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제네바 공화국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18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철학자이자 문필가인 장자크 루소는 1712년에 태어나 1778년에 죽었습니다. 2012년은 그의 탄생 300주년에 해당합니다. 이를 기념해서 한국어판 '루소 전집'(책세상 펴냄)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일본판을 재번역한 루소의 책들이 통용되었고 그것도 <고백>(보통 <고백록>으로 번역했지요)과 <사회계약론> 등 일부의 책에 한정되었습니다. 한국어판 '루소 전집'은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가 1959년에 펴낸 '루소 전집(Jean-Jacques Rousseau. Oeuvrea complètes)''을 토대로 5년여의 준비 기간을 가지고 루소의 저작을 자서전, 소설, 정치·사회, 교육·철학, 언어·예술 다섯 영역으로 나눠 루소 사상의 전모를 소개합니다.
역자가 생각하는 번역본의 의미와 가치
▲ <루소, 장자크를 심판하다-대화>(장자크 루소 지음, 진인혜 옮김, 책세상 펴냄). ⓒ책세상 |
이 책의 역자 전인혜는 역자 해설의 제목을 '세상의 오해에 맞선 한 사상사가의 내면의 대화'라고 붙이고,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고백>이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과 마찬가지로 이 책 또한 루소의 사상에 접근하기 위한 저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만 주로 다뤄졌음을 환기시킵니다.
특히 이 책은 루소의 저작 중에서 가장 안 읽히고 연구되지 않은 저작이며, 루소가 말년에 시달린 정신 이상을 극대화한 작품으로만 관심을 받았습니다. 물론 역자가 재차 강조하듯이, 국내에서는 이 책이 아예 번역 소개되지 않아서 일반 독자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요. 그러나 최근 프랑스에서는 이 책이 루소의 사상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 재평가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이 루소의 전 생애와 더불어 그의 주요 저작의 의미를 스스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역자는 한국 독자들이 루소의 삶과 사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이 책이 귀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니체의 자서전적인 작품 <이 사람을 보라>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루소는 자서전 삼부작을 왜 썼을까?
전에 리오 담로시의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평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었습니다. (☞관련 기사 : 루소의 경고 "넌 언제나 노예로 전락할 수 있어!")
"고결한 천재, 성자와 같은 인물, 프랑스 대혁명의 아버지"/"불안한 정신병자, 비열한 인격의 소유자, 파시즘의 선조" 등의 평가는 그의 심리적인 내적 갈등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 내적 갈등은 단순히 그의 성격상의 결함이 아니라 그가 추구한 이상적인 자기(자유인)와 그가 처한 삶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이 조건(불평등과 억압)과의 괴리에서 오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고 말한 루소는 왜 자서전을 썼을까?
루소는 과연 대철학자 칸트가 흠모할 정도로 도덕적인 인물인가요? 아니면 대중들의 증오를 자아내는 추악하고 비열한 괴물인가요? 아니면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증폭된 불안과 강박관념에서 기인한 망상으로 시달리는 환자인가요? 그런데 루소는 왜 말년에 자전적인 글 삼부작, 회상록 형태의 <고백>(1764~1770년), 플라톤 대화편 형태의 <루소, 장자크를 심판하다>(1772~1776년), 내적 일기 형태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1776년~1778년, 죽음으로 미완성)을 쓴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루소 자신의 대답을 우리는 <루소, 장자크를 심판하다>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고백록>이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 독백의 형태를 취한 반면에 <루소, 장자크를 심판하다>는 대화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플라톤의 대화편을 연상시킵니다. 대화란 문답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변증법입니다. 이 대화를 추진하는 힘은 루소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와 대중이 오해하는 이미지 사이의 모순입니다.
음해 세력이 이러한 오해를 조장하는 데 자신의 <고백>이 악용되었다는 문제의식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당신이 신사 분들의 회고록이라고 불리는 <고백>을 통해 그들에게 덜미를 잡히는 계기를 제공했고, 그들은 그것을 결코 놓치지 않았어요. (…) 그들은 그의 결점을 악덕으로, 그의 잘못을 죄악으로, 그의 젊은 날의 나약함을 성숙한 나이의 비열함으로 왜곡했습니다."
