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중2의 따갑던 어느 여름날이었던 것 같다.
반에 들어서는데 분위기가 달랐다. 아, 뭔가가 시작되었구나. 서늘한 느낌이 가슴 아래쪽을 파고 들었다. 그날부터 누구와도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근 한 학기, 나는 반 친구 누구와도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친구들은 나를 슬슬 피했고, 대화는 모두 단답식이었다. 도무지 이유를 알아야 이해라도 할 텐데, 아무도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냥…' 그게 내가 들은 답의 전부였다.
찬바람이 나던 어느 날, 반의 실세인 A가 나에게 와서 말을 걸자 냉랭하던 기운은 마법처럼 풀렸다. 반 친구들과 예전 상태를 회복하는데 채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나중에야 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총각이고 인기 만점이었던 수학 선생님이 A앞에서 나를 '대놓고' 칭찬했는데, 나는 그 사실을 이야기하는 A에게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고, 그 건방짐에 A가 벌을 내린 것이었다. 하루아침의 배척, 그리고 다시 하루아침의 회복. 아이들과 놀지 못하는 하루하루는 너무나 긴 세월이었는데, 그 고통의 상태로 들어가고 나오는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아마 이런 것이 '은따'일 게다. 신문에서 왕따 관련 보도가 나올 때마다 나는 그날의 더위와, 더위를 파고든 서늘한 공포를 새삼 느끼곤 했다. 그저 말을 안 하는 상태에서 지내는 것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매일 가서 맞거나, '빵 셔틀'을 당하거나, 조롱의 대상이 된다면 얼마나 힘들까…. 시간이 좀 더 지나 왕따 동영상이 유포되면서는, 감정이입도 불가능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왕따를 지켜보며 낄낄대는 아이들이 악마처럼 보였고, 그런 일이 벌어지는 곳이 지옥이 아니면 어디란 말인가 싶었다. 왕따 현상도, 왕따 시키는 아이들도, 왕따에 대한 정책도 모두 이해 불능의 상태였던 셈이다.
2.
▲ <이지메의 구조>(나이토 아사오 지음, 고지연 옮김, 한얼미디어 펴냄). ⓒ한얼미디어 |
저자는 모든 집단에는 여러 질서가 중첩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민주주의적 질서도 있지만, 권력의 질서도 있고, 성별에 따른 질서도 있다. 이지메는 일종의 군생질서(群生秩序)가 유지되는 방식이다. 군생질서는 '힘 있는 자가 옳다'는 원리에 따르는 독특한 질서로서, 나름대로 체계적이고 자체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 어른들의 세계가 시민사회의 질서에 따라 인권이나 자유, 배려와 같은 민주주의적 원리를 근간으로 삼으며 이를 어길 경우 법의 심판을 받는다면, 이들 중학생들의 세계는 강하고 힘 있음을 원리로 하여, 시시때때로 변하는 인간의 감정을 충실히 반영하는 독특한 질서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 질서는 "그때그때 모두의 기분이 동해서 생겨나"며, 강한 것이 '옳은' 것이고, "가장 그른 것은 집단구성원이 서로 공명하는 세계에 금이 가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런 원칙으로 보면, 어른들의 눈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이 설명된다. 매순간 생겨나는 질서이기 때문에 순간마다 '모두의 분위기'에 신경 쓰고, 그 분위기에 맞춰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그에 적합한 행동을 해야 한다. 가장 강한 자도 순간의 실수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으며,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는 행동을 하면 곧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한번 따돌림의 대상이 되면, 그 관계를 다시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왕따에 의해 집단의 질서가 견고히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밥을 많이 먹건 적게 먹건, 시험을 잘 보건 못 보건 비난의 대상이 된다. 시험을 잘 보면 잘난 척이고, 못 보면 멍청한 것이다. 아이들은 '극도의 관계주의자'인 것이다.
'(보편적인) 옳은 말을 하는 아이들'은 '눈치 없는 아이들', '주제를 모르는 아이들'로서 이들의 질서를 흐트러뜨린다는 점에서 따돌림의 대상이 된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개인의 인격이 우선이고, 그래서 그 아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시민사회적 질서를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 사회에서는 유대가 먼저이고 개인은 그 유대의 한 지점에 불과하다. 친한 친구를 발로 차고서도 아이들은 크게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개인의 의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집단질서가 작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저 재미로… 분위기에 휩싸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힘의 집단규칙이 개인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3.
