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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네 "인생의 SF"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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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네 "인생의 SF"가 될 것이다!

[親Book] 어슐러 르 귄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그들은 그 행성을 뉴타이티라고 불렀다. 얕고 넓은 바다와 바다 사이에 점점이 난 다섯 대륙. 나무, 나무, 끝없는 나무로 뒤덮인 다섯 대륙이 있는 어둠의 땅. 인간은 그 어둠을 몰아내러 왔다. 목재는 귀했다. 나무에서만 얻을 수 있으니까. 이곳 뉴타이티에는 지구에서는 귀하디 귀한 나무가 많고 많았다. 이 숲이 귀한 나무 판자가 될 즈음이면 숲은 농토가 되고 인간 농부들이 이곳에 씨를 뿌릴 터였다. 마치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그래, 이곳은 인간을 위한 땅이었다.

겨우 200명의 인간이 벌써 거대한 황무지를 일구고 12킬로미터에 달하는 나무를 베어냈다. 몸집이 작고 순종적인 원주민 '크리치'들을 부려 그럴싸한 건물을 세우고 기계도 놓았다. 한때는 숲이었던 곳에 남은 그루터기는 퀴퀴한 화학약품 냄새를 풍겼다. 승리의 냄새였다. 그리고 이 개척자들을 위한 여자, 신부와 창부들이 우주선에 실려 왔다.

여자들이 온 날, 스미스 기지의 데이비드슨은 길고 화끈한 오후를 보냈다. 데이비드슨은 자기 일을 잘 알았고, 그 일은 잘 풀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며 헬리콥터를 타고 돌아온 데이비드슨을 맞이한 것은 완전히 불타고 파괴된 기지였다. 기지의 인간도 기계도 모두 불에 타 사라졌다. 폐허 속에서 데이비드슨은 얼굴에 흉터가 있는 한 크리치 셀버를 마주한다.

셀버는 아내를 데이비드슨에게 잃었다. 데이비드슨은 아내를 강간한 뒤 살해했고, 셀버의 얼굴에 큰 상처를 남겼다. 데이비드슨 뿐만이 아니었다. 날아다니는 배를 타고 온 '거인'들은 수많은 '크리치'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이들은 노래를 할 줄 몰랐고, 이들 사이에는 여자가 없었고, 이들은 꿈꿀 줄 몰랐다. 세계 시간과 꿈 시간이 같은 줄을 몰랐다. 이 '유멘'들은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보아도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이 유멘들은 사람을 사냥하러 올 것이다. 유멘들은 여자를 데려오기 시작했으니 곧 번식할 테고, 지금은 사람이 많지만 유멘들이 번식하면 곧 더 많은 유멘들이 나타나 숲을 파괴할 것이다. 인간이 불에 타고 쫓겨나지 않으려면 유멘들을 몰아낼 수 밖에 없었다. 꿈은 죽음으로 물들었고, 꿈꾸는 자인 셀버의 이야기가 다섯 대륙 마흔 개의 섬으로 퍼져나갔다.

▲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어슐러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황금가지 펴냄). ⓒ황금가지
이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최준영 옮김, 황금가지 펴냄)은 어슐러 르 귄 '헤인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장편으로, 많은 독자들이 기다렸고, 여러 번역자들이 탐을 냈던 짧고 아름다운 과학소설로, 인류가 헤인과 접촉하고 동시 통신기인 '앤서블'을 받기 전에 저 거친 행성 개척에 나선 유멘들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현재 우리와 같은 인류의 문명이 지적이고 폭력을 모르는 원주민이 살고 있던 행성 애스시를 개간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차분히 따라간다. 지식과 경험은 어떤 것이든 불가역적이라는 당연한 앎에 숲을 빽빽이 메운 나무들 같은 무게를 부여한다.

셀버와 데이비드슨(또는 크리치와 유멘)의 이야기는 복잡하지 않다. '데이비드슨'이라는 이름부터 가슴의 털을 벅벅 긁는 행동까지 '정말 이게 다야?'싶을 정도로 얄팍하고 전형적인 악당, 숲에 살며 꿈을 꾸는 원주민과 헬리콥터와 기계를 앞세우고 공격하는 '문명화 된' 인간, 특별한 설명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는 클리셰적인 테라포밍 설정, 단번에 상황을 역전시키는 제3자가 등장하는 단순하고 명백한 우화이다. 그러나 이 단순함에는 힘이 있다. 어떤 문제는, 깨달음은, 변화는 복잡할 필요가 없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에서 르 귄은 초점을 인물에서 세계 그 자체로 옮기고, 개인의 진동이 훨씬 더 큰 단위의 시공간까지 확대되는 과정을 포착해내는 과학소설의 힘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과학소설은 세상에 대하여 말한다. 때로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해결을 넘어 계속되는 변화 그 자체에 대하여 말한다. 때로는 한 사람의 것도, 한 문명의 것도, 한 행성의 것도 아니기에 그저 그대로 끝없이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름다운 소설이다. 아름답고, 슬프고, 무겁고, 찬란한 소설이다. 중편 정도 길이라 금세 다 읽을 수 있는, 그렇지만 아마 독자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을, 누군가에게는 '내 인생의 과학소설'이 될 수 있는, 그런 책이다. 개인적인 사족을 붙이자면, 친북칼럼 마지막 글을 쓰기 전에 이 책이 조용히 나온 덕분에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으로 칼럼을 마감할 수 있어서 기쁘다. 이런 식으로 이 책에 나 나름의 의미를 덧붙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그런 책이다.

약 2년 동안 '프레시안 books'의 북 칼럼 코너 '親book'의 필자로 참여했던 SF 작가 정소연이 이 칼럼을 끝으로 코너에서 하차합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독자분들에게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2013년부터는 새로운 필자가 SF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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