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후에 밥상 앞에 다시 돌아온 아이들은 제각각 닭과 병아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어떤 녀석은 어느 병아리가 제일 귀여웠다고 했고 다른 녀석은 어느 닭의 벼슬이 제일 멋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내 딸아이는 수탉이 몇 마리, 암탉이 몇 마리 그리고 노란색 병아리가 몇 마리, 이런 식으로 구체적인 숫자를 통해서 닭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딸아이는 지금도 숫자를 갖고 장난치면서 놀기를 좋아하고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 중에서도 수학을 제일 좋아한다. 수학 문제를 풀다가도 왜 그런 수학 기호가 나오게 되었는지, 처음 그런 도구를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지 늘 궁금해 한다. 내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그 때 그 때 답을 해주면서 언젠가 마땅한 책이 있으면 딸아이에게 '수학의 역사'에 관한 책을 한권 추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학 시절에 가끔씩 만나던 천문학 전공 중국인 학생이 있었다. 그는 다른 도시의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우리는 가끔씩 만나서 밥도 같이 먹고 맥주도 같이 마시곤 했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술이 들어가기만 하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중국에서 먼저 발견되었거나 발명되었다고 우기는 주사가 있었다. 그에겐 수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이미 중국에서 만들어져서 사용되었다고 하면서 그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었다. 음수도 중국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했었다. 물론 그의 주장에 따르면 다른 모든 것들도 중국 수학의 산물이었다.
호기심에 도서관에서 중국의 수학에 대한 책을 찾아서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가 말한 내용의 대부분은 과장된 것이었지만 맞는 말도 있었다. 중국의 수학은 생각보다 더 오래되었고 그 깊이와 활용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넓었다. 그렇게 단편적으로 중국 수학의 위대함에 대한 맛은 볼 수 있었지만 몇 권 안 되는 책 속에 서술된 중국 수학은 마치 생뚱맞은 부록이나 다른 먼 섬나라 이야기처럼 또는 외계 문명의 결과처럼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중국 수학을 수학의 역사 속에서 개연성 있게 서술한 책을 만나보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 <수학의 역사>(지즈강 지음, 권수철 옮김, 더숲 펴냄). ⓒ더숲 |
한동안 '조만간 읽어볼 책'으로 분류되어 내 책꽂이 한 쪽에 놓여있던 <수학의 역사>(지즈강 지음, 권수철 옮김, 더숲 펴냄)를 꺼내 들었다. 그럴 듯해 보였다. 우선 중국인이 쓴 수학의 역사에 관한 책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인 수학사 학자가 쓴 책이라면 중국의 수학을 수학의 역사 속에서 제대로 자리매김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했다. 분량이 많지 않고 글자 간격도 시원해서 잘 읽힐 것 같았다.
내용의 난이도도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았다. '수학을 잘하기 위해 먼저 읽어야 할'이라든지 '통합형 공부를 준비하기 위한 현명한 선택' 같은 책 표지의 수사학적 문구들은 여전히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딸아이에게 권할 만한 수준의 '수학의 역사'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기에는 충분한 미끼였다. 요약하자면, 수학의 역사 입문서로 적당해 보였다.
화장실 앞 책꽂이에 <수학의 역사>를 꽂아두고 오다가다 틈틈이 읽었다.
기대했던 것처럼 속도감 있게 잘 읽혔다. 책 속에 수록된 많은 사진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가 이 책 속에 지은이가 수집한 수많은 사진이 수록되었다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미지 자료를 통해서 수학이라는 추상적인 사고 체계가 어떻게 인류의 문명 속으로 삶 속으로 침투해 왔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국인 수학사 학자가 쓴 책답게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중국인 친구가 이야기 했던 것처럼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수학은 위대했다. 십진법을 사실상 처음 사용한 것도 중국인들이었다.
"현대의 십진법에 가장 근접한 위치기수법은 중국의 산대 계산법이다. 산대는 손가락 몇 배만한 길이의 작은 대나무 막대를 산관 위에 올려놓고 계산하는 방식이다. 남북조 시대의 <손자산경>에는 산대로 계산하는 구결이 기록되어 있다."
피타고라스 정리를 먼저 알아낸 것도 역시 중국인들이었다. 피타고라스 정리를 '구고의 정리'라고 불렀으며 이미 실생활에 사용하고 있었다. 상고가 고대 중국의 주공에게 답한 내용을 옮겨 적으면 이렇다.
