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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지상 건설…기독교 아닌 인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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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지상 건설…기독교 아닌 인류의 꿈!

[철학자의 서재] 손규태의 <하나님 나라와 공공성>(대한기독교서회 펴냄)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 기획한 철학자들의 서평 연재입니다. 지난 3년간 총 154편의 글이 연재되었고, <철학자의 서재>(알렙 펴냄) 두 권으로 묶였습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 두 차례의 선거를 앞두고 올해는 '정치'를 화두로 서평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보여주는 정치철학적 사색이 계속해서 독자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편집자>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에 대한 평가는 심란하다. 장로 대통령을 배출한 교회의 목회자 폭행 사건, 금권 선거로 타락한 교권 수장 선거, "일본 대지진은 하나님을 멀리한 탓"이라는 발언과 같은 잇따른 '설화' 등으로 교회의 신뢰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예전에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했다면, 요즘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말이 현실화된 것 같다.

그 결과 언론에는 거의 매일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기사가 넘치고 있다. 한국교회언론회가 2010년 상반기 중앙 일간지의 종교 관련 보도 내용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전체 종교에서 기독교는 25퍼센트인데 그 기사 중, 긍정 보도는 4.4퍼센트, 사실보도는 32.7퍼센트인데 비해, 부정적인 보도를 하고 있는 비율은 62.9퍼센트이다. 이러한 분석은 내가 소속된 교단의 워크숍(2011년 9월 19일)에서 들은 강의록의 일부이다.

믿었던 <조선일보>마저 등을 돌린 한국 기독교

발제문을 참고하면, 2011년 전반기 동안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보도를 한 언론은 <한겨레>(20.41퍼센트)가 가장 높고, 다음으로 <한국일보>(8.63퍼센트), <경향신문>(7.25퍼센트), <문화일보>(5.37퍼센트)의 순이고, <조선일보>와 <한국경제>는 부정적 보도를 자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2011년에 와서 <한겨레>는 기독교 기사의 100퍼센트가 부정적이고, <한국일보>는 77퍼센트, <한국경제>가 69.2퍼센트이며 <문화일보>, <조선일보>, <매일경제>도 50퍼센트 이상이 부정적인 기사를 내보냈다며 "<조선일보>여 너마저도"라는 소제목을 달아 놓았다.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언론의 반응이 싸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인지는 몰랐고 뭔가 근본적인 변화가 없으면 안 될 것이라 생각했다.

강사의 발제문은 계속해서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았다. '1000만'이라는 숫자를 믿고 기독교 정당을 창당하려는 움직임을 비판했고, 기독교 내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갈등과 정치 세력화를 우려하면서 비판했다. 시청 앞 기도회와 같은 보수 교회의 정치 참여를 "남이 하면 불륜, 내가 로맨스"냐며 비꼬았으며, 종교 개혁 이전보다 더 심한 교회 권력화 현상을 묘사했다.

그 결과가 안티 기독교의 양산으로 나타났고, 교회 내 권력 다툼을 교회법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사회법에 의존하는, 자정 능력을 상실한 집단으로 통탄했다. 강의를 계속 듣고 있으면서 나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저렇게 비판만 하고 있을 건가?" 통계에 기초한 현실 기독교 비판에 강의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강사와 자극적인 내용이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비관과 비판을 넘어서는 희망의 출발점을 찾아

나는 비판은 쉽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 기독교의 몇몇 교회와 목회자 같이 말도 안 되는 경우를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많이 했고 위험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교회를 비판해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한번 생각해 보라. 무릇 어떤 비판 행위가 외부로부터 아무런 저항과 억압이 없다면, 그 비판의 대상과 방법 그리고 실천의 깊이를 자문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강사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의에서 희망을 주는 이론적 출발점을 얻지 못했다.

이런 우울한 감정을 갖고 있던 차에 손규태의 <하나님 나라와 공공성>(대한기독교서회 펴냄)을 보게 되었다. 그 동안 대학에서 기독교 사회윤리를 주로 강의해 온 저자가 은퇴 이후 쓴 역작이다. 이 책을 읽고 나자 그동안 흩어져 있는 지식들이 모아졌고, 막연했던 것들이 분명해졌다. 나는 비판을 넘어 노력해야 할 돌파구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는 희망을 찾기 시작했다.

성서의 핵심 : 하나님 나라

▲ <하나님 나라와 공공성>(손규태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대한기독교서회
혹자는 신학 책 같은데 정치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의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선 책 제목을 설명해야 하겠다.

