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책, <자본의 축적>(로자 룩셈부르크 지음, 황선길 옮김, 지만지 펴냄)은 로자 룩셈부르크와의 우연한 세 번째 만남이다. 1990년대 초반 대학에 들어가 학생 운동권의 비주류로 야학을 하며 만났던 책 세 권,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과 실천>(파울 프뢸리히 지음, 최민영 옮김, 석탑 펴냄), <대중파업론>(로자 룩셈부르크 지음, 최규진 옮김, 풀무질 펴냄), <로자 룩셈부르크>(헬무트 히르쉬 지음, 박미애 옮김, 한길사 펴냄)를 통해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에 대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여성운동가가 소수의 존재였던 터라 내가 받은 인상은 그만큼 강렬했지만, 20대의 내 청춘에서 로자의 역사적 의미는 단순한 강렬한 인상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이후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를 겪으며 고민 끝에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면서, 김수행 교수가 쓴 논문 '로자 룩셈부르크의 과소소비설에 관하여'(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의 <경제논집>, 1990년)와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로자 룩셈부르크 지음, 송병헌·김경미 옮김, 책세상 펴냄)를 읽은 기억이 있었지만, 마르크스라는 산맥을 종주(?)하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로자가 쓴 <자본의 축적>에 접근한다는 일 자체가 내게는 상상하기도 어려웠고 로자의 진면목을 맛본다는 자체가 내게는 사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필자는 대학원에 다니던 후배 두 명과 함께 유럽 3개국, 즉 독일, 체코, 영국을 여행하는 기회를 잡았다. 이 여행은 세 명의 대학원생이 기획하고 실행했지만, 우리의 목적은 베를린에 계셨던 서울대 경제학과의 양동휴 교수와 런던에 계셨던 김수행 교수의 거점을 활용하면서 최소비용으로 유럽을 경험해 보는 것이었다. 여행의 일정은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들어가, 하이델베르크를 경유해 양동휴 교수의 집에서 머물며 베를린을 구경하고 프라하에 머물다 뮌헨으로 나온 이후, 영국 런던으로 넘어가 김수행 교수와 만나고 마르크스가 묻힌 무덤에 가본 후 히드로 공항을 통해 나오는 것이었다.
▲ <자본의 축적>(로자 룩셈부르크 지음, 황선길 옮김, 지만지 펴냄). ⓒ지만지 |
물론 필자는 베를린의 그 다리에서 로자를 추모하기는 했지만 현재적 의미를 깊이 있게 되새길 지적 수준이 되지 못했고 런던에서 산 <자본의 축적> 영문판을 통독할 정도의 지적 성실함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로자와의 두 번째 만남은 기억의 저편 너머 어딘가에 희미한 인상으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필자는 다시 한국어로 번역된 <자본의 축적>을 앞에 두고, 서평을 써야한다는 의무가 있기는 하지만, 세 번째로 로자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그것도 로자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두툼한 분량의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책의 한국어판을 통해서 말이다.
<자본의 축적>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혁명가로만 기억할지 모른다. 폴란드 출생으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했으며,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 Bernstein)의 수정주의에 정면으로 대응했고 독일 사민당의 우경화에 맞서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함께 '스파르타쿠스 동맹'을 결성해 전쟁에 반대하고 국제사회주의 운동의 중요성을 지칠 줄 모르고 강력하게 주장하다 비극적 최후를 맞은 혁명가로 말이다.
그런데 로자는 실천 활동에만 두각을 나타낸 '혁명가'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이론에도 큰 공헌을 한 '이론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로자의 삶 자체는 변화하는 현실에 대응하며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유지하려는 투쟁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의 축적>의 한국어판은 독자들에게 혁명가이자 이론가로서 로자의 삶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의 축적>은 방대한 분량이지만 구성은 간결하다. 이 책의 1부는 마르크스의 재생산표식의 의의를 정리하고 마르크스가 제시한 이 표식의 공식이 봉착한 어려움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2부에서는 '문제의 역사적 서술'이라는 제목을 달고 재생산과 관련해 벌어진 세 차례의 논쟁을 해명한다. 마지막 3부에서는 마르크스의 재생산표식을 수정해 축적의 역사적 조건들을 밝히고, 자본주의에서 축적은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의 관계 속에서만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문제를 해명한다.
