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참혹을 견디지 못해, 숙명적인 결여를 메우기 위해, 인간임을 그치기를 바라는 두 염원이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 이 논리는 형부와 처제의 비윤리적 관계를 변명해 주기도 하지만, 욕망의 기본 속성 또한 보여 준다.
그들이 꿈꿨던 근원 욕망은 '식물 되기'로 표상된다. 물론 현실에서 인간은 식물이 될 수 없다. 이는 결국 욕망의 원본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슬프게 확인시켜 준다.
신에게 귀의한 사람은 인간 세상에서 찾지 못한 근원적 사랑을 신에게서 구한다. 신이 완전한 사랑의 현신이라는 순결한 믿음은 하나의 역설을 품고 있다. 즉 그만큼 인간이 현실에서 완전한 사랑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우리는 지금 여기의 연인에게서 완전한 사랑을 구하지만 끝없는 환멸만을 반복해서 만날 뿐이다. 완전한 사랑이 불가능하기에 거꾸로 인간은 그에 대한 소망을 투사할 무엇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그래서 완전한 사랑을 구현하는 신을 만들어냈으며, 그 완전성을 독실하게 믿는다.
"끊임없는 사랑,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영역 너머, 아마도 죽은 이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대리언 리더 지음, 김종엽 옮김, 문학동네 펴냄), 92쪽) 그러니까 근원적인 욕망은 현실 저 너머를 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근원적인 욕망은 사람이라는 영역도 쉬이 뛰어넘는다. 영혜의 소망, 식물이 되고 싶은 소망은 근원적 욕망의 탈인간성을 보여준다. 꽃으로 칠갑을 하고 교합하는 남녀의 이미지에 강박된 형부의 욕망도 마찬가지다.
진짜 욕망은 현실 바깥에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꿈꾸는 것을 그만 둘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을 몽상과 백일몽 혹은 종교의 차원에 남겨두지만 예외적인 소수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 실현을 위해 몸살을 앓는다.
▲ <채식주의자>(한강 지음, 창비 펴냄). ⓒ창비 |
만일 그렇다면? 바로 현실에서 근원적 욕망을 실현한다고 한다면? 불가능한 것을 바로 지금 이곳에서 실현하려고 한다면?
어떤 이는 욕망과 현실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결여를 참을 수 없다. 결여를 0으로 만들기 위해 불가능한 것을 꿈꾼다. 현실적이지 않은 '센 것'을 바로 여기에서 구하려고 한다.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굳이 움켜쥐려고 한다. 이루어진 꿈에서도 충족하지 못한 여분의 욕망을 기어이 충족하려고 한다. 이때 여분의 욕망은 기괴하고 낯설고 추악한 것이기 쉽다.
가령 변태적 욕망이 그 사례이다. 현실에서 욕망의 충족 불가능성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만족을 구할 때 사람은 변태로 나아간다. 금지된 욕망도 그렇다. 일상에서 허기를 느끼는 이는 금지된 욕망을 추구함으로써 완전한 만족을 꿈꾼다.
또 상대를 지나치게 구속하는 연인의 경우도 비근한 사례가 된다. 어떤 연인은 사랑의 불완전함을 수긍하기 싫고, 완전함이라는 근원적 욕망을 고수하고 싶다. 이럴 때 근원적 욕망을 유지하는 방책으로서 연인을 지나치게 구속한다. 그가 구속에 응해 줄 때 완전한 사랑이라는 판타지는 가느다란 명맥을 이을 수 있다. 이때 구속은 결여를 메우는 방식이다.
결여를 결여로 남겨두지 않을 때, 결여를 기어이 메우고자 할 때 그 결여된 것, 여분의 욕망은 괴물처럼 되기 쉽다. 그러니까 적당히 포기되거나 비현실로 추방되지 않고 현실에서 꿈틀거리는 근원적 욕망의 모습은 기괴한, 낯선, 공포스러운 무정형의 에너지 덩어리이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참혹 그 자체. 참혹한 해골바가지.