<고백>이 루소가 주로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망명과 도피의 생활 중에 쓴 책인 반면에, <루소, 장자크를 심판하다>는 다시 1770년 58세 때 파리로 돌아온 뒤에 쓴 책입니다.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는 것은 루소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38세에 훗날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친구 디드로(나중에 루소는 디드로를 자신을 음해하는 음모의 주동자이자 배신자라 여깁니다)를 만나러 뱅센 감옥으로 가다가 깨달음을 얻고 40세에 <학문예술론>이라는 주옥같은 작품을 쓰게 됩니다. 43세에 <인간 불평등 기원론>를 출간하고 대도시인 파리를 떠나 시골로 이주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이를 나중에 <에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럼 파리여, 잘 있어라. 유명한 도시, 소음과 매연과 진창의 도시여. 여기에서는 여성들이 더는 명예를 믿지 않고 남성들은 더는 미덕을 믿지 않는다. 파리여, 잘 있어라. 우리는 사랑을, 행복을, 순결함을 찾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너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편집적인 망상이 극에 도달했을 때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루소는 "괴물로 여겨질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왜곡된 것을 보면서" <고백>을 통해서 "용기를 내어 모든 것을 말하고 종종 지나치게 엄격하고 공정한 태도로 자기 자신을 다루었다"고 합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영혼의 내면을 완전히 드러내고"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 아주 솔직하고 간단하고 자연스러운 설명을 하면, 그 설명이 자신의 증언이 되어, 자기 고백이 진실한 것이고 근원도 밝혀지지 않은 채 널리 퍼져 있는 자신에 대한 끔찍하고 말도 생각들이" 제거될 것이라고 여겼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희망과는 반대로 <고백>은 자신의 괴물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는 데 악용되고 그의 편집증적 증세는 심해집니다.
이러한 상황을 정면으로 맞서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 상징적으로는 예전에 혐오했던 파리로의 귀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을 글로 표현한 것이 <루소, 장자크를 심판하다>입니다. 이러한 투쟁이 평화로움으로 상승하여 장자의 말대로 소요하며 노니는 참다운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 작품이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입니다.
이 몽상은 망상이나 헛된 공상이 아니라 무위자연(無爲自然)하는 사람이 행하는 삶의 기술이며 '실존의 미학'(푸코)입니다. 루소 자신은 일생을 노동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며 악보 베끼는 일을 꾸준히 감당해온 사람이기에 이 몽상이야말로 해방된 노동입니다. 해방된 노동은 노동이기를 그치고 놀이가 됩니다. 리오 담로시의 말대로 몽상은 "해방감을 주는 기술"입니다.
루소의 자서전 삼부작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처럼 일종의 정신의 발전 단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백, 대화, 몽상은 1. 용기를 가지고 솔직히 진리를 드러내려는 자기 고통의 단계, 2. 드러난 진리가 끊임없이 은폐되고 왜곡되는 상황에 대한 자기 투쟁의 변증법적 단계, 3. 진리의 드러남 속에서 해방된 자유인의 소요유의 단계에 각각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화>라는 자기 투쟁적 변증법을 통한 트라우마의 치유
이 책은 역자의 말대로, 루소의 주요 작품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잘 안 읽히고 정신병의 증거라고 치부되었습니다. 루소 자신도 이 책이 가장 내키지 않은 책이고 가장 지루해하며 쓴 글이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루소, 장자크를 심판하다>는 도리어 루소 자신의 삶과 사상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긴요한 통찰을 보여줍니다. 루소는 파리에 도착하면서 자신의 불행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그 문제에 대해 다시 펜을 들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러한 침묵의 휴식도 박해자들의 괴롭힘과 대중의 몰이해로 인해 중단되고 그의 인내심도 한계에 이르러 "본의 아니게 다시 한 번 자신의 운명과 박해자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들과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을 대화의 형태로" 쓸 수밖에 없었다고 그 스스로가 밝힙니다.
이처럼 이 책은 루소 자신의 트라우마(정신적인 외상)를 치유하기 위한 투쟁적 기록입니다. 동시에 현대 대중 사회의 여론 조작을 예견하면서 진리가 대중 사회에서 어떤 운명을 처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진리의 정치경제학"(푸코)이기도 합니다. 이 책이 처한 지금까지의 운명이 현대 사회에서 진리가 처한 운명의 환유에 해당합니다.
루소는 이런 진리의 운명과 대중의 무분별한 여론에 저항하려면 "개인적인 이해관계와 하찮은 현세의 정념(뜨거운 감정)이라는 좁은 감옥에서 벗어나 상상력의 날개를 타고 대기 너머로 올라가는 사람, 우연과 운명에 맞서 싸우는 힘과 능력을 고갈시키지 않고 지극히 순수한 지역으로 돌진해 선회하며 고상한 명상에 의해 떠 있을 줄 아는 사람"을 요청했습니다.
상상력의 날개를 타기 위해서는 활동적인 마음과 게으른 천성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몽상이 아무리 달콤해도 쉬이 피로해지므로 휴식 또한 필요합니다. 외부 사물에 오직 감각만 내맡기고 머리는 쉬게 하면 휴식이 찾아옵니다. 그가 고상한 집필에만 몰두하지 않고 악보 베끼는 일을 하고 식물 채집을 한 것도 이러한 휴식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악보 베끼는 행동을, 고의적인 궁핍을 가장하여 미덕의 화신을 자처하는 위선적인 행위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여론에 대해 루소 자신이 다음과 묻습니다. "왜 책은 쓰지 않고 악보 베끼는 일을 하느냐고요. 책을 쓰면 돈도 더 많이 벌고, 품위가 떨어지지도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루소는 이에 대답하기를, 생각하는 작업은 아주 고통스럽고 피곤하고 즐겁지 않은 일인데 이를 먹고살기 위해 한다는 것은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우스꽝스럽다고.
