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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고 앉았네"라고? 그게 얼마나 대단한데!

[프레시안 books] 브라이언 보이드의 <이야기의 기원>

"너, 그렇게 말 안 들으면 멍멍사자가 와서 잡아간다."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었다. '멍멍사자'라는 말 한마디에 어린 조카 녀석은 금세 순한 어린 양으로 돌아갔다. 조카가 "싫어."를 입에 달고 살고 툭하면 짜증을 내는 미운 세 살에 접어들자 나의 언니는 원효대교 밑에 사는 신비의 동물 '멍멍사자' 이야기를 지어냈다.

"멍멍사자는 사자 비슷하게 생겼는데 훨씬 크고 훨씬 힘도 세. 애기들이 엄마 말을 안 듣고 떼를 쓰거나 울면 냉큼 달려와서 잡아가지."

엉성하기 짝이 없는 이런 얘기를 조카 녀석이 믿는다는 게 참 웃기면서 신기하기도 했다. '괴물'이 실재하는지 가상의 존재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글을 깨치기는커녕 말도 그저 단어를 나열하는 수준에 불과한 아이가 다른 존재를 인지하고 심지어 사건이나 상황을 이해하는 듯 보였으니까. '멍멍사자'는 한동안 제 역할을 열심히 하다가, 하룻밤 새 돌아다니기에는 세계가 너무 넓다는 것을 알게 된 머리 굵은 아이들에게서 산타가 멀어져 가듯이 조카 녀석이 글을 깨치고 보다 많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섭렵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은 소환되지 않았다.

사실 허구적 이야기에 탐닉하는 것은 비단 아이들만이 아니다.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란 티끌만큼도 없는데도 부잣집 눈 먼 아가씨와 날건달의 사랑 이야기(<그 겨울, 바람이 분다>)를 보기 위해 친구와의 약속을 제쳐 두고 집으로 달려가며, 1950년대 일본의 어느 온천장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푸른 묘점>(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욱 옮김, 북스피어 펴냄))에 날밤을 샌다.

차라리 그 시간에 친구와 조직 생활의 허와 실을 파헤치거나, 하다못해 잠이라도 푹 잤더라면 다음날 출근길 전철에서 꾸벅꾸벅 졸다 애먼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은 없지 않을까. (보통 엄마들도 그러지 않는가. "쟤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이 소설책이나 읽고 앉아 있고.")

▲ <이야기의 기원>(브라이언 보이드 지음, 남경태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하지만 이야기에 대한 탐닉은 인간 보편적인 성향인 듯 보인다. 나이가 적건 많건 글을 알건 모르건 남자건 여자건 우리는 이야기를 보고 듣고 읽고 쓰고, 때로는 가공을 해서 퍼뜨린다. 심지어 문자가 없는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구전의 형태로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모두가 이야기를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는 데에는, 혹시, 이야기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서가 아닐까. 사실은 이야기가 우리 삶에 엄청난 이점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야기를 기능적 관점에서 파헤치려는 사람들이 있다. 정확하게는 적응적 관점이라고 해야겠다. 적응(adaptation)이란, 현대 진화 생물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개념 중 하나로 오래도록 지속된 자연선택 작용(진화)으로 생겨난 기능 면에서 효과적인(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주는) 무엇을 말한다.

우리 신체를 예로 들자면, 탯줄은 태아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게끔 정교하게 설계된 적응이다. 하지만 배꼽은 탯줄이 끊어지고 아문 흔적으로 탯줄이 존재하다 보니 부수적으로 생긴 것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런 기능이 없다. 그래서 배꼽은 적응이 아니라 부산물(by-product)이다. (진화 심리학자 전중환이 <오래된 연장통>(사이언스북스 펴냄)에서 썼듯이, "배꼽은 우리 조상이 먼 길을 여행할 때 하나씩 까먹는 심심풀이 땅콩을 저장하기 위한 적응이 아니다.")

