설치한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건 그들입니다. 저 역시 다리가 아프거나 무거운 짐이 있을 때 엘리베이터를 탄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고맙고 미안하더군요. 아마도 장애인들의 희생 덕분에 이런 편익을 누린다는 걸 비장애인들이 기억한다면 자선이 아닌 투자가 필요하다는 당신의 주장을 쉬 납득할 겁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 같이 장애인과 노약자를 위한 편의시설을 마련하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몸에 대한 관념을 바꾸지 않은 채 지원만 강조하는 건 장애인이나 노약자를 복지의 천덕꾸러기로 만들 위험도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노인은 복지 재정을 축내는 잉여 인간으로 여겨지는 판이니까요. 그럼 어떡해야 할까요? 당신은 분명하게 답합니다.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부터 버리라고. "인간의 행동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몸을 갖고 질병, 장애, 죽음을 예방할 수 있다"는 미신부터 버려야 '다른' 몸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사는 북미 사회가 특정한 몸을 이상화하고 그렇지 않은 몸은 '거부'하는,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형에 맞게 몸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그런 몸이 되기 위해 애쓰는 사회라고 비판합니다. 성형과 '몸짱'이 판치는 한국 사회 역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란 말을 거짓말 좀 보태 하루걸러 한 번은 듣는데, 그러다 보니 아는 게 없고 생각이 모자란 것보다 주름살이 늘고 몸이 아픈 게 더 겁이 납니다. 늙고 아픈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의술의 힘을 빌려 안 늙고 안 아픈 걸 당연히 여기니 나만 무능하고 뒤처지는 것 같아서이지요. 아마 만성질환자나 장애인도 이런 소외감과 우울을 느끼겠지요.

하지만 제아무리 의술이 발달해도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담배를 끊고 운동을 하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져도 노쇠는 피할 수 없으며 아픈 건 아픈 것입니다. 바버라 힐리어의 말처럼, "몸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상형을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몸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옵니다. "우리 몸이 변하고, 나이 들고, 아프거나 장애를 갖게 되고, 그리고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지요.

참 좋은 것은, 이 시대의 강고한 믿음과 달리 그렇게 건강을 잃었다 해서 모든 것을 잃는 건 아니란 점입니다. 당신이 책으로, 삶으로 몸소 보여준 것처럼, 아픈 몸, 늙은 몸, 장애가 있는 몸은 '거부당한 몸'이 아니라 '다른 몸'일 뿐. 표준형이니 이상형이니 하는 사회의 규격에서 벗어난 다양한 신체들이랄까요.

물론 당신도 인정하듯이, 장애를 차이일 뿐이라고 하기엔 장애에 따르는 고통이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장애를 차이로 볼 필요가 있다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장애인이 가진 지식과 관점을 찾아내고 존중"하며 그런 익숙지 않은 존재방식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태도를 의미"할 뿐 아니라, "신체의 완벽함을 추구하고 통제하려는 환상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배움과 깨달음이 있기에 당신은 병으로 겪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병에 걸리지 않았었다면 하고 바랄 순 없다"고 말합니다. 그 병 때문에 자신이 기꺼이 되고 싶고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었기에 치유가 가능하면 받아들이겠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요. 건강이 전부인 사회, 모든 장애인은 치유되기를 원한다고 믿는 세상에서 당신의 이런 고백은 자기위안이나 기만으로 치부될 수도 있습니다.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 때문에 툭하면 아픈 사람을 탓하고 의사가 모르는 질병은 일단 '심인성' 진단부터 내리는 풍토에서, 아파도 좋다는 말은 병든 정신의 반영으로 여겨지기 십상이지요.

그러나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에게도 날선 비판 대신 부드러운 설득으로 일관하는 당신을 보면서 저는 그 말을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섬세하게 배려하는 문장에서, 몸의 통증보다 사람을 더 아프게 하는 무시와 무지, 편견과 독단을 겪어온 당신의 세월을 읽을 수 있었고, 그 고통을 원망이나 한탄이 아닌 공감과 배려로 승화시킨 힘을 느낄 수 있었지요.

수전, 당신만큼 아픈 것도 아니건만 실은 얼마 전부터 나이듦의 고단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노화의 징후들은 물론이요, 여기저기 탈이 나고 삐걱대는 신체기관들에 적응하기는 쉽지가 않더군요. 그런데 당신의 <거부당한 몸> 덕분에 이렇게 변화하는 나 자신을 인정하기가 조금은 쉬워졌습니다. 당신처럼 예민하면서도 너그러운 사람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약해지고 느려지니까 사람이 더 고맙고 세상이 더 예쁜 줄을 알겠습니다. 수전, 고마워요. 몸에 대한 환상을 깨주고 배움의 기쁨을 일깨워줘서. 덕분에 씩씩하게 살 힘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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