사람들이 근원적인 욕망을 투사한 신은 자애로운 존재만은 아니다. 신의 이면에는 대체로 무서운, 섬뜩한, 복수심에 가득 찬, 분노하는 무엇이 있다. 지상에 내려온 신을 상상한 적이 있는가? 그것은 끔찍하고 처참한 무엇일 것이다. SF 영화에서는 인간 앞에 나타난 신을 종종 무시무시한, 이글거리는 불덩이로 표현한다.
작가 한강도 욕망의 이런 속성을 잘 알고 있다. 영혜의 언니 인혜는 생명을 버리려 숲을 찾는다. 이때 나무들의 물결을 본다.
그녀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의 물결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205쪽)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의 세계. 영혜는 그토록 나무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매혹되었던 나무의 실상은 이러했다.
인간임을 벗어던지고 달아나기를 꿈꿨던 곳은 따뜻한 위안의 말이 아닌 무자비하고 무서운 말들이 웅성거리는 세계였다. 무자비하고 무서운 생명이란 근원적 욕망의 본색과도 통한다. 처참하고 공포스럽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전하게 근원적 욕망 주위에는 가지 않는다. 그러나 경계를 넘은 예외적 존재들은 간혹 그것 가까이 가 본다. 영혜와 형부는 일상의 이면을 들여다 본 예외적 존재이다.
경제 법칙과 약육강식의 법칙, 통틀어 현실 원칙에 몸을 맞추지 못하는 연약한 이들의 예외성. 근원적 욕망을 감히 추구하는 이들의 표지이다. 이들은 저쪽에 가 본다. 강을 넘은 대가로 죽음을 지불하면서까지.
결과는? 공포뿐이다. 처제와 함께 알몸으로 뒹구는 남편의 모습을 발견한 아내는 그를 잘 관찰하였다. "그의 눈에 담긴 것은 욕정도 광기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후회나 원망도 아니었다. 바로 그 순간 그녀가 느낀 것과 똑같은 공포, 그것뿐이었다."(168쪽) 감히 신을 바로 본 자가 있다면 아마도 공포에 눈이 멀었을 것이다.
우리는 근원적 욕망의 대상을 만날 수 없거나 "혹 만날 수 있다면" "광기의 장 안에서만 가능"하다(<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대리언 리더 지음, 김종엽 옮김, 문학동네 펴냄), 171쪽) 그래서 인간임을 그치고 싶은 영혜와 형부는 광기의 장 안에서 만났다.
또한 "극단적인 황홀경의 관계는 아주 덧없이 끝난다."(<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대리언 리더 지음, 김종엽 옮김, 문학동네 펴냄), 171쪽) 그들의 극단적인 황홀경은 단 한 번으로 아주 덧없이 끝났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그들은 모든 것을 지불했다. 영혜는 정신병원에서 죽고 형부는 모든 것을 잃고 추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광기는 아주 먼 곳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인혜도 느낀다.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 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220쪽)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경계 근처에 있다. 언제 넘을지 모른다. 언제 현실의 참혹을 볼 지도 모르고, 언제 치명적인 결여를 더 이상 못 견딜지도 모르고, 언제 인간이기를 그치고 싶을지도 모르고, 불가능한 것을 꿈꾸며 저쪽 강안(江岸)으로 훌쩍, 떠나보고 싶을지 모른다.
우리는 경계의 안팎에서 불안하게,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존재이다. 어느 누구도 경계의 안쪽에서 안전하게, 영원히 살 수 있으리라 장담하지 말지어다.
근원적 욕망은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김훈의 어법을 빌자면, 사랑은 가 닿을 수 없는 채로 남아 있어야 한다. 남김없이 결여를 충족하고자 하는 이들은 결국 참혹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을 건너야 한다면, 어쩌겠는가. 그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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