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6월 21일
언어는 민족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표상이다. 민족 언어가 없다면 민족 문화를 어디에 담을 것인가. 근세의 뚜렷한 사례로 중국에 군림했던 만주족이 있다. 만주족도 언어 보존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모든 공문서에 한어(漢語)와 함께 만주어를 쓰도록 했다. 그러나 200여 년을 지내는 동안 만주어는 만주족의 생활에서 사라져버렸다. 만주족은 중국의 55개 소수 민족의 하나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 정체성이 희미해져서 형식적 존재만 남아있다.
민족 정체성에 위협이 제기된 근대 초기에 일어난 한글 운동은 곧 민족 운동이었다. 이민족 지배를 받게 되면서 민족 운동으로서 한글 운동은 더욱 부각되었다. 1921년 세워진 조선어학회(1931년까지는 조선어연구회)가 이 운동의 구심점이었다. 일제 말기 가장 큰 민족 운동 탄압이 '조선어학회 사건'이었다는 데서 이 학회의 성격을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조선어학회의 가장 큰 사업이 1929년에 시작한 <큰사전> 편찬이었다. 조선 민족의 튼튼한 정체성을 뒷받침한 것은 수준 높은 언어와 문자였다. 특히 15세기에 만들어진 한글은 근대적 언어 생활에 적합한 문자다. 나는 '근대화'의 요체가 사회 내 활동 주체의 확대에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중국과 한국에서는 유럽에서보다 먼저 나름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한글 창제를 그 증거의 하나로 보는데, 아직 뒷받침이 충분하지 못한 관점이므로 여기서 크게 고집하지는 않겠다. 다만 한글이 근대적 민족 운동의 근거로 큰 자산이 되었다는 점만 지적해 둔다.
<큰사전> 편찬의 의미는 한글의 제도화에 있었다. 민간의 관습 형태로 존재해 온 한글을 민족 국가의 제도적 근거로 만드는 사업이었다.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 간부들이 감옥에서 풀려나오자 제일 먼저 집중한 것이 이 사업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 때 압수된 사전 원고를 조선통운 창고에서 찾아 사업을 복구하게 된 사정을 1945년 10월 4일 일기에 적었다.
되찾은 원고 분량에 대해 관계자들의 기록에 약간의 편차가 있으나 대략 400자 원고지로 10여만 매에 달한다. 1957년 완간에 이르게 될 분량이 조선어학회 사건 전까지 갖춰져 있었고, 해방된 상황에 맞춰 수정·보완이 필요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들의 추가 작업보다 비용이 출판을 위해 더 절박한 문제였던 상황을 정재환은 이렇게 서술했다.
원고를 찾고 교정 작업을 시작했지만, 학회 재정 형편으로는 자력 출판이 불가능했다. 1947년 봄, 이극로와 김병제는 원고 보따리를 들고 을유문화사를 찾아 출판을 부탁했지만, 출판사 역시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사전 편찬이라는 거창한 작업을 맡는 것은 열악한 출판 환경에서 쉽사리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회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을유문화사의 문을 두드렸다. 이극로, 김병제, 이희승이 세 번째로 을유문화사를 찾았다. 삼고초려가 따로 없었다.
이날 이극로는 원고 뭉치로 책상을 두드리면서 격앙된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누구 하나 <큰사전>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우리나라가 해방된 의의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래 이 원고를 가지고 일본 놈들한테나 찾아가서 사정해야 옳은 일이겠소?" 이극로의 한탄과 호소는 마침내 을유 중역진의 마음을 움직였고, 일단 1권만이라도 간행하기로 하고, 그 다음 일에 대해서는 또 다시 대책을 수립하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해 5월 13일 조선어학회와 을유문화사는 <큰사전> 출판 계약을 체결하였고, 1947년 10월 9일 <조선말 큰사전> 제1권을 간행하였다. B5판(4x6배판) 600면에 특가 1200원이었다. (<한글의 시대를 열다>(경인문화사 펴냄), 411~412쪽)
제1권을 겨우 내고 다음 단계 전망이 막막한 채로 8개월이 지난 1948년 6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 록펠러재단에서 4만5000달러의 원조를 결정한 것이다.