'하나님 나라'라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내세에 죽어서 가는 천국을 상상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과 생각이 현실 세계에서 실현되는 나라를 말하지 어떤 공간적 개념이 아니다. 예수가 직접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었다는 '주의 기도'에도 이런 대목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 기도문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는 하늘과 땅이 (공간적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과 땅은 (시간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하느님의 뜻은 천지(天地) 어디서나 이루어야져야 할 유토피아적 미래형이고,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저자 손규태가 <하나님 나라와 공공성>이라 한 것은 성서의 가르침 특히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 주제가 '하나님 나라'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의 핵심 내용인 하나님 나라를 이 지상에 건설하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 실천 과제라는 것을 전제로 이 책을 쓰고 있다." (157쪽)

그는 하나님 나라를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꿈이고 희망으로 본다. 그래서 지상에서 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은 특정의 종교적 집단, 즉 그리스도교 교회만이 추구하고 실현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모든 인류가 공동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로 설정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하느님 나라는 종교인과 비종교인,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함께 살고 있는 공공의 장소, 곧 정치로 구현되는 생활 세계의 공공성 개념과 만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보편적 세계 통치의 내용이고 목표이며, 전체 인류들에게는 보편적이고, 공공적 성격을 띠는 개념"(158쪽)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원리 : 공공성

공공성이란 개념은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 이후 계몽주의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정치적 개념이다. 사전적으로는 1) 누구나 듣거나 불 수 있는 것, 2) 개인이 아니라 많은 사람 혹은 전체 대중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3) 국가나 공공기관들의 사안들이다.

그런데 공공성이 오늘날 개인주의적인 우리 사회에서는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 개념이다 보니,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공공성 개념의 원래적 위치를 부여하기 위해, 독일 철학자 칸트와 하버마스의 이론을 빌려온다.

"다른 사람들의 공적 권리들과 관련된 행위들에서 공공성과 합치되지 않는 것들의 원리는 부당하다."

칸트가 <영구 평화 이론>에서 한 말인데, 이는 개인들이 공적 권리가 있다 해도 공공성에 위배되지 않아야 하며, 진정한 정치 행위란 공적 권리의 이념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법률이나 제도, 정치적 행위들이 공공성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은밀하게 사적 목적을 추구하면 공동체의 평화는 깨어지고 갈등이 야기될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사람들 사이의 평화인 것처럼 공공성의 원리도 인간들 사이의 평화임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교 사회 윤리의 목표인 평화를 이 하나님 나라와 공공성의 원리를 통해 해명"(12쪽)하려 한다.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는가?

이처럼 하나님 나라와 사회적 공공성이 만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문제시된다. 흔히 종교가 가진 정치 참여적인 성격을 거세하고자 할 때, 기득권층이 내세우는 논리가 '정교 분리'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저자는 루터의 두 왕국 이론과 칼뱅의 왕권 통치 개념을 통해, 두 위대한 신학자의 원래 의도와 달리 왜곡된 지점을 지적한다. 루터가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나라로 두 왕국을 구분한 것은, 당시 교황이 세상의 나라까지 통치하면서 타락한 시대 현실에 대한 잠정적인 저항 논리였다는 점이다.

루터가 두 왕국을 주장한 것은 중세기 가톨릭교회처럼 세상적 왕국이나 영적 왕국이 종합되거나 혼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직자와 세상의 통치자는 서로의 직무에 국한하여 서로 침범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루터는 두 왕국들 혹은 두 직무들 사이에 '구별(Distinction)'이 존재해야 한다고 판단했지, 그것들이 서로 '분리(Separation)'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루터의 두 왕국 이론에서 '정교 분리'의 근거를 찾는 것은 잘못된 이해라고 본다. 이원론적 '분리'가 아니라 제한적인 '구별'을 통해 서로가 연대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정교 분리'를 마치 상식처럼 말하고 있는 우리나라 기독교도와 일반인들이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성서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저자는 공공성을 성서적 관점에서도 분석한다. 그는 구약성서의 하느님을 네 가지, 창조주 하느님, 해방의 하느님, 정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구분하면서, 각각을 창조 세계의 공공성 개념과 연관시킨다. 성서를 아는 독자들이 이 대목을 읽게 되면, 아주 대담하고 명쾌한 단순성에 놀라게 되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주인이라는 데 주목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피조된 세상 모두(인간, 동물, 식물)를 사랑하고 계시며, 세상은 모든 만물이 살아갈 수 있는 보편적이고 공적인 영역으로 전제된다. 그리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려라"는 창세기의 말도 데카르트적 인간 중심주의적 방식에서 온 오역으로 생각하고, "땅을 경작하고 생물들을 돌보라"는 식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나아가 창조된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의 창조된 공적 영역은 특정 인간들의 사적 영역으로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혹시 이 대목에서 창조설이냐, 진화설이냐의 해묵은 논쟁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논쟁은 차이와 분열만 거듭할 뿐, 이 세상의 평화와 같은 공적 문제를 다루는 데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진화론자와 창조론자가 입장은 달라도 공공성이라는 유토피아적 정치철학적 주제에서는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이런 점이 이 책이 주는 장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손규태는 창조된 세상에서 권력의 남용으로 피해 받는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을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자 '구원'으로 본다. 출애굽기를, 이집트에 속박된 이스라엘 민족이 공공성을 훼손당했다는 차원해서 해석하는 것이다. 또 구약성서의 율법에서 공공성 사상이 잘 드러난 사례로 '사회법' 혹은 '약자 보호법'을 든다. 구약의 율법은 예배와 관련된 제사법, 거룩해지기 위한 정결법, 그리고 사회법이 있는데, 그 중에서 사회법을 가장 우선시했다고 보는 것은 보수적인 기독교와 매우 거리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저자의 독특한 주장이 아니고, 복잡한 제사법이나 위선적인 정결법보다, 이웃과의 관계를 말하는 사회법을 우선했던 성서의 내용을 정확히 한 것이다. 예수도 성서에서 예배를 드리기 전에 형제와 화해하고 오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제사법보다 사회법을 우선한 사례이다.

