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몰라서 당하는 일도 있지만, 뭔 일이 날지 알고도 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는 길마저도 자신의 선택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 그 사람이 그러했다. 그가 1689년(숙종15)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올렸다. 윤3월 초사흘이었다.
큰형에게 보내는 편지
앞서 11일에 내려주신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내가 오는 편에 한식날 내려주신 편지를 또 받아보았습니다. 제사를 지내고 도성에 들어가셨다는데, 기거가 어느 정도 편안하심을 알고 무척 위안이 되었습니다. 저는 일단 근심은 면했지만, 듣자니 죄를 가중하라는 논의가 조만간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이미 고려하고 있던 일입니다. 모든 일은 하늘에 달렸으니 단지 순순히 받아들일 뿐이지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오직 삼성(參星)과 상성(商星)처럼 뚝 떨어져 얼굴을 뵙고 영결할 길이 없으니, 그것이 처량하고 슬픕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봉산(蓬山) 소식은 더욱 묘연하여, 생각할수록 단지 슬픔만 늘어납니다.
<금골산록(金骨山錄)>은 전에 등본(謄本)이 있었으나 미처 가져오지 못했는데, 그 기록을 보여주신다면 파적거리로 삼을까 합니다. 그 산은 군(郡)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섬 가운데 있어서 바위산이 제법 볼만하지만 이른바 삼굴(三窟)은 극히 위험한 절벽이어서 발을 돌리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죄인의 행적으로 그럴 기회도 없겠지만, 어차피 쇠약한 나이에 병든 다리로는 올라갈 가망도 없습니다.
1689년. 기사년(己巳年)이다. 희빈 장 씨의 득세와 함께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는 사화(士禍)가 있었던 그 해. 조정에서는 김수항에 대한 추가 처벌 논의가 한창이었다. 그때 그는 귀양지인 전라도 진도에서 큰형의 편지를 받고 답장을 올렸다.
큰형은 김수증(金壽曾)이다. 수(壽) 자가 돌림자이다. 삼성(參星)은 동쪽에, 상성(商星)은 서쪽에 있기 때문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형편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이 편지에는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큰형을 만나보지 못하고 변을 당할 수 있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봉산(蓬山) 소식'이란 작은형 김수흥(金壽興)의 소식을 말한다. 봉산은 경상도 장기(長鬐)인데, 파직된 뒤 장기에 귀양 가 있던 작은형 김수흥의 안부를 몰라 애태우는 것이다. 김수흥은 이듬해인 1690년(숙종16)에 귀양지에서 세상을 떴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을까? 이 와중에 답사를 가고 싶다는 말을 꺼낸다. 편지에 나오는 <금골산록(金骨山錄)>은 진도에 귀양 왔던 이주(李冑)란 사람이 지은 금골산 답사기를 가리키는 듯하다. <국역 속동문선> 권21에 나온다. 죄인 처지에 가망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금골산에 오르는 상상으로 답답함을 견디려 했던 것인가 보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4월 초순, 그는 숙종의 명에 따라 사약을 받는다.
▲ 금골산(해발 193미터) 입구.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에 있다. 개골산이라고도 불리는 "진도의 금강"이다. 문곡은 여기에 한 번 올라가보고 싶었나보다. ⓒ오항녕 |
▲ 금골산에서 내려다본 해언사. ⓒ오항녕 |
빗나간 인연
잠깐 시간을 거슬러 가보자. 때는 현종 6년(1665) 9월 5일, 나중에 숙종이 되는 원자 순(焞)은 처음 스승을 맞아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젖먹이가 아니다. 조선의 국왕이 되기 위한 첫걸음으로 받는 정식 교육이 시작되었다. 현종 2년(1661)에 태어났으니, 원자의 나이 다섯 살이었다.
원자를 가르치는 직책을 보양관(輔養官)이라고 불렀다. 후일 세자로 책봉되면 정식으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라는 관청을 두어 세자의 학문과 덕성을 가르친다. 원자는 아직 공식 관청을 두지 않고 보양관만 두어 스승으로 삼았다. 현종의 아들인 원자의 보양관에는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 고종의 왕비는 '명성황후(明成皇后)'임!)의 큰아버지인 김좌명(金佐明), 그리고 김수항(金壽恒)이었다.
이후 원자는 이듬해인 현종 7년 3월까지 <효경(孝經)>을 거의 다 읽었다. 당시 이조판서를 맡고 있던 김수항은 원자 보양관을 사직하며 다음과 같은 차자를 올렸다.
<효경> 한 책을 지금 이미 강학을 마쳐 덕량과 학업이 늘 민첩하고 날로 나아가니, 어리석은 신의 기쁜 마음은 실로 다른 사람보다 만 배는 될 것입니다. (…) 배운 내용을 되새기고 인도하여 총명에 도달하게 하시어 애당초 어릴 때부터 어진 사대부를 접견할 때는 적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가까이할 때가 많지 않은지 경계하도록 하십시오. (…)
그러나 그 근본을 추구해보면 또한 전하께서 몸소 실천하여 가르치기에 달려 있습니다. 대체로 전하의 한 마디 말씀과 한 가지 행동은 원자가 보고 배우는 대상 아닌 것이 없으니, 진실로 사소한 일일지라도 삼가지 않음이 없어야 하며 어느 곳에서라도 공경하지 않음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
또 반드시 궁궐 안을 엄숙하게 하고 사특한 길을 막아서 말만 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들락거리며 아첨하지 못하게 하고, 즐기며 가지고 노는 물건을 보거나 듣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 차자는 <숙종실록>과 <문곡집>에 모두 실려 있다. 반년 정도 원자를 가르친 이후 김수항은 보양관을 사직했는데,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면서 원자가 어렸을 때부터 학자를 자주 접하게 하고, 환관이나 궁녀들과 어울려 노는 데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아울러 아버지인 현종의 행동거지가 원자에게 가장 큰 본보기라고 강조했다.