"'조선말큰사전' 미 락펠러재단서 물자 제공"
조선어학회에서 편찬한 <조선말큰사전>은 전 6권 중에 그 첫 권을 작년 10월 한글날에 내어놓았고 둘째 권 조판도 이미 완성하였으며 앞으로도 계속 발간할 것이라는데 여기에 드는 막대한 물자의 구득에 고심 중 지난 3일 문교부를 통하여 미국 락펠러재단으로부터 조선말큰사전에 필요한 우수한 물자를 조선어학회에 제공하겠다는 소식이 도착되었다 한다.
이는 조선어학회로부터 문교부 편수국장 고문이었던 앤더슨 씨를 통하여 락펠러재단에 교섭한 결과 지난 6월 18일 동 재단에서 미화 4만5000불에 해당한 물자로 이를 돕기로 가결하였다 하며 그 물자는 머지않아 조선에 도착되리라 하는데 이로써 동 사전은 가격이 매우 싸질 것이며 어학회 사업에 큰 도움이 되리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1일)
조선어학회 간부인 장지영과 최현배가 편수국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앤더슨 대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인데, 그들이 문교부 예산을 따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미군의 편수국 담당자까지도 필요성을 인정한 사업인데도 미군정 고위층은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한 이 사업을 외면했기 때문에 록펠러재단에 손을 벌리게 된 것이다.
록펠러재단에서 제공한 종이 등 재료가 12월 초 인천항에 도착했다. 사전 편찬 사업에 종사하다가 이 종이를 받으러 간 이강로의 회고에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근 60년 후의 회고인데도 당시의 황홀할 정도로 기쁘던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인계를 받는데, 양이 얼마나 많은가 하면 기차로 열세 화차예요. 종이만 아홉 화차야. 그러니까 얼마나 종이가 좋았겠어요.
그런데 그때 인천에 물건이 지천으로 쏟아져 들어오니까 '쌩, 하고 가지고 가기만 하면 내 거다' 생각하는 쌩쌩이판이 있었어요. 그 얘기를 듣고 나니까 겁이 덜컥 나더라고요. 큰일났다 싶어 수산경찰서에 부탁해서 경찰관을 여섯 사람인가 화차칸 사이사이 연결되는 마디에 배치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다니면서 읽어버리지는 않나 감시를 하는데, 첫날부터 어떤 사람이 와서 자꾸 종이를 만져 보고 또 돌아다니더니, 사흘째 되는 날 물건을 싣는데 날 좀 오라고 하는 거예요. 갔더니 좀 앉아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자식이 어떤 자식인가 하고 앉았더니 대뜸 물어요.
"여보, 저 종이 뭘 할 거요?"
"그걸 왜 묻소?"
"아, 글쎄 얘길 해보소."
나는 사전 만들 거라고 했지요. 그런데 당시 위조지폐를 '사전'이라고 했어요. 사사로울 '사'에 돈 '전'. 그러니까 법에도 위조지폐 만들다가 붙들려 가면 '사전죄'라고 했어요. 나는 '딕셔너리', 우리나라 어휘 사전을 만든다고 하는데도 그놈은 계속 내가 위조지폐 만든다는 말로 들었던 모양이에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불쑥 동업하자고 그래요. (<8·15의 기억>(한길사 펴냄), 149쪽)
1945년 12월 창립된 을유문화사는 (창립의 해이기도 한) 해방의 해 간지(干支)를 이름에 쓸 정도로 민족 문화 창달에 큰 뜻을 갖고 세워져 해방 직후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많은 업적을 이룬 출판사다. 그러나 사전 출판처럼 큰 사업을 진행할 재력은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제1권만을 우선 맡았던 것이고, 제1권이 그렇게라도 만들어져 있는 것이 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는 데도 중요한 조건이 되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해방 전의 조선어학회 사업은 유지들의 출연에 많이 의존했다. 학회가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기구였기 때문에 체면상 돈을 내지 않을 수 없는 재력가도 많았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 학회 간부들이 민족주의 지도자로 부각되었고, 친일파 재력가 중에는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생각해서 '투자' 의미로 재물을 제공하려 들기도 했다. 그러나 1947년 무렵에는 이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별 정치적 영향력을 갖지 못할 것으로 판단이 된 모양이다.
"자진 기부한 어학회관, 타협도 없이 방매(放賣)설-이 씨 변심에 어학회 분개 성명"
조선어학회는 해방 후 이종회 씨로부터 현재의 사옥인 청진동 188의 건물을 자진 기부받아 이제까지 아무런 탈 없이 사용 중인데 요즘에 들어 기부했던 이 씨는 마음이 변했는지 그 건물을 팔겠다고 신문 광고까지 내어 집주인인 조선어학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하여 세인의 주목을 끌고 있다.