사회로 나가야 할 사회 윤리학

내가 보기에 저자가 하나님 나라를 공공성이라는 개념과 연관하여 그리스도교 사회 윤리학을 전개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 현실이 하나님 나라와 너무 멀고 또 공공성 또한 너무 희박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 같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리스도교 사회 윤리'라는 학과목이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도 소수의 학교에서만 가르쳐지고 있는 현실이다. 교회 현실의 문제는 바로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윤리와 책임이 부재해서 생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제대로 강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이 책에서도 강조되듯 우리나라 교회와 사회가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 문제에서 실현해야 할 과제로 보지 않고, 내세적인 문제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죽어 천국에 가는 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서의 믿는 신앙 행위는 천국에 가기 위한 보상 심리가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심리 속에 '하나님 나라와 공공성'과 같은 사회 윤리학적 주제는 들어가기가 어렵고, 있다 해도 신자유주의적 세계 자본주의가 양산한 구조적 문제들을 동정의 차원에서 돕는 것 정도로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나님 나라와 사회적 유토피아

공공성에 위배되는 구조는 해체되어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이론은 좋은데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어?"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현실론자들은 늘 타협하고 그때그때의 갈증과 허기를 달래면서 본질적인 문제는 넘어가기 때문이다.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넘긴 에사오처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생각하는 인간들은 유토피아를 헛된 꿈이라고 생각하고 목표해야 할 꿈으로 꿈꾸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서, 이 유토피아를 하나님 나라와 유비시킨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그리스도교적 윤리의 실천적 목표 개념으로 상정할 때 제기되는 문제에는 그리스도교적 종말론과 인문주의적 유토피아 사이의 관계를 살핀다.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새로운 나라이고 우리가 함께 실현해야 할 무엇이라면, 유토피아는 인간들이 본성으로 갖고 있는 "미래를 향한 인간들의 꿈"이고 "부정적인 것의 부정"이기 때문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 신학은 하나님 나라를 오직 하나님의 영역,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사건으로만 이해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창조주로 이해하고 인간을 그의 협력자로 이해하는 신학자들은 인문주의적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노력을 무시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Adventus) 유토피아는 인간들이 미래를 향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미래의 꿈의 나라(Futrum)라고 할 수 있다"(178쪽)고 말하면서, 그 꿈의 실현 장소가 바로 공공성임을 끝까지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지향하는 사회적 공공성의 실천을 위해서는 사회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같은 꿈을 가지고 있는 다른 종교인들과의 협력도 필요함을 역설한다. "교리는 분열시키지만, 봉사는 하나 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손규태가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말했다고 본다. 이 책은 서구 신학의 영향 아래 쓴 것이지만, 한국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국의 교회에는 '사회 윤리적 문제'는 많이 일으키면서도 정작 그 문제를 깊이 반성하거나 고치려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현실의 교회가 너무 현실화되어 있어서, 그는 여전히 '비현실적 아웃사이더'로 취급되는 것 같다.

나는 그가 아웃사이더로 버려지는 것 같은 이 느낌을 씁쓸해 해야 하는가? 아니면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를 발견한 기쁨으로 여겨야 하는가? 독자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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