하지만, 아무리 집단질서의 힘이라고 하더라도 잔인함의 정도가 지나치다. 이 책에 나오는 사례는 경악할 수준이다. 철사나 쓰레기를 먹이는 것은 물론, 온실에 가두고 숨통을 조이고, 수산화나트륨을 뿌리고, 담배를 수십 개를 동시에 피워 기절시키고, 매춘까지 시킨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는가? 나이토 아사오는 이에 대해 '전능감'의 쾌감이라고 답한다.
뭔가 잘못된 듯한 불안감,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분노로 인해 상당수의 아이들은 불완전감에 시달린다. 그런데, 이 불완전감이 폭력 등의 폭발을 경험하게 되면, 현실적이지 않은 전능감으로 전환된다. "힘으로 충만하고 모든 것이 구제될 것만 같은 무한의 감각"(73쪽)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이지메는 '타인을 조종하는 전능감'과 결합된다. 독자적인 인생을 사는,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타인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전능감이 피해자의 고통을 보면서 현실화된다.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시민사회적 감수성으로 보면, 남의 고통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은 완전한 악이지만, 전능감의 욕망을 가진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짜증난다. 그것은 자신의 전능감이 침해당하는 일이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보면 엘리베이터를 두고 8층에서 뛰어 내려가 간식을 사오도록 하는 일은 이해가 안가는 일이지만, 피해자의 피로와 고통을 즐기는 가해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지시이다. 목표 자체가 피해자의 지배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복종하지 않으면 분노하여 더 강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피해자의 고통은 가해자의 전능성과 결합해 있는 것이다.
희생양이 뜻한 대로 망가져주지 않으면 '파괴신'은 힘의 감각으로 채워질 수 없다. 노비가 즉각적으로 복종해주지 않으면 '주인' 자체가 붕괴되고 만다. 장난감이 즉시 반응하여 확실한 형태 변화를 보여주지 않으면 '모래놀이를 하는 신'은 무너져 버린다. (95쪽, 강조는 인용자)
이 말은 역으로 피해자가 뜻한 대로 행위하지 않으면, 혹은 충분히 반응하지 않으면, 다른 방식을 도입한다는 것을 뜻한다. 파괴신과 주인, 놀이하는 신은 압축되어 전환된다. 잔혹성이 강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심부름을 시켰는데(주인) 제대로 안하면, 때려눕혀(파괴신) 전능을 구현하고, 발로 차다 심심하면(파괴신) 목에 줄을 걸어 개처럼 기게 해서(모래놀이 하는 신) 지배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피해자는 자살하거나, 더 강하게 인내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대개 많은 사람들은 자살자에 대해 "자살을 할 힘으로 살면 되지 왜 자살을 하는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선택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절대 자살하지 않는 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 퇴로가 없는 끊 없는 괴롭힘 속에서 고통을 정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자살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살하지 않은 다른 한 축은 더 강하게 인내한다. "비참하지만 나는 강하니까 견딘다"라는 '체험의 가공'으로 견딘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이런 현실을 재생산한다. 지배자는 더 가혹해지고, 피해자는 더 버틴다. 이런 과정 속에서 피해자는 인내하고 겪어냄으로써 스스로 강해졌다고 믿으며, "인내의 미학을 학습하면서 오로지 처세의 기능을 습득"(115쪽)하게 된다. 이들에게 처세는 일종의 '강인함의 전능'으로서, 비참한 자신을 되살리는 구제의 의미를 지닌다. 자신을 무쇠처럼 강인한 이미지로 개조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들이 가해자가 될 경우에는 더욱 가혹해진다. 가해자의 전능성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4.