이러한 간결한 구성과 함께 <자본의 축적>의 핵심 주장 또한 한층 명료하게 제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마르크스의 확대재생산 공식은 축적이 현실에서 어떻게 진행되며 역사적으로 관철되는지를 우리에게 설명해주지 못하며"(563쪽), "자본축적은 비자본주의적 배경 없이는 모든 면에서 상상할 수도 없다"(539쪽)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이 <자본의 축적>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로자가 수정한 마르크스의 확대재생산 공식의 '타당성'과 외부영역으로 상징되는 비자본주의 체제의 '필요성'이라는 두 측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평가의 기준을 얻기 위해서는 로자가 <자본의 축적>에서 제기한 주장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로자는 마르크스가 사회적 총자본의 관점을 가지고 <자본> 2권에서 제시한 확대재생산표식의 공식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한다. 로자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확대재생산표식은 생산재 부문의 선도 발전이 소비재 부문의 발전을 추동하는데, 이 과정에서 새롭게 생산된 잉여가치를 자본화하기 위해 필요한 실현의 문제가 재생산표식 내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확대재생산으로 추가로 생산된 상품에서 잉여가치부문이 화폐로 실현되어야 하는데, 이는 이 상품을 수요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축적의 문제에서는 (…) 자본화된 잉여가치로부터 생성된 추가적 생산물에 대한 수요가 어디서 오는지가 문제가 된다."(197쪽) 그런데 마르크스의 확대재생산은 축적과정을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으로만 구성하고 있으므로 추가로 생산된 상품에서 잉여가치 부분은 자본가계급 내에서 수요되어야 하며, 따라서 이것은 결국 '생산을 위한 생산'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로자는 마르크스의 확대재생산표식의 공식에는 모순이 존재한다고 명확하게 주장한다.
그렇다면 추가로 생산된 상품에서 잉여가치 부문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이것이 로자가 비자본주의 영역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위해 던진 핵심 질문이다. 이와 관련해 로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명확하게 해야 할 것은 최소한 자본화되는 잉여가치와 자본주의적 상품 더미 가운데 잉여가치에 일치하는 부분이 자본주의 영역 내부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며, 무조건 자본주의 영역 외부, 즉 비자본주의적으로 생산하는 사회 계층이나 사회형태들에서 구매자를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583쪽)
로자는 자본주의적 관계 밖에 있는 비자본주의 영역에서 수요가 발생한다면 마르크스의 재생산표식의 공식이 봉착한 난점은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러한 논리의 결과로서 로자는 비자본주의 영역의 존재가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확장 경향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로자는 "제국주의는 아직도 비자본주의적 환경을 가진 세계의 나머지를 독차지하려고 경쟁하는 자본축적 과정의 정치적 표현"(732쪽)이라며 이를 간결하게 주장한다.
<자본의 축적>의 오류들
▲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로자 룩셈부르크 지음, 송병헌·김경미 옮김, 책세상 펴냄). ⓒ책세상 |
마르크스의 확대재생산표식과 관련해서 로스돌스키(R. Rosdolsky)는 로자가 개별 자본과 총자본의 구분을 혼동했다며, 총자본이 자본일반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면 로자의 구분은 문제를 발생시킨다고 지적한다. 또한 생산재 부문이 축적을 선도한다는 로자의 주장도 이미 오류임을 밝힌 여러 주장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비자본주의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고도 자본주의에서 자본가계급와 노동자계급만을 상정하더라도 확대재생산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이 재생산표식에 대한 수정을 통해 검토되기도 했다.
다른 한편 <자본의 축적>에서 제기된 비자본주의 영역의 필요성도 로자의 논리적 추론을 따르면 오류가 존재한다. 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미 확대재생산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가능하다면, 로자가 주장한 비자본주의 영역은 필요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영역 내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굳이 비자본주의 영역에까지 자본이 손을 뻗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비자본주의 영역을 필요로 한다는 로자의 핵심 주장은 이미 논박된 것이며, 로자의 논리에서 제기된 비자본주의 영역을 둘러싼 쟁탈전을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제국주의나 군국주의의 필요성은 사라져 버린다. 나아가 재생산표식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비자본주의 영역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비자본주의가 근대산업체제에 적절한 생산수단을 제공할 능력이 있다고 믿을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지적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살펴 본 것처럼 <자본의 축적>은 많은 오류를 가진 저작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류는 이 서평에서 모두 다룰 수 없을 정도로, 로자가 살던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 문제의 저작을 읽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오류 투성이로 보이는 이 책을 독자들이 왜 읽어야 할까? 다시 말해 과연 육체와 정신의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이 책을 읽음으로서 독자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론과 실천의 통일 속에 살다간 로자를 기리며
필자는 이와 관련해 이 책이 이론과 실천의 통일 속에서 이론을 발전시킨 로자의 삶을 투영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자본의 축적>이 이론과 실천의 통일 속에서 나온 저작이라는 점은 이미 이 책의 '서문'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로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며 당대의 실천 과제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국제사회주의 운동에 근거를 만들기 위함이 목적임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로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재생산표식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로자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담긴 오류를 논리적으로 격파하는데 목적을 두고 집필한 것이 아니라, 로자가 살던 당대의 이론과 실천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 로자 룩셈부르크. ⓒWikimedia Commons |
이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의 축적>은 출간 직후부터 이론과 관련된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와 관련해서도 끊임없는 무시와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무엇보다도 당시<자본의 축적>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K. Marx)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자본의 축적>이 발간되었을 당시, 정통 사회민주주의자 주류들은 마르크스의 이론에는 오류가 없으며, 이 이론을 독일의 현실에 적용만하면 된다는 완강한 교조주의의 태도를 보였다.