"요즈음 신문지상에 본 회관이 5월 20일 경매된다는 광고가 게재되었으나 청진동 188 현 회관은 해방 후 집주인(이종회)이 기부한 것으로 이미 그때 신문지상에 발표되어 천하가 다 확인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회관은 새삼스러이 경매될 집이 아니라는 것을 사회 앞에 성명한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20일)
이강로의 회고 중에 이 이야기도 나온다.
지금은 광화문에 한글학회 건물이 있는데, 해방 후에는 조선어학회 사무실이 청진동 188번지에 있었어요. 지금 청진동 고려화재보험회사가 우리 회관이었죠. 그 이야기를 하면 또 기가 막혀요.
해방이 되고 친일파들은 금방 죽을 것 같았고, 우리나라는 독립이 되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 살 길이 뭐냐? 독립 단체나 이런 데에다 뭐라도 조금 기대서 활로를 찾을까 한 거예요. 그렇게 보면 조선어학회가 제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조선어학회에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우리가 회관을 지을 테니 이리 오시오, 이리 오시오" 하는데 그 중에서 청진동 회관이 화동에서 제일 가깝고, 지대며 건물도 괜찮았어요.
(…) 내가 사전 편찬을 하고 있는데 그게 1946년인지 47년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어쨌든 반민특위가 해체되어 친일파들이 다시 득세할 때에요. 외솔 최현배 선생님이 들어오신 뒤에 한 10분쯤 있으니까 웬 사람들이 들어왔어요. 누군가 했더니 건물을 기증한 이종회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오더니 최현배 선생한테 말했어요.
"이제 그만 돌려주시죠."
"뭘 돌려달라고?"
"아, 이 집 말입니다."
"아니, 우리한테 기증한다고 해놓고 지금 와서 돌려달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
"여보시오, 그런 소리 마쇼. 누가 당신에게 사용하라고 했지 가지라고 했소? 몇 해 동안 집세 한 번 안 내고 잘 썼으면 돌려줘야 할 거 아니요."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외솔 선생이 얼굴이 새빨개집디다. 말을 더 못했어요. 우리도 화가 나서 저놈의 새끼 아주 그냥 때려주고 싶은데….
'이거 큰일 났구나' 하고 있는데 더구나 건물을 기증받으면서 받았다는 증거 하나 받지 않았던 겁니다. 이 노인네들이 참 어수룩하기도 하지.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그때 대법원장 하던 조진만 씨라고 있었는데 그분한테 이야기하니까 재판을 해도 진다는 겁니다. (<8·15의 기억>, 151~153쪽)
이 일이 있었던 시점을 이강로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반민특위가 해체된 1949년을 짚어보기도 한다. "친일파들이 다시 득세"한 상황이 그의 기억 속에서는 반민특위 해체와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미 1947년에 친일파 득세가 시작되어 있던 사실을 이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친일파 재력가들이 앞 다퉈 회관을 제공하던 시절 같으면 사전 출간 사업도 록펠러재단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록펠러재단 지원 소식이 전해질 때, 사전 편찬 사업의 핵심 인물 중 이극로(1893~1978년)와 김병제(1905~1991년) 두 사람은 평양에 있었다. 두 사람은 이후 북한의 어문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이극로는 1927년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 사전 편찬 사업을 열고 이끌어오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인물이고, 김병제는 그 사건으로 옥사한 이윤재의 사위로, 다년간 사전 편찬 사업의 실무를 맡아 온 인물이었다.
정재환은 <한글의 시대를 열다> 제2장 제2절 "이극로와 조선어학회 일부 학자들의 북행"에서(47~100쪽) 이극로와 김병제 등 월북 한글학자들의 월북 경위와 북한에서의 활동 내용을 서술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비해 이북 정권이 어문 정책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뒀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이극로 등의 월북의 계기를 김두봉(1889~1960년)이 만들어준 사실을 정재환은 지적한다. 김두봉은 주시경(1876~1914년)의 직전 제자로서 이극로와 나이는 몇 살 차이밖에 안 되지만 한글 운동에서는 대선배였다. 그런 그가 제2인자 역할을 맡고 있던 데서 이북 정권이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한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분단 이전 조선의 모든 문화 활동 중심지가 서울이었으므로 조선어 연구자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북 정권은 민족주의 노선의 어문 정책을 필요로 하고 있었지만 연구자가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김두봉이 이극로를 초청하게 되었다는 박지홍의 회고를 정재환은 <한글의 시대를 열다> 59~60쪽에 인용해 놓았다.
