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0월 12일
10월 10일 무역국장 최만희가 독직 혐의로 체포되었다.
"최만희 피검 수도청에-무역업자들의 부정 수출을 묵인한 탐관오리의 악질적 소행"
상무부 무역국장 최만희는 화려무역공사에다가 국내의 통제품으로 되어 있는 탄구스뎅광 을 국외에 수출하는 허가를 내어준다는 구실로 수차에 걸쳐서 약 1000만 원의 금액을 받은 사실이 요즈음 발각되어 작 10일 상오 9시 수회죄로 수도청에 피검되었다. (<동아일보> 1947년 10월 11일)
"무역계에 대철퇴-최만희 국장 애첩도 검거"
10일 무역국장 최만희의 체포를 계기로 흑막에 싸인 무역계 숙청의 용단을 내린 수도경찰청에서는 동일 하오 곧 이어서 최만희의 애첩 중의 한 사람인 명동2가 48의 요리점 취락 마담 황명희(34)를 검거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또 이날 무역국 자동차 운전수 홍사긍도 검거되어 문초를 받고 당일로 석방되었다 하는데 관계 각 방면에 걸친 수사에 따라 최만희를 중심한 조선 무역계의 암흑상은 불일내로 백일하에 폭로될 것으로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한편 최 씨는 전기 황명희 이외에도 첩을 네 명이나 두고 있다 하며 그의 발길 닿는 곳마다 죄상은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한다. (<경향신문> 1947년 10월 12일)
10여 일 후 경찰에서 검찰로 송청하는 단계에서는 사건의 실체가 더욱 크게 드러나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막대한 금품 압수-최 무역국장 금일 송청"
무역국장 최만희는 그 동안 수도청의 준렬한 취조를 받아오던 중 드디어 25일 송청될 것이라 한다. 수도청에서는 막대한 금품을 압수하였다 하며 취락 마담 황명희도 현금 70만 원을 얻어먹은 것이 확실하여 불일간 송청될 것이라 한다. 한편 이번 사건에 관련된 무역업자 상무부원에 대하여는 취조를 더 계속할 것이라고 한다. (<경향신문> 1947년 10월 25일)
그런데 두 달 후의 신문 기사 하나가 자료 정리 중 눈에 띈 것이 있었다. 12월 29일 언도 공판에서 수회죄는 무죄 처분을 받고 다른 죄목으로 가벼운 벌금형을 받은 것이다.
한동안 세인의 이목을 끌던 최만희 무역국장 사건 언도 공판은 29일 오전 11시부터 대법정에서 개정되어 지난번 이주신 검찰관이 징역 8개월을 구형한데 대하여 이천상 심판관으로 부터 금품 합하여 십여만 원을 수회하였다는 기소 사실에 대하여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로 처분하고 다만 적산 물법 소지 무기 불법 소지죄에 한하여 법령 33호 동 5호 위반으로 벌금 5000원을 언도하였다. 이로서 태산명동 서일필격인 동 사건은 벌금 정도로 간단히 종막을 고하였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7년 12월 30일)
검거와 송청 당시 신문에 보도된 혐의는 수도경찰청 발표를 받아쓴 것일 텐데, 수회 액을 1000만 원으로 보도한 <동아일보> 위 기사를 비롯해 200만 원 내지 400만 원으로 대개 보도되었다. 그런데 검찰 기소에서는 10여만 원 수회가 되었고, 법원에서는 그나마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어떻게 된 일일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크게 잘못된 일이 없는데 경찰이 무리한 수사를 한 것이 그 하나고, 실제로 큰 부정 행위가 있었는데 검찰과 법원에서 덮어줬다는 것이 다른 하나다. 당시의 신문 기사를 통해 사건의 진상에 더 접근할 여지는 없을까? 그동안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주로 활용해 왔는데, 한번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철저하게 이용해 볼 생각이 들었다.