이로부터 23년 뒤, 원자에서 장년이 된 숙종은 스승이었던 김수항에게 사약을 내렸다. 다섯 살짜리 원자를 가르쳤던 김수항은 사약을 받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첩에 현혹되지 말라고 간곡히 말했건만, 궁첩 장 씨 때문에 김수항에게 사약을 내린 숙종은 23년 전 아버지 현종에게 올린 김수항의 차자를 기억하고 있었을까? 아니, 알고는 있었을까? 원자의 훈육을 간곡히 진언했던 김수항의 차자를 읽으며, 그 결과를 알고 있던 나는 공연히 가슴 한 켠에 안타까움이 자리했다. 무엇이 이들 사이의 인연을 이렇게 어지럽혔을까? 이런 어긋남이 조선 사회와 인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죽여야 합니다"
김수항은 귀양지에서 자신을 처벌하라는, 다시 말해 죽이라는 논의가 벌어지는 조정 상황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 무렵인 윤3월 20일, 장령 김방걸(金邦杰), 지평 심벌(沈橃)·정선명(鄭善明), 정언 김정태(金鼎台) 등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이 함께 숙종에게 계(啓)를 올려 김수항의 죄를 논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은 간사하고 표독하여 겉으로는 점잖은 체하지만 속에는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10년 동안 전조(銓曹 이조)를 맡고 있으면서 마음대로 위세를 부렸고, 8년 동안 정승(政丞)을 지내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였습니다. 족류(族類 집안)와 인친(姻親 혼인으로 맺은 친척)이 요소요소에 앉아 있어 권세가 치열하였고, 문생(門生)이나, 연고 있는 관리가 온 나라에 가득하여 당여(黨與)가 매우 성대하였습니다. (…)
윤휴(尹鑴)는 현사(賢士)입니다. 성상(聖上)께서 처음에 이미 참작해서 선처(善處)하여 그 죄가 유배에 그쳤는데, 대역(大逆)이라 무함하여 기필코 죽인 뒤에야 그만두었습니다. 오시수(吳始壽)는 대신(大臣)입니다. 전하께서 자전(慈殿)의 분부에 따라 그의 죽음을 용서하였는데, 상소를 올려 극력 논쟁함으로써 끝내는 사사(死賜)에 이르게 했습니다. (…)
이사명(李師命)의 음흉함은 온 나라 사람이 다 함께 증오하는데도, 그가 병권(兵權)의 자리를 극력 요구하자 우서(友婿 동서)라는 혐의도 피하지 않고 서전(西銓 병조판서)의 장관에 후보로 올렸으며, 이단하(李端夏)가 실성한 사람이라는 것은 진신(搢紳)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인데도 송시열(宋時烈)의 천거에 따라 공론(公論)을 무시하고 백료(百僚)의 우두머리에 올려놓았습니다. (…) 율(律)에 의하여 처치하소서.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김수항이 이조판서와 대신으로 오래 있으면서 권세를 부렸는데, 윤휴나 오시수 같은 명망 있는 사람은 무함하여 죽이는 한편, 동서인 이사명, 친구인 이단하 같은 사람은 자신의 당색이라고 하여 능력이나 인덕을 무시하고 등용하였다는 것이다.
홍문관 관원도 여기에 동조했다. 부제학(副提學) 유명견(柳命堅), 교리(校理) 이현조(李玄祚)가 차자(箚子)를 올려 김수항(金壽恒)의 죄를 따졌는데, 앞서 대간(臺諫)이 아뢴 것과 대략 같았다. 그리고 "대신(大臣)이 지은 죄가 사면(赦免)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더라도 죽이지 않는 방식으로 대우하는 것은 참으로 사람을 용납하는 덕(德)입니다. 그러나 이제 김수항은 결단코 죽여야 할 것이요,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는데 대신이라고 핑계하여 형장(刑章)을 가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당(唐)나라 때 이임보(李林甫)와 노기(盧杞)가 죽을 필요가 없었고, 송(宋)나라 때 한탁주(韓佗胄)와 가사도(賈似道)가 죽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 됩니다. 더구나 우리 조선의 김안로(金安老)와 윤원형(尹元衡)은 모두 대신으로서 끝내 사사(賜死)되었는데, 김수항의 죄는 김안로·윤원형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라며, 숙종의 결단을 촉구했다.(윤3월 22일)
이임보는 당나라 현종(玄宗) 때 음흉하기로 이름난 재상이고, 노기는 덕종(德宗) 때 국권을 전횡한 재상이었다. 한탁주는 송나라 영종(寧宗) 때 권력을 잡고 횡포를 부렸는데 결국 피살당했으며, 가사도는 이종(理宗) 때 그 권세가 일세를 흔들었으나 진의중(陳宜中) 등의 탄핵을 받고 귀양 갔다가 거기서 피살되었다.
유명견 등 홍문관 관원들은 아예 김수항을 김안로나 윤원형에 비유했다. 김안로는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중종14) 때 조광조(趙光祖) 등을 탄압하고 죽인 인물이고, 윤원형은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명종 때 권력을 남용하고 민생을 파탄시킨 인물이다. 김수항은 어찌 이리 탄핵받았을까? 그리고 어디까지 진실일까? 우리는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까? 우선, 가까운 사건부터 살펴보자. 이런 탄핵이 있기 전에 정권이 바뀌는 '환국(換局)'이 있었고, 그 바로 전에 숙종의 첫 아들이 탄생했다. 나중에 경종(景宗)이 되는 희빈(禧嬪) 장 씨 소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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