"1948년에 남북 협상 있기 전에 이극로 박사가 정재표 선생을 만나자고 그래. 그렇게 약속을 해가지고 우리가 책을 같이 내기로 했는데, 내가 북으로 가야 되겠습니다. 그 이유는 김두봉 선생이 편지를 했는데 나라가 두 쪼가리 나더라도 말이 두 쪼가리 나서는 안 된다. 그러니 사전 편찬이 중한데 북에 사람이 없다. 남쪽에는 최현배 선생만 있어도 안 되나? 그러니 당신은 북으로 와 달라. 그래서 내가 응낙을 했습니다. 내가 만약 북으로 가게 되면 정 선생님에게는 은혜를 잊지 못해서 내가 이야기하는 거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북으로 가게 되면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그래 남북 협상 때 안 돌아왔어요. 못 돌아온 게 아니라 벌써 뭐 식구들을 다 보냈다 그러더구먼요. 그래 그 분이 정말로 우리 국어학을 우리 국어를 우리말을 위해서 갔나? 그게 아니면 북쪽의 정치를 위해서 갔나? 모두 오해를 하고 있거든. 그런데 분명히 북에 갈 때 자긴 정재표 선생한테 얘기할 때 난 오직 거기 가서 조선말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서 간다고."
이극로는 민주독립당과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해서 남북 협상을 제창하는 등 정치 활동이 있었고 후에 북한 정권에서도 무임소상을 맡았기 때문에 그의 북행에 정치적 동기를 의심받기도 한다. 그러나 정재환이 밝힌 이북에서 그의 활동 내용을 보면 한글 운동에 큰 뜻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극로가 북행을 결심할 무렵 조선어학회가 처해 있던 상황을 돌아본다. 사전 출간의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미군정에게 외면당해 미국 민간 재단에 손을 벌리고 있었다. 기증받은 줄 알고 있던 회관 건물의 반환을 요구받을 만큼 재력가들에게 무시당하고 있었다. 한글 운동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물적 지원을 사회로부터도 정부로부터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두봉의 편지가 얼마나 반가웠을까.
9·28 서울 수복을 앞둔 1950년 9월 26일 역사학자 김성칠은 친구인 영화배우를 북쪽으로 떠나보내며 일기에 아래와 같이 적었다. "이 땅의 문화 정책이 너무나 빈약함"은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초기까지 이어진 현상이었다.
이리하여 자꾸만 없어지는 문화인과 기술자들, 몇 십 년을 길러야 하는 이들을 하루아침에 다 떠나보내고 앞으로 대한민국은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가려는 것인지?
글줄이나 쓰고 그림폭이나 그리던 사람들, 심지어 음악가-영화인에 이르기까지 쓸 만한 사람이 많이 북으로 가버렸다. 학계로 말하여도 신진발랄한 사람들이 많이 가고 우리같이 무기력한 축들이 지천으로 남아 있다. 간 그들이 모두 볼셰비끼였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던 사람들 또는 양심적인 이상주의자들이 죄다 가버렸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깊이 반성하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간 그들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남의 밥에 있는 콩이 더 굵어 보이는 심리도 있었을 것이고, 턱없이 현실에 불만하고 이상만을 추구하는 젊음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그런데다 이북의 선전 공작이 강력하고 또 좋은 미끼로서 나꾸었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뿐일까. 이남의 분위기는 과연 그들에게 유쾌한 기분으로 일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그들의 생활이 안정되었었나 함을 생각해볼 때, 결국은 그들의 등을 떠밀어서 38선 밖으로 몰아낸 것이나 다름없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저녁 한 사람의 양심적인 예술가를 또 북으로 떠나보냄에 있어 그가 이 몇 해 동안 병고와 생활난과 고문의 위협에 허덕이었음을 생각하고 이 땅의 문화 정책이 너무나 빈약함을 통탄하여 마지않는다. (<역사 앞에서>(창비 펴냄) 1950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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