아이들이 고유의 질서에 따라 왕따를 만들어내고 전능감의 열망 속에서 그것을 재생산하며, 순간순간 모든 아이들이 그 상황을 재생산하는데 참여한다… 이것이 연쇄적이라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그 고리를 끊을 수 있는가. 이지메가 못된 몇몇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구조'라면, 그 해결책 역시 구조적으로 제시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우선적으로 법의 적극적 도입과 학급제도의 폐지를 제안한다. 이지메는 전능성의 쾌감에서 출발하지만, 절대적인 손해를 볼 경우에는 지속되지는 않는다. 처벌이나 규제가 작동된다는 사실만 확실해도 대부분의 이지메는 사라진다. '학교는 성역'이라는 믿음 때문에 애매하게 처리되고, 그 결과 안전함을 느낀 피해자는 더 심하게 이지메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지메는 인간관계를 선택할 범위가 없기 때문에 생겨난다. 만남에 대한 선택지가 넓다면 따돌림은 불가능하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강제 배정 후 이동이 불가능한 '학급'과 선택할 수 없는 '담임'은 이지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지메나 왕따 등의 현상은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교습소 유형'의 학교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폭력은 '깨끗하게 법적으로 처리'되며, 학급으로 묶이지 않으므로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 아이와 거리를 둘 자유를 확보한다. 시민사회의 질서가 군생질서를 압도하는 것이다. '학급공동체 유형'의 관리 방식은 학교가 선하다는 믿음 위에서 아이들에게 규범을 가르치고자 한다. 이런 강제 배정 환경 속에서 군생질서가 생겨난다.
"학교는 (…) 머리에서 발끝까지 학교의 색을 입히려 한다. 학교 공동체주의 이데올로기를 채용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는 집단생활에 의한 전인교육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그것을 개인에게 강제한다. (…) 학교제도는 좁은 생활 공간에 학생을 강제 수용한 다음, 다양한 관계를 강제한다. (…) 이런 집단화하는 설계는 (…) 자신의 운명이 항상 (교사나 친구들의) 기분이나 정치적 사고에 좌우되는 사태를 초래한다." (162~163쪽)
의무교육과 권리교육을 나누고(우리의 학교제도 역시 의무를 권리로 동일시하고 있지 않은가!), 교육바우처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한다거나, 학교를 선택제로 바꾸어가기 위한 복합유닛 제시 등 저자가 제시하는 미래상은 급진적이면서도 구체적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학습의 생태에 맞도록 학교를 유연화하자는 것이다. 이런 개혁안은 사토 마나부의 개혁안과 함께 읽어볼만 하다. <학교의 도전>과 <교사의 도전>(모두 손우정 옮김, 우리교육 펴냄)이 수업의 개선을 말하고 있다면, 나이토는 '배움의 공동체'의 한계를 짚으면서 학교 변혁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5.
이지메 혹은 왕따를 반드시 없애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한때의 경험'으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괴롭힘을 당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어떤 형태로건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병리적인 행동이나 집착을 하게 된다. 괴롭히던 아이들은 시민사회로 편입되자마자 '비굴한 소시민'으로 전락하고 만다. 어른이 되어서도, 가족, 직장, 군대, 종교, 지역공동체 등 집단이 있는 모든 곳에는 군생질서가 생겨난다. 사회 전체가 군생질서에 휘감겨있는 상태가 파시즘이나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이다.
전체주의가 무서운 이유는, 인간의 내면적 복종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장(場)의 힘이 개인의 내면을 침식한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김선욱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평범한 것의 악을 발견했다면, 나이토는 그 내면의 동학을 설명한다. '지금-여기'는 중요하지만, '지금-여기'의 집단이 주체가 되어 보편적 질서를 무시할 때, 개인은 파멸한다.
학교는 이지메/왕따의 온상으로 여겨지지만, 역으로 학교는 아이들이 '거리감'과 '차이'를 존중하는 질서를 온전히 익힐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이기도 하다. 세속적 이해관계를 떠나 민주주의적인 질서를 익힐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렇게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에 대한 구조적 인식을 제시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괴물이 되는 메커니즘"(258쪽)을 발견하고 변혁시켜낸다면, 아이들은 자기만의 색깔을 발견하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서로에게 괴물이 되는 조건을, 알면서 방치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교육부에서 단위학교에 이르는 교육 정책의 담당자들이 반드시 일독해야 할 책이다.
ⓒ프레시안(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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