"최만희"를 검색하니 171개 기사가 나오는데 최만희 축구 감독(광주FC) 관계가 대부분이다. 그중 틈틈이 무역국장 최만희 관계 기사가 들어 있는데, 생각 외로 재미있다. 전문 학교 졸업할 때 <동아일보> 1935년 2월 21일자의 인터뷰 기사부터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위해 이 기사부터 살펴보는 것도 괜찮겠다.
"금융계로 나갈 근실한 활동가 상과 최만희 군"
근실한 활동가로 보이는 상과 최만희 군은 원산이 출생지라 명사십리의 일광욕을 마음껏 즐긴 까닭인지 피부색은 흑갈색으로 건강미를 보이고 있다. 연령은 27세, 중학은 일본에서 마치었다 한다.
"중학을 어째 동경에서…"
기자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네 그때 동경으로 갈 때는 제딴으론 큰 포부가 있었지요. 그러나 모두가 공상이었든지 여의치 못하여 이런 쓰잘 데 없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며 지나친 겸손을 한다.
"어찌 보기에 세상 경험이 꽤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별것 있습니까마는 전문학교에 들어오기 전에는 시골 금융조합에서 몇 년 있었지요. 이때에 느낀 것입니다만 정말 조선의 농민은 전 인구의 8할이나 점령하고 있는데 그들의 생활방식이란 사회의 큰 문제일 것입니다. 1년 열두 달 피땀 흘려서 모은 것을 결국은 부채로 홀라당 해버리고 마침내는 초근목피의 생활을 하는 것도 목도했었습니다. 조선의 사회문제 중에 이들의 구제책이야말로 긴급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 대한 구제책도 강구하신 일도 있겠습니다그려."
"뭘요! 다만 조합에 있을 때 잠깐 생각한 것이 그들에게 자금조달의 유리한 기회를 주어서 다각적 산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것인데, 지금도 이것이 틀린 생각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군은 교문을 나서면서 금융조합의 이사로 취임할 것 같다니 이상과 같이 이 방면에 통감한 바가 있는 만큼 그의 가진바 포부와 수완이 기자로서는 지금부터 기대된다.
"졸업하시니 어떻습니까."
"그저 섭섭한 마음은 언제든지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앞으로 취직한다 해도 제게 가정적 책임은 별로 없으니 공부나 부지런히 할까 합니다."
그의 취미는 운동도 상당히 즐겨 한다 하며 그 외에 영문 소설도 사랑하여 시와 소설을 역(譯)해서 발표한 일도 있다 한다. 그리고 그는 남과 담화하는 것을 유일한 오락으로 여긴다 하니 기자와 대면해 가지고 그야말로 청산유수의 격으로 말을 계속하는 것만 보아도 군의 취미로 내세울 만하다.
일제 시대 중 최만희의 이름이 신문 기사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동아일보> 1939년 6월 21일자 "무역대회 금일 개막" 기사에서다. 6월 20일 열린 전선(全鮮)무역대회에서 28개 의안이 다뤄졌고, 대부분은 조선무역협회 등 기관의 제안이고 몇 개가 개인 제안이었는데 그중 두 개가 최만희의 제안이었다. 이런 의안들이었다.
20. 수출 견본품에 대한 보조금 하부의 건
21. 제3국에 무역 지도원 파견의 건
금융-무역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후에 "최만희"란 이름이 신문 기사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창씨개명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친일 인명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의 다른 이름을 쉽게 확인할 수 없어서 더 조사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만희의 판결 기사 중 흥미로운 점 하나를 보이는 것이 있다. 그가 5000원 벌금형을 받은 혐의가 "고리짝" 관계라는 것이다. 1947년 5월 9일자와 11일자 일기에 '고리짝 사건' 이야기를 했는데, 김규식이 이에 연루되었다는 일각의 주장으로 곤욕을 치렀던 일이다. 최만희가 김규식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서 장택상의 '표적 수사'에 걸린 것은 아닐지.