나아가 이러한 교조적 태도와 함께 사민당은 우경화의 길로 들어서 이후 전쟁에 찬동하는 길을 닦고 있었음에 비추어보면 로자의 주장은 당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러한 발간 당시의 상황을 보면 이 책은 이론과 정치라는 두 측면에서 모두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난 저작이었다.
그렇지만 <자본의 축적>에 담긴 오류가 이론적으로 존재하고 그 주장이 정치적으로 비판받았다고 해서 이 저작이 쓸모없거나 시작부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독자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 담긴 핵심은 로자가 '비판의 반비판'에서 주장하듯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도그마로 여기지 않는 창조적 해석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에 있다. 이와 관련해 로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사회적 총자본의 근본 사상을 자세히 살피고 있는 <자본> 2, 3권은 그 전문가들에게는 죽은 자본으로 남아 있다. 그들은 <자본> 2, 3권에서 문자, 표, 그리고 도식을 배웠지만, 정신은 인지하지 못했다. (…) 오래전부터 마르크스의 창의력이 풍부한 가설을 고착된 도그마로 변환하는 것과 선구적인 정신이 창조적인 회의를 수용하는 곳에서 풍요로운 위안을 찾는 것이 아류들의 특권이었다."(822쪽)
따라서 오늘날 <자본의 축적>을 읽는 독자들은 이 책의 오류를 발견하는 데 주목하면서도, 당시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던 마르크스의 재생산표식을 로자가 대범하게 수정해 이 표식이 갖고 있는 의미를 되살려 내는 데에 중요한 공헌을 했으며, 이를 당대의 현실 조건에 맞춰 적용하려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의 축적>에서 제기된 자본주의의 축적을 비자본주의 영역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는 큰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독자들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로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자본은 전 지구 차원의 생산수단과 노동력 없이는 꾸려 나갈 수 없으며, 축적 운동을 방해받지 않고 전개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서 천연자원과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천연자원과 노동력의 압도적 다수는 실제로 전자본주의적 생산형태들 범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이 자본축적의 역사적 환경이다― 이로부터 모든 지역과 사회들을 지배하기 위한 자본의 격렬한 갈망이 발생한다."(593쪽)
이러한 주장은 이미 마르크스가 제기한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마르크스는 세계시장은 자본주의 탄생기부터 자본축적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본은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으려는 경향이 있으며 이를 위해 더 많은 교환점들을 창출하려 한다. 따라서 자본이라는 개념 자체에는 이미 세계시장을 창조하려는 경향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로자가 마르크스의 주장을 직접 계승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자본주의가 세계시장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여전히 많은 영감을 줄 수 있다. 게다가 로자가 이러한 자본의 범세계성을 인식하고 정치적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으로 국제사회주의운동의 확대를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점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이다.
<자본의 축적>은 무결점의 오류가 없는 책은 아니다. 이것은 마르크스 이후 또는 로자 룩셈부르크 이후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발전과 실천적 운동의 과정에서 충분히 밝혀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로자의 책을 읽어야 한다면 그 의의는 로자가 살던 당대의 이론과 실천의 통일 속에서 현실을 바꾸려 노력한 그 정신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레닌(V. I. Lenin)이 로자를 추모하며 말한 것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수많은 오류에도 로자는 '영원한 독수리'인 것이다. 독수리는 닭처럼 낮게 날수도 있지만 닭은 독수리처럼 높게 날수는 없는 법이다. 독자들이 이 책에서 배워야 할 점은 마르크스주의 발전의 역사에서 나타난 이 영원한 독수리가 당대의 현실과 부딪치면서 해결하고자했던 과제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변혁하는 과정에서 <자본의 축적>을 읽음으로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영감의 원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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