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재룡 옮김, 민음사 펴냄)을 살펴보자. 테레자에 대한 동정에 굴복하여 프라하로 온 토마시는 바로 그날 밤 위에 통증을 느낀다. 너무나 절망했기 때문이다. 왜 절망했나. 내적 분열의 종결자 토마시는 테레자와의 사랑이 위대한 필연이 아니라 하찮은 우연들의 결집체임을 깨달았다.
떠나기 직전 토마시는 테레자와의 사랑이 "그래야만 한다!"는 명령을 수반하는 위대한 필연이라고 생각했으나, 재회한 바로 그날 밤 그는 그 사랑의 우연성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확고히 믿었던 그 사랑의 필연성이 오해였음을, 오해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버려야 했음을 알았으니 절망할 밖에.
7년 전 테레자가 살던 도시에 "우연히"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그곳에 가야 했던 병원의 과장이 "우연히" 좌골 신경통에 걸려 토마시가 대신 가야 했고, 그는 마을 다섯 개의 호텔 중 "우연히" 테레자가 일하던 호텔에 들었고, "우연히" 열차가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그는 술집으로 들어갔으며, 테레자가 "우연히" 당번이었고 "우연히" 토마시의 테이블을 담당했다.
여섯 개의 우연으로 만난 테레자. 안정이 보장된 취리히를 버리고 위험천만의 프라하로 돌아오기로 한 치명적인 결정은, 7년 전 외과 과장의 좌골 신경통이 낳은 우연한 사랑 때문에 이뤄진 것이었다.
토마시는 사랑의 우연성에 절망하지만, 모든 사랑은 그러하다. 사랑에서 우연을 뺀다면 무엇이 남을까. 사랑하고 싶을 때 우연히 그 자리에 상대가 있어서 사랑을 시작한다. 아니면 그의 눈빛을 우연히 오해해서 사랑을 싹틔운다.
가령 그는 단지 피곤해서 처연한 눈빛을 지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자신을 사랑해서 마음이 아픈 증거로 오해한다. 이런 우연한 오해로 그에게 가까이 지내보자고 이야기한다. 그 역시 가까이 지내보자는 그녀의 말을 사랑한다는 말로 오해하여 사랑에 빠진다.
그는 단지 외로웠고 연애를 필요로 했을 뿐인데, 때마침 우연히 그녀가 앞에 있었고 우연히 그의 눈빛을 오해해 주었기 때문에,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우연한 오해의 연속으로 사랑은 싹트고, 무르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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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
현실에서 엔지니어는 그녀의 영혼에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사랑이 이처럼 한 순간의 우연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정사 후 외로움에 떠는 여자에게 한 마디 따뜻한 말을 건네면 사랑이 탄생하고 그 한 마디가 없으면 사랑이 싹트지 않는다.
우연한 한 마디의 위력이 이러하다. 단 한 마디로 예기치 않았던 순식간에 사랑은 잉태되고, 단 한마디의 부재로 사랑은 사산된다.
그러나 토마시를 절망에 빠트렸던 사랑의 우연성을, 테레자는 운명으로 파악한다. 웨이트리스 테레자가 처음으로 만난 토마시에게 코냑을 가져다주려는 순간, 우연히 베토벤의 음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는 이전에 그녀가 신분 상승을 꿈꾸며 들었던 음악으로,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를 띤다.
그가 머무르는 방이 6호실이며 그녀가 살았던 프라하의 건물이 6번지였다는 우연의 일치, 그가 첫 데이트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던 노란 벤치가 바로 그녀가 전날 앉았던 벤치와 동일하다는 우연의 일치, 이들 우연은 테레자에게 운명을 의미한다.
우연을 운명으로 생각했으므로, 테레자는 집을 뛰쳐나와 토마시를 찾아갈 용기를 내었다.
"그녀의 사랑에 발동을 걸고, 끝나는 날까지 그녀에게 힘을 준 에너지의 원천은 아마도 이런 몇몇 우연들일 것이다." (91쪽)
쿤데라에 따르면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88쪽) 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이라는 상투어도 있다. 하필 그 자리에 그가 있었다는 우연은 사랑을 김빠지게도 만들지만 그 사랑이 운명임을 증빙하는 확고한 증좌이기도 하다.
우연이 토마시에게는 절망의 원천이 되었지만, 테레자에게는 운명을 지시하는 좌표가 된다. 쿤데라는 가장 가까운 연인 사이에서 '우연', 이 한 마디가 정반대의 의미를 띠는 교묘한 국면을 보여준다. 과연 아이러니의 대가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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