문학을 포함한 이야기, 그리고 그림이나 음악 등 인간의 지적 산물들도 이러한 적응적 관점에서 살펴보려는 시도들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무렵부터였다. 인간의 마음과 행동 또한 신체적 특징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선택에 의한 기나긴 진화 역사의 산물이라 주장하는 진화 심리학이 등장하면서, 진화 미학(evolutionary aesthetics), 문학 다윈주의(literary darwinism) 또는 다윈주의 문학 비평(darwinian literary criticism)이라는 깃발 아래 진화 생물학자(제프리 밀러, 데이비드 슬로언 윌슨, 데이비드 바래시)와 진화 심리학자(미셸 스칼리스 수기야마, 존 투비, 레다 코스미디스), 그리고 영문학자(조지프 캐럴, 브라이언 보이드, 조나단 고트쉘), 예술 철학자(고(故) 데니스 더턴), 소설가(이언 맥큐언) 등 각기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술에 참여하려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에 주목하고 예술의 진화적 이점을 밝혀내려 하고 있다.

얼마 전 국내에서 출간된 <이야기의 기원>(브라이언 보이드 지음, 남경태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은, 이러한 문학 다윈주의 연구의 초창기부터 활발하게 활동해 온 영문학자 출신의 브라이언 보이드가 이야기를 진화적 관점에서 살핀 그간의 문학 다윈주의 연구들을 모으고 정리한 책이라 볼 수 있다. 사실 600쪽에 달하는 이 책은 내용 또한 그 중량감에 견줄 만큼 깊고도 무거워서 일반인들을 위해 쓴 교양서라기보다는 문학 다윈주의에 입문하려는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을 염두에 두고 한 학기 강의를 압축해서 쓴 느낌이다.

이야기를 추구하는 우리의 성향은 적응일까? 어떤 특수한 기능이 있기에, 그러니까 이야기가 기나긴 진화 역사에서 인간이 생존하고 번식해서 자손을 남기는 데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었기에 우리는 이야기에 애착을 갖게 된 것일까? 아니면, 이야기는 다른 진화적 적응들을 갖추다 보니 경품처럼 딸려 온 부산물일 뿐인 것일까? <이야기의 기원>은 이야기 그리고 예술이 적응이냐 부산물이냐를 놓고 오고가는 다양한 의견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고생물학자인 고(故) 스티븐 제이 굴드는 그 유명한 스팬드럴(spandrels) 비유를 통해 인간 정신과 그로부터 비롯된 모든 것들은 비대해진 두뇌의 부산물일 뿐 그 어떤 진화적 이점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 바 있다.

반면에 언어학자이자 진화 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는 인간의 정신(마음)이 적응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치즈케이크가 단맛에 대한 우리의 쾌락 회로를 자극하여 쾌락을 어마어마하게 느끼도록 만들어진 인공물이듯이 예술 또한 다른 목적으로 진화된 신경 회로를 자극하게끔 인공적으로 설계된 일종의 '마음을 위한 치즈케이크'라고 이야기했다.

예술이 특정한 목적을 수행하게끔 진화된 적응이라는 의견 안에서도 예술 전반과 문학과 미술, 음악 각각의 진화적 기능에 대해, 사슴의 큰 뿔이나 공작의 화려한 꼬리처럼 남성이 자신의 우수한 유전적 형질을 여성에게 과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구애 행동(수단)이라거나 집단 내 구성원들의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등의 여러 가지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보이드는 예술이, 그리고 이야기가 동물의 신체적 놀이에 대응되는(그리고 거기에서 파생하여 확장된) 일종의 인지 놀이라는 의견에 동참하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포유류와 대부분의 조류에서 관찰되는 놀이는 덜 위급한 상황에서 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포식자나 경쟁자 등 위험에 대비하여 도망과 추격, 공격과 방어, 사회적 상호 작용 등을 미리 연습할 기회를 제공하는 적응적 행동이다. 활기찬 놀이를 반복하며 신체 근육과 기술을 연마한 동물은 실제로 위험이 닥쳤을 때 놀이를 통해 대비하지 못한 동물에 비해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부모 밑에서 안전한 보살핌을 받으며 아직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경험조차 해 보지 않은 어린 동물들을 어떻게 놀이에 열중하게 만든단 말인가. 게다가 놀이는 에너지 소모도 크고 부상의 위험도 따른다. 영리하게도 진화는 '쾌락'이라는 동기 부여 방식을 고안해내 놀이에다 덧붙임으로써 동물들이 놀이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야기는 이와 같은 신체 놀이와 유사한 일종의 가상 놀이라는 것이 보이드의 주장이다. 특히 허구적 이야기는 인간이 복잡다단한 사회를 살아가며 겪게 될 수많은 상황들, 수많은 어려움들을 이야기 속 인물들의 경험을 통해 가상 체험하도록 한다.

