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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서점도 없는데 '어린이 독서왕'이 웬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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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서점도 없는데 '어린이 독서왕'이 웬 말?

[프레시안 books] 정수복의 <책인시공>

기계의 리듬, 인간의 리듬

제목도 흥미로웠다. 책인시공? 낯설면서도 한 번에 와 박힌다. 책 읽는 사람의 시간과 공간이란다. 두 번째 파리 생활에서의 십년은 인문사회학자 정수복에게 유학 시절과는 다른 여유를 준 모양이다. 그 덕에 우리는 파리 시내 곳곳의 개성적인 책방을 안내받고, 책 읽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가 인용한 주노 디아스의 문장, "책 읽기는 기계의 리듬에 맞서 인간의 리듬을 유지하는 행위다"처럼, 우리는 <책인시공>(문학동네 펴냄) 속에서 인간이 인간이 되는 문명의 발명품에 대한 경이로움과 마주하게 된다. "책은 절망의 치료제"요, "생각의 집"이라고 말하는 정수복은 매우 치열하고 집중적인 독서의 경력을 지녔다. 그런 그의, 책에게 보내는 헌사와 독서의 권리에 대한 열정은 "책의 위기"가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는 때에 매우 적절하게 주목되어야 할 하나의 사건이기도 하다.

여기서 "사건"이라고 말한 까닭은 책을 읽는 기쁨을 자꾸 잃어버리고 있는 시대에 대한 한 지식인의 품격 있는 격투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보다 빠른 속도가 숭배되고 디지털의 기호와 영상이 종이와 문자의 세계를 폐품화시키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 책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거리, 그리고 그것에 매혹적으로 빨려 들어가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그려내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책인시공"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

프랑스의 책방, 도서관

▲ <책인시공>(정수복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이 책을 읽어가면서 계속 떠오르게 되는 것은 역시 나 자신의 독서편력이다. 그도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자신이 이르렀던 무수한 독서의 사연들을 풀어내고 있고, 이국의 책방과 도서관의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전설의 울림을 갖는 풍문처럼 들려주고 있다. 또한 때로 서재의 역사를 파고들기도 하고 거리의 헌 책방에서 운 좋게도 건져 올린 보물을 자랑한다.

자랑할 만도 하다. 중세 역사의 권위자 자크 르 고프 자신의 서명이 기록된 자서전을 구했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대형 서점만 생존해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동네 책방이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그 마을의 주민들과 호흡을 하고 있는 광경도 우리에게는 부러움이 된다. 한국의 독서 공동체는 그 연결고리가 곳곳에서 끊어져 있는 채로 빈사의 상태에 놓여 있는 지역이 적지 않다.

공공도서관의 기능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의 보기로 든 파리 교외의 블로뉴비양쿠르 도서관 사서의 이야기는 아, 하는 찬탄이 나오게 했다.

"2002년 그곳에 갔을 때의 일이다. 세계적인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사망한지 한 달쯤 되었을 즈음이다. 그 도서관의 사서가 부르디외 사망 이후 신문과 잡지에 나온 온갖 기사를 스크랩하고 복사하여 자료집을 만들어서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다."

도서관이 수동적인 책 대출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짓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지식 공동체의 창출을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사실 당연한 일이다. 지식 네트워크를 가장 체계화해서 구비해놓을 수 있는 현장이 도서관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우리의 발상에 뭔가 좀 더 밀고 나가야 할 바가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나의 독서편력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60년대 초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이제는 고인이 되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명동 뒤에 있던 일본서점, 양서 책방을 드나들었다. 그 당시 흔치 않았던 영어로 된 책을 그저 구경하는 것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일본어로 된 책을 구해 읽는 흥분에 들떠 즐거웠다.

일찍 글을 깨우쳐 주셨던 부모님 덕분에 제법 두꺼운 책도 읽을 줄 알았던 나는 초등학교 3년 어느 날, 집에 배달되어 온 계몽사의 50권짜리 동화전집을 받고 감격했다. 내 세대들은 대부분 기억하겠지만, 이때 계몽사가 낸 전집엔 작은 서가가 함께 딸려 왔다. 그건 나만의 서재, 나만의 도서관이 생기는 놀라움이었다.

집에는 아버지가 가득 채워놓으신 책들이 우리들의 정신세계를 기르는 양식이었다. 중학교 때에는 도서반과 미술반을 겸했고, 훗날 미국에 유학을 간 것도 순전히 보다 많은 책을 읽고 싶었던 열망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지낸 20여년의 세월도 대학 도서관과 서점을 중심으로 이어진 삶이었다. 지금도 이따금 미국에 다녀오면 가방에 책이 그득해 낑낑거리며 돌아온다.

그러니 이제 집은 온통 책으로 빼꼭하게 차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정수복도 이런 고민을 털어놓고,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그런데 결국 가장 좋은 답은 그 책들을 커다란 서재 공간이 있는 집으로 옮기는 것인데 그건 역시 돈과 관련되어 있으니 이 또한 간단치는 않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 것이, 어디에도 책이 들어찬 공간이다. 거기서 나는 황홀해진다.

도쿄, 런던, 뉴욕 그리고 베이징

일본 도쿄대학교 앞 헌책방에서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 외무상 무쓰 무네미쓰의 외교 비망록 <건건록>의 원본을 구경한 것이 잊어지지 않았고 (너무 비싸 살 엄두는 못 냈고), 런던의 한 책방에서는 팜 덧을 비롯해서 1920~30년대 영국 사회주의자들의 고전적인 책들 몇 권을 구하고는 기뻐했다. 뉴욕에 가면 워낙 여러 곳에 훌륭한 서점들이 있어 그곳을 내내 순례하는 것만으로도 일주일은 그냥 지나간다.

베이징의 대형 서점에도 사람들은 엄청 북적거렸고, 파리에서는 작은 서점에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처지와 비교하기도 했다. 결국, 책방과 도서관은 문명의 풍경 그 자체라는 점에서 그 나라의 미래까지 내다보이는 곳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절망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책의 위기를 우리 사회의 위기로 감지하는 능력 자체가 해체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방송과 언론에서 책에 대한 프로그램과 서평은 사라지거나 줄어들던지 아니면 시청할 수 없는 시간대로 밀려난다. 조만간 정식 개국하는 책 방송 <온북TV>는 그런 현실에 대한 출판계를 비롯한 지식 공동체의 시대적 발언이자, 대안의 모색이다. 공영방송에서 독서를 퀴즈풀이 경쟁을 통한 "어린이 독서왕"이라는 반지성적 발상을 프로그램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책은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있다.

책은 공공재다

책은 독서 시장의 상품이기도 하지만, 공공재적 성격을 본질로 하고 있다. 책이 제공하는 지식과 성찰은 모두가 공유하면서 세상을 아름답고 살기 좋게 변화시키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는 출판계의 고뇌와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으며, 교육은 독서의 진정한 훈련을 도외시하고 있다. 방송과 언론은 책을 읽는 지식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별로 하는 것이 없다.

물론 결국 개인들이 알아서 읽는 것이 독서의 뼈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모두 책이라는 공공재가 자라날 생태계가 든든해야 하는 것이 전제다. 정수복이 보여주는 "책인시공"의 경치에서 일관된 것은 바로 이 지식 생태계의 건강함과 생명력이다. 책을 읽는 시간이 소멸되는 사회, 책을 위한 공간이 빈약한 공동체의 운명은 비틀거린다.

책 한권의 탄생과, 그 책을 집어 드는 독자의 출현은 우리에게 희망의 근거다. 책을 읽는 이에게 복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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