"곡척을 접어 아랫변을 3, 직각인 세로변을 4가 되도록 하면 빗변은 5가 됩니다. 그리고 아랫변과 세로변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을 그립니다. 이미 그려진 빗변의 반대 방향으로 곡척을 사용하여 또 정사각형을 그립니다. 이 직각삼각형에 아래, 옆, 위에 각각 정사각형을 붙이면 큰 정사각형을 얻게 됩니다. 즉 길이가 3, 4, 5인 세 정사각형이지요. 두 삼각형의 넓이의 합은 25이고, 이는 큰 사각형의 넓이와 같습니다."
서양보다 1000년이나 앞서서 정확한 원주율을 계산해서 사용한 것도 중국인들이었다. 음수를 수학에 도입한 것도 중국 수학이 먼저였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런 단편적인 사실만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중국의 수학이 어떻게 현대 수학의 기원으로 자리매김하는지를 역사적 맥락과 다른 문명권과의 교류 과정을 추적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점이 이 책 <수학의 역사>를 특별하게 만드는 지점인 것 같다. 내 옛 중국 친구의 치기어린 중국 수학 자랑에 그치지 않고 과장하지 않는 진정성을 견지하면서 중국 수학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 수학은 위대했으며 다른 문명을 앞서 갔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다른 문명과의 교류를 통해서 중국 수학은 현대 수학의 기원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고는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아라비아를 거쳐서 서양 수학이 현대 수학의 역사가 된 후 그 수학이 다시 중국으로 들어왔다. 지은이는 이런 수학의 역사의 과정을 중국 수학의 고고한 품격을 지켜내면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수학의 역사>는 현대 수학의 쟁점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수학자들은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떻게 현안 문제들을 해결해 왔는지를 역사의 맥락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수학은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류의 자존심이고 문명 자체라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이 책 속에는 수학을 문명으로 만든 숱한 수학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수학자 다비드 힐베르트의 말 속에 그들의 자존감이 엿보인다.
"역사는 우리에게 과학 발전은 연속성을 갖는다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시대마다 새로운 문제가 제시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해결되기도 하고 또는 아무런 이익이 없기 때문에 잊히거나 새로운 문제로 대체되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가 미래 수학 지식 세계를 전망한다면, 과거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먼저 살펴보고 현재 과학에서 제시되었거나 앞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있는 문제부터 검토해봐야 합니다. 저는 세기가 교차되는 지금 이 순간이 점검의 최적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 위대한 시대의 종식은 우리에게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고 우리의 아이디어를 미지의 미래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길지 않은 지면 속에 너무 많은 이야기와 너무 많은 수학자들이 등장하면서 전체적으로 산만한 느낌이 드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한 사건에 대해서 그 맛을 느낄 여유도 없이 또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 책의 특성이자 한계일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수학의 역사를 물 흐르듯 따라가면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수학의 역사 입문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제한된 분량에 정보가 넘쳐서 내용을 놓쳤다고 할 수 있겠다.
<수학의 역사>가 살짝 살짝 보여주는 수학자들의 삶의 모습은 그 수학자를 더 알고 싶다는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페르마 대정리'로 유명한 피에르 페르마보다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유명한 쿠르트 괴델보다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라고 했던 힐베르트의 삶이 무척 궁금해졌다. 이 책에서 언급된 콘스탄스 리드가 지은 <현대 수학의 아버지 힐베르트>(이일해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를 찾아서 읽어볼 참이다.
표지에 나열한 수식어들은 역시 과장된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수학을 잘하기 위해 먼저 읽어야 할' 책이 아니라 오히려 수학을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이 책 속에서 자신의 마음에 와 닿는 수학자를 찾아보는 게임을 해보기에 적당한 책인 것 같다. 그러면서 수학에 더 이끌리게 해줄 것 같은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읽어야할 수학의 역사 입문서로 <수학의 역사>를 손꼽는데 주저하지는 않겠다. 이 정도 분량에 이 정도의 밀도로 수학의 역사를 균형감 있게 담아낸 책도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 딸아이에게는 아직은 이 책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이 아이가 미분 적분이 뭔지 알고 난 다음 그 기원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었을 때쯤 이 책을 읽어보라고 건네주고 싶다.
<수학의 역사>는 수학의 역사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첫 입문서로 선뜻 권하고 싶으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이 책을 읽는 사람은 그야말로 이 책을 읽을 수학적인 준비가 된 사람이었으면 하는 역설적인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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