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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머, 페미니스트세요?" 그들의 냉소에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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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머, 페미니스트세요?" 그들의 냉소에 답한다!

[마녀의 '도서관 편지'] <기획된 가족>의 저자 조주은에게

지난 설 연휴 마지막 날, 최근에 나온 당신의 책 <기획된 가족>(서해문집 펴냄, 2013) 을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도서관에서 <현대 가족 이야기>(퍼슨웹 기획, 이가서 펴냄, 2004)를 빌려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책을 나온 지 9년이나 지나 이제야 읽다니 자책하면서. 사실 조주은이라는 이름은 몇 해 전에 이미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제 책을 만들기도 한 친한 편집자로부터 당신의 책 <페미니스트라는 낙인>(민연 펴냄, 2007)을 선물 받았는데, 그 무렵 제 맘을 그대로 대변한 제목에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지요.

한때는 아나키즘을, 또 한때는 마르크시즘을 신봉하다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당시의 제게 그나마 수긍하는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페미니즘 하나. 하지만 저보다 더 열렬한 신봉자들이 가득했던 마르크시즘은 물론이요 동조자는 없어도 비웃음은 사지 않았던 아나키즘과 달리, 페미니즘은 말만 꺼내도 분위기가 싸해지기 일쑤였습니다. 페미니스트예요? 하고 묻는 남성들의 비아냥 섞인 시선이야 그렇다 쳐도 같은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는 싫다고 질색할 때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낙인임을 실감했지요.

여성 단체에 들어간 적도 없고 페미니스트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닌, 오로지 제 삶의 조건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페미니즘을 받아들인 저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실제 페미니스트에게 뭔가 문제가 있나 싶기도 하고 자신도 없어서 그 뒤론 조용히 깃발을 내려놓았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진짜인지 아닌지 맞는지 틀리는지도 의문스러웠지만 그보다 주홍글자를 달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페미니스트를 자임할수록 분노는 쌓이고 고립은 심화되어, 남편은 '페' 자만 들어도 고개를 돌렸고 힘든 시간을 함께했던 벗과는 낯을 붉히는 사이가 되었지요.

그렇게 누구와도 내 고민, 내 생각을 나눌 수 없다는 절망감에 입을 다물었습니다. 가능하면 여성주의 서적들은 멀리하고 페미니즘이니 남녀평등 같은 말들은 입 밖에 내지 않으려 했지요.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을 받았을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때문에 제목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책을 꼼꼼히 읽지는 않았습니다. 다양한 주제의 짤막한 글들을 모은 것이라 여성주의에 관한 제 고민을 해결하기 어려웠던 것도 독서를 방해한 한 이유였고요.

그런데 이번에 <기획된 가족>과 <현대 가족 이야기>에 이어 그 책을 다시 읽으면서, 진즉에 당신 책을 읽고 당신에게 편지를 썼다면, 그래서 운이 닿아 당신과 만나 맥주잔을 기울이기라도 했다면(책에서 맥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고백했던데 실은 저도 당신만큼 맥주를 사랑하거든요, 흐흐), 그랬다면 저를 괴롭혔던 외로움과 절망감에서 좀 더 일찍 벗어났을 텐데 싶더군요. 물론 바쁜 필자가 일면식도 없는 독자와 술자리를 가질 리는 없겠지만 당신의 글쓰기는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살갑고 편안했습니다.

▲ <기획된 가족>(조주은 지음,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아마 그래서일 겁니다. 직장인도 아니고 엄마도 아닌 제가 직업인으로 아내로 엄마로 1인 3,4역을 하는 중산층 맞벌이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획된 가족>을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공감이라지만 책 속의 그들과 저의 일상은 퍽 다릅니다. 지하철 배차 시간을 이용해 아침 화장을 할 만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들과 달리, 저는 느긋하게 집안일을 끝내고 근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일주일에 두 번 운동도 하며 그들이 보기엔 한가한 일상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저 역시 제 일상을 바쁘다고 느낍니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누울 때까지 종일 종종걸음을 치다가 저녁 설거지를 끝낸 뒤 두어 시간, 그것도 읽어야 할 책과 써야 할 원고를 생각하며 불안한 휴식시간을 갖는 게 고작이니 늘 바쁘다 여길 수밖에요. 주관적으로만이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저는 바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제가 18년째 지도강사 노릇을 하는 독서회에서는 바쁜 '선생님'의 시간을 늘 배려하고, 딸과 쇼핑하길 좋아하는 어머니는 바쁜 딸을 성가시게 할까 봐 전화도 잘 안 하시며, 시어머니 역시 바쁜 며느리가 제수음식 서너 가지를 장만했다고 대견해하십니다. 명실 공히 자타가 공인하는 바쁜 사람인 거지요.

그러나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닙니다. 십 몇 년 전, 어머니가 위암 수술을 하고 항암 치료를 받을 당시 미혼에 백수였던 저는 어머니의 주된 간병인으로 수발을 들었습니다. 위로 효성스런 언니 오빠가 넷이나 있고 착한 며느리도 둘이나 있었으니 제가 전적으로 병수발을 든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직장이나 가정에 매인 데가 없는 제가 어머니 곁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지요. 그런데 간병기간이 길어지면서 고통 받는 어머니보다 제 자신이 가여워지더군요. 막 서른을 넘긴 '황금 같은' 나이가 억울하고, 미혼에 백수란 이유로 내 간호를 당연히 여기는 가족들이 야속하고, 간병의 수고를 알아주기는커녕 툭하면 죽는 게 낫겠다며 맥 빠지게 하는 어머니가 밉고….