실제 행위를 하지 않고 그 행위를 듣거나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행위를 촉발시키는 신경세포가 자극된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사고실험 및 모의실험을 통해 적은 비용과 낮은 위험도로 대리 경험을 해 봄으로써 상황을 해석하고, 여러 가지 시나리오와 행동, 대응을 구성하고 시험하는 능력이 향상될 수 있다면 이는 이야기를 접하지 않은 사람과 비교해서 명백한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이야기는 그 본성상 우리를 자신의 관점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점으로 계속 이동하게 하며 타인의 행동에서 믿음과 욕망, 행동의 동기들을 추측하게끔 자극한다. 이야기 속 인물들의 관점을 취하는 과정을 통해 민간 심리(학)(folkpsychology)와 마음 이론(theory of mind) 등의 인지 능력이 향상되고 공감하는 성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고도의 인지 능력은 협력과 경쟁, 서열 및 유대 관계를 포함해 타인과의 상호 작용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사회적 동물인 우리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

거기에 더해 이야기는 사실에 기반한 유익한 정보들을 풍부하게 제공하거나, 속담이나 동화, 우화처럼 사회적 관습을 비롯한 친사회적 가치를 확산하여 점차 커져 가고 복잡해져만 가는 집단 내에서 우리 인간들이 타인과 어울려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결국 이야기는 우리 인간이 먼 옛날 수렵채집 생활을 하며 소규모 집단을 이뤄 살아가던 시기에서 갑자기 집단의 크기가 커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당면하게 된 여러 가지 인지적,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정교한 적응이다. (저자는 우리 인간의 비대해진 두뇌와 지능이 사회적 선택 압력에 따른 산물이라는 사회적 두뇌 가설(Social Brain Hypothesis)을 지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척박했던 과거의 환경에서는 이야기를 짓고 나누는 행위가 먹이를 구한다거나 자식을 돌보는 등의 다른 행동들에 비해 특히나 호사스러운 것이었을 테다. 그래서 역시나, 놀이와 마찬가지로 본능은 이야기에 '쾌락'이라는 신경 생리학적 자기보상 장치를 달아 우리 인간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추구하고 이야기에 탐닉하도록 만들었다.

이 책은 이야기의 진화 역사적 기원과 인간 본성이라는 내재적 기원을 함께 추적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진화 생물학과 진화 심리학, 발달 심리학, 인지 신경 과학 등 다방면의 과학적 연구와 가설, 이론 등이 숱하게 등장하며, 때론 이러한 정보들이 유기적으로 얽히지 못한 채 맥락에서 유리되거나 그저 흩뿌려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 미학이나 문학 다윈주의의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만큼, 다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 그 과정에서 보고 듣고 배운 모든 것들을 요약 정리한 노트에 불과할지라도 예술이나 이야기를 진화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 어떤 태도를 나타내는지, 이 학문은 어떤 연구 흐름을 따르는지 등을 파악하는 데에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김한영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이나 전중환의 <오래된 연장통> 등에서 문학과 음악, 미술 등 예술의 진화적 기원에 관한 연구들을 개략적으로 접하고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관심을 갖게 된 사람이라면 충분히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기원>과 비슷한 시기에 출간이 되었으며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야기만큼이나 예술의 다른 분야들까지 깊이 있게 훑고 있는 (그리고 좀 더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데니스 더턴의 <예술 본능(The Art Instinct)>(아마도 조만간 국내에서 출간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을 이 책과 함께 읽는다면 예술에 대한 진화적 접근의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더없이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으며,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늘 작가란 대단한 존재들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작가는 그냥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참으로, 진정, 정말로, 대단한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작가는 인간의 심리를 (그것도 인생의 단계별로) 잘 아는 심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인지 능력을 잘 꿰뚫고 있는 인지 신경 과학자에다, 길고 긴 인간 진화의 역사까지 내다보는 진화 생물학자이기까지 한 것이었다!! 이러니, 우리가 이야기를 탐하지 않고 배기겠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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