"수회 사실 증거 없어 최만희 씨 석방-적산 불법 처분만이 벌금형"
전 무역국장 최만희 씨에 대한 종결 심판은 작 29일 지방심리원에서 이주신 검찰관 입회 하에 이천상 심판관 주심으로 개정되었는데 이 심판관은 피고가 범한 사실 내용을 보면 수뢰에 대한 점은 하등의 증거가 없고 다만 일인의 고리짝 즉 적산을 불법 처분한 점만을 인정하여 벌금 5000원의 언도를 받고 석방되었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30일)
1947년 1월 13일, 16일자 일기에서 '정명채 사건' 이야기를 했다. 정명채는 상무국 상무과 의류계장이었다. 일개 계장이 배급품목 중 쇠가죽 하나를 갖고 613만 원, 146년 치 봉급에 해당되는 뇌물을 넉 달 동안에 챙겼다는 혐의였다. 과도한 권한 때문에 군정청 고위직에는 독직 혐의가 끊임없이 어른거렸고 실제 독직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0월 13일 군정청 직원들의 '생계 보장 요구 집단 탄원'을 유발해 낸 상무부 직원들에 대한 '특별 보너스'는 군정청의 이권 문제를 다른 차원에서 부각시킨 일이었다. 상무부 전 직원 300여 명에게 약 2년 치 봉급에 해당되는 가치의 물품을 나눠줬다는 데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상무부 직원들은 전례 없는 많은 배급품을 받았다는데 하는 것이 요즈음 서울에 있는 관공청 직원들의 인사말이요 심지어 항간의 화제꺼리가 되고 있는데 "우리도 생활에 쪼들려 살 수 없으니 방법을 고려해 주시오"하고 중앙청 직원들이 총궐기 태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면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 상무부 직원들이 받은 배급은 얼마나 되는가? 사지 11마반 포플린 6마 사텐 12마 면라사 12마 융 10마 지지미 10마 인조견 12마 벨벳 30마 시가로, 6만 원 내지 10만 원 정도의 배급을 간부로부터 급사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 되는 직원이 골고루 배급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불공평한 배급이 어디 있느냐? 하고 5일 상무부를 제외한 과도 정부 각 부처 후생 책임자들은 긴급히 회의를 열고 중앙청 직원들도 생활에 대한 보장을 군, 민 양 장관에 요청하기로 결의하고, 7일 정무회의에 상무부의 배급 실례를 들어 구두로 요청한 바 있었는데, 정무위원회에서는 그 대책위원으로 3부장을 선출하여 군정장관과 절충하기로 되었다한다. 한편 각 부처 직원들은 전부 서명날인으로 금명간 양 장관에게 생활보장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하리라는바 귀추가 자못 주목되고 있다. (<조선일보> 1947년 10월 12일)
군정청은 남조선 최고의 직장이었다. 하지만 치솟는 물가 앞에서는 '완벽'한 직장일 수가 없었다. 해방 직전 약 50억 원, 미군 진주 당시 85억 원이었던 통화량이 1947년 10월 무렵에는 190억 원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런데 군정청 직원 봉급은 1946년 말에 인상된 후 묶여 있었으니 생계비에 크게 미달하는 수준이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불만을 달래기 위해 형편 되는 대로 현물 배급을 시행했을 것이다.
상무부는 경제 관련 권한을 가진 부서였기 때문에 물자를 확보할 힘이 있었고, 그것을 간부들이 독식하지 않고 직원들에게 고루 나눠줬다는 것은 착한 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부서 직원들 꼭지가 돌 정도의 거액을 나눠줬다는 데는 이 배급에 '떡고물'의 성격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상무부는 직접적 이권이 수없이 많이 걸려 있는 부서였다. 독직 여부가 애매한 업무 처리가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곳이었다. 다른 부서의 고문이 자기 부서보다 상무부 직원들을 위해 배급물자를 제공했다는 것은 상무부의 호의적 업무처리를 바라는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헬믹 군정장관 대리가 10월 16일 기자단 정례회견에서 상무부 부정 배급이 "상무부장 고문이 한 것이 아니고 모국의 국장 고문이 동료를 돕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배급한 것"이라고 했다.) 이 배급을 누가 어떤 동기로 벌인 것인가에 앞서, 당시 군정청이 어떤 분위기로 돌아가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마음속에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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