"나는 내 손의 노동은 팔아도, 내 영혼의 산물은 팔지 않습니다. 영혼의 산물을 강하고 고귀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무사무욕입니다. 돈을 위해 영혼의 산물을 만든다면, 그것은 아무 가치도 없고 내게 가져다주는 것도 훨씬 더 적을 겁니다."
루소에게 글이란 요즘 유행하는 것처럼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고양시키는 숭고한 용기에 고무되어 쓰는 것입니다. 루소는 대중적인 여론 조작의 극치를 다음과 같이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벌이를 경멸합니다. 돈 받고 하는 일로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으며 탐욕스럽고 하찮은 일을 경멸하는 저명한 디드로는 전 유럽이 보기에 덕성스럽고 욕심 없는 현자지요. 그리고 먹고사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페이지당 10수를 받으며 베끼는 일을 하는 장자크는 탐욕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경멸받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운명은 가혹하긴 하지만, 모든 것을 제자리에 정돈해놓은 것 같습니다. 유대인 장자크의 탐욕이 그를 아주 부자로 만들어주지도 않았고, 철학자 디드로의 무사무욕이 그를 가난하게 만들지도 않았거든요."
루소가 글을 쓰는 이유
루소는 자신이 "되풀이해서 책을 만드는 공장"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그는 새롭고 필요한 것, 중요한 것을 말하기 위해서 펜을 든다고 말합니다.
"먹고살기 위해 책을 쓴다면, 나는 독자에게 종속될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교훈을 주고 바르게 고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독자의 마음에 들고 성공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요."
고객이 왕인 소비자 중심의 대중 사회에 이렇게 루소는 경고를 날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학설은 자신들을 감정을 편안하게 해주고 변칙적인 그들의 품행을 지혜라는 허울로 덮어주는 학설입니다. 여기에 영합하는 작가들도 위선적인 도덕으로 덕에 대한 사랑과 악에 대한 증오를 설교합니다. 이러한 그들의 책은 대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어낸 의미 없는 단어들에 불과합니다. 더욱 나쁜 것은 "행복한 사람들과 부자들에게 아첨하고 불행하고 가나한 사람들을 짓누르면서, 전자에서는 모든 구속과 두려움과 자제를 없애는 반면, 후자에게서는 모든 희망과 위안을 없애는 학설"입니다.
진리란 자유에 대한 용기를 통해 획득되는 것입니다. 선거의 계절, 미소 짓는 정치인들로부터 겉으로는 서민과 노동자의 희망과 위안을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자본과 권력에게서 모든 구속과 두려움과 자제를 없애는 말하는 위선들의 잔치를 듣습니다. 번듯한 강단의 학자들로부터 학문의 대중화라는 이름으로 이런 말들의 잔치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학설들을 듣습니다.
잘못을 눈물로 포장하고 고백을 아첨으로 활용하는 정치인들의 황당한 자서전과 자유로운 정신의 고양을 위해 모든 부자유의 억압을 끊기 위해 용기를 가지고 솔직하게 자신과 인간을 드러낸 진리 투쟁의 기록인 루소의 자서전을 비교해보면, 우리 시대가 루소가 망상으로 그려낸 현실이 진짜 현실이 되어버린 뒤틀린 시대임이 폭로됩니다.
어떻게 해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고아나 다름없이 버려진 채로 서른 살까지 정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마흔 살까지 뿌리 없이 살아가며 허드렛일을 하던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위대한 철학자이자 작가가 되었을까? 자유를 위해 왕이나 귀족의 후원을 거절하고 독자에 대한 아첨도 거부하고 일상적인 사교 활동도 거부하며 스스로 노동하며 고독한 삶을 선택한 진리와 양심의 기록자가 써 놓은 자기 투쟁적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 비밀을 풀 수 있습니다. <루소, 장자크를 심판하다>는 그 비밀을 푸는 열쇠입니다.
추신
다음에 인용된 루소의 글로 또 하나의 대중에 대한 아첨이 될 수 있는 이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는 책을 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중년이 되었고 중년을 보냈습니다. 그 치명적인 명성에 대한 욕구는 단 한 순간도 느끼지 않았어요. 그 명성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쓴맛밖에 보지 못했고 너무나 값비싼 대가를 치렀지요. 그에게는 소중한 환상이 모든 것을 대신했어요. 젊은 날의 열기 속에서 그의 생생한 상상력은 끊임없이 채워지는 매력적인 대상들로 가득 차고 압도되어, 그의 마음은 계속적인 도취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생각을 정리하거나 고정시킬 수 없었고, 그것을 글로 쓸 시간도 전달할 욕망도 없었지요. 그 커다란 충동이 진정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생각이 더 규칙적으로 느리게 진행될 때, 그때에야 비로소 그는 그것을 적을 수 있을 만큼 생각의 자취를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야 그가 펜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당시 같이 살던 문인들의 부추김을 받고 그들을 본보기로 하여, 오랫동안 혼자 품어왔던 생각, 인류에게 유익하다고 믿었던 생각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갑작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심지어 뜻밖의 방식으로,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그는 그 불길한 직업으로 뛰어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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