그렇게 원망과 서운함에 숨이 막힐 때면 저는 집 앞 도서관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남짓 책을 읽었습니다.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 시몬 드 보부아르의 <노년>(홍상희·박혜영 옮김, 책세상 펴냄),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에 선 인간>(유선자 옮김, 동문선 펴냄) 같은 늙음과 죽음에 관한 책들을 읽었고, 제가 느끼는 초조와 불안을 이해하기 위해 제이 그리피스의 <시계 밖의 시간>(박은주 옮김, 당대 펴냄)에서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기상 옮김, 까치글방 펴냄)까지 시간에 관한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지요. 그러면서 어렴풋이 깨달은 것은, 인간은 시간에 묶인 존재이며 그 시간이란 주관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도 하기에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개인적 초월은 물론 사회적 해방도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제 인생의 목표는 제 시간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 시간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그 첫걸음이었고요.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한 남편과 죽도록 싸운 것도, 늦은 나이에 취업해서 기절할 만큼 일한 것도, 작가로 전업한 뒤 두세 개씩 연재를 하며 쉬지 않고 제 자신을 재우친 것도 가만 들여다보면 다 제 시간의 중요성을 인정받고 가치를 높이기 위함이었지요.

그런 제 경험이 있기에 <기획된 가족>에서, 오전에는 우유 배달을 하고 오후에는 밤11시까지 미싱 일을 하면서도 바쁘단 생각을 한 적이 없다는 최명옥과, 강남에서도 자녀 교육의 전문가로 인정받을 만큼 정보 수집과 스케줄 관리에 많은 시간을 쓰면서도 "안 바빠요, 놀아요"라고 말하는 전업주부 이미숙의 사례를 보며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말했듯, "여성들은 자신의 일상을 사회에서 인정받는 유급 노동으로 채워나갈 때만 '바쁘다'고 인식"하며 바쁘다고 공언할 수 있는 것이지요. 똑같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데 예전에는 '논다'고 여기던 가족들이 지금은 '일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래서 제가 당당하게 바쁘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문제는 바쁘게 뛰어 제 시간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그것이 저를 제 시간의 주인으로 만들지는 못했다는 겁니다. 오히려 사회적 가치에 매달려 점점 더 제 시간을 사회적 시간에 묶이게 하는, 그리하여 자본이 부여한 시간의 가치로 제 시간을 평가하고 조직하며 자본화된 시간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했지요. 마치 당신이 만난 맞벌이 화이트칼라 여성들이 자신의 온 시간을 중산층 가족을 유지, 재생산하기 위해 철저히 기획하고 관리하는 것처럼요.

그리고 그 기획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을 때 그녀들은 "더 이상 바쁘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근대적 시간 규율에 적응하고 생산성 있는 인간으로 자립할 때, 중산층 가정으로서 지속 가능한 물적 토대가 마련되었을 때, 그녀들은 쫓기듯 살아온 삶에서 벗어나 여유를 찾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그 여유가 자본화된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보다는 오히려 한 시간에 10가지 이상의 일을 하는 여성의 압축적 시간 경험을 한때의 과정으로 당연시하고 사회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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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가족 이야기>(조주은 지음, 퍼슨웹 기획, 이가서 펴냄). ⓒ이가서
지난 2004년 펴낸 <현대 가족 이야기>에서 당신은 "한국 사회에서 가정 중심성은 빠르게 균열되고" 있고 "중산층 여성들은 가정만이 자신의 이상이 이루어질 곳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지요. 하지만 <기획된 가족>은 근 십년이 지난 지금, 가정 중심성이 새롭게 강화되고 맞벌이 중산층 여성들이 가족의 기획자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당신이 아프게 지적했듯이, 여성의 경제적 능력이 성 평등을 자극하기는커녕 오히려 여성의 노동 가치를 떨어뜨리고 가사 노동, 돌봄 노동을 주변화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지요.

살림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저는 밥하고 빨래하는 일을 그리 싫어하지 않습니다. 시장에 갓 나온 봄나물을 보면 다듬는 수고가 걱정되면서도 선뜻 손이 가고, 속이 꽉 찬 고랭지 배추를 보면 집에 김치가 있는데도 몸이 근질거립니다. 음식을 장만하며 손으로 느끼는 자연은 도시에서 책에만 파묻혀 사는 제게 좋은 공부가 되기에 외식을 하거나 남의 손을 빌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그 좋은 노동을 남편도 함께하는 겁니다. 힘들게 바깥일 하고 와서 집안일까지 하라는 게 아니라 사회가 집안일까지 염두에 두고 바깥일의 강도를 정해서 다함께 즐겁게 일하자는 것이지요.

돌이켜보면 어머니를 간호하던 그 시절, 저를 괴롭힌 것은 어머니를 돌보는 노동이 아니라 미혼의 백수 막내딸에게 그 노동이 배분되는 불평등한 위계였습니다. 아픈 어머니를 돌보는 일은 오히려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지요. 그 시간 덕분에 어머니라는 사람과 그 존재에 대해서, 나이 들고 병들고 죽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제 자신의 갈망과 거기 드리운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으니까요. 아마 아버지와 오빠들이 기꺼이 간호에 동참하고 제 돌봄 노동을 가족은 물론 사회도 인정해줬다면 그 시간을 견디기가 훨씬 수월했을 터이니, 제가 꿈꾸는 페미니즘은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책을 읽으며 당신이라면 제 꿈을 이해하고 격려해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독서하는 내내 즐겁고 뿌듯했지요. 더욱 기쁜 것은, 페미니즘에 일말의 관심도 없던 남편이 <기획된 가족>을 재미있게 읽더니 책꽂이에 꽂힌 <페미니스트라는 낙인>까지 자발적으로(!) 읽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니 제가 어찌 당신에게 감사 편지를 안 쓸 수 있겠습니까? 조주은 씨, 고맙습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이 좀 더 행복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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