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아이들이 잘 빌리는 책을 권해줬다. 구병모의 <위저드 베이커리>(창비 펴냄)도 그 중 하나다. <완득이>(김려령 지음, 창비 펴냄)에 이어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을 받은 이 책은 꽤 인기가 많았다. 왜 이 책을 좋아하나 궁금했다.
그래서일까. 구병모의 책이 나올 때마다 눈여겨봤다. 비교적 출시가 빨랐다. <위저드 베이커리>, <아가미>(자음과모음 펴냄), <고의는 아니지만>(자음과모음 펴냄) 모두 독특한 상상력에 기댔다.
특히 끔찍한 현실과 잔혹한 상상이 주를 이뤘다. 현실이 끔찍하니까 상상도 끔찍한 것이리라. 누구나 은근한 파괴 욕구도 갖고 있다. 어둡고 음울한 기운에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아이들은 자극적이고 재밌고 독특한 것을 좋아한다. 이런 점에서 작가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 <방주로 오세요>(구병모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
사람들은 겨우 살아가고 만약을 대비해 우뚝 솟은 땅에 자원을 끌어 모아 방주시를 만든다. 거대한 돔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바람, 온도, 햇빛까지 철저히 통제된다. 온갖 부가 집중됐고 상류층만 산다. 중심엔 방주고등학교가 있다. 방주 시민이 되길 꿈꾸며 치열한 경쟁으로 지상 출신 아이들이 입학한다.
쌍둥이 남매 루비와 마노도 방주고에 입학한다. 하루는 학생회장 일락에게 불려 가는데 그는 루비를 볼모 삼아 마노를 협박한다. 방주고에는 독서 모임을 빙자한 지상 출신 아이들의 동아리가 있는데 실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을 테니 염탐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에 마노는 기숙사 회장 시온과 신비한 소녀 달리와 가까워진다. 그리고 예상보다 더 큰 비밀, 방주고를 폭파할 계획을 알게 된다. 이들은 도시 시스템의 구조를 진작 간파했다.
"그러니까 폐허에서 비정상적인 삶의 터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은 모두 마찬가지였는데, 지도층하고 고위층 인사들이 그 운명을 공유하는 대신 이 도시를 만든 거야. 폐허를 조금이라도 빨리 복구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무사히 살아가는 데 투입했어야 할 예산, 그 이상을 여기에 쏟아부어버렸지. 자기들만이 살아갈 땅에다가 (…) 그런데 높으신 분들만 살려니까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 자기들 삶을, 그러니까 도시 시스템을 유지시켜줄 따까리들이 필요해졌어. 베르사유에 자기 구두끈을 혼자 매는 귀족이 있었겠어? 어디나 하인은 필요한 법이잖아."
자신 같은 지상의 아이들이 상류층 하인 노릇을 위해 방주고에 허락됐다는 사실과 이 도시가 다수 평민을 무시하고 얼마나 불합리한 근거 위에 세워졌는지 알게 된 마노는 어떤 선택을 할까. 작가의 말을 보면 이 책은 미래가 아닌 현재를 암시하고 썼다고 밝힌다. 문제 제기와 알레고리는 중요하고 참신하다. 이제 그것을 얼마나 잘 구축하고 표현했는지가 관건이리라.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몇몇 점에서 아쉽고 우려마저 든다.
"머릿속으로 빙빙 돌려다가 어떻게 자기 생각을 좀 비싼 척 꾸며볼까 싶은 모양인데, 포장 까고 산뜻하게 요약해줄까? 한마디로 앞으로 커서 출세하고 싶잖아. 안 그래? 높은 자리에도 좀 앉아보고, 돈도 좀 만져보고, 그러다 보면 미녀를 얻고, 거기서 좀 더 잘 풀리면 부모님도 편하게 사시게 해주고 싶겠지. 너네 같은 인간들의 생각 패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을 거야. 어때? 결국 배 두드리면서 잘살자고 죽도록 공부해서 온 거 아냐. 솔직히 땅바닥에 찰싹 들러붙은 삼류 학교에 간대도 별 탈 없는 걸 가지고."
작가 특유의 개성을 꼽으라면 툭 까놓고 속물적인 인간의 마음을 날카로운 대사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점이다. 학생회장 일락이 마노를 얕보며 장황한 말을 늘어놓을 때 나는 잠시 멍했다. 굉장히 얄밉고 분하긴 한데 마노처럼 당장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또 원조 방주 출신들은 지상 출신들을 벌레 보듯이 철저히 비하하는데 당연히 여기는 듯한 태도가 불편하다. 게다가 악인이 100퍼센트 악하기만 하니까 어색하다. 실제로도 정말 그럴까 싶다. 그들의 고민이나 속내는 없다.
방주 출신 아이들이 구사하는 대사도 어색하다. 사람을 밀쳐놓고 사과는커녕 몸이 엉킨 사람들한테 '떡'이나 치면 되겠다고 비웃는다. 하긴, 나는 얼마 전 한 선생님이 들려준 얘기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자 반 아이들한테 주말에 뭐했느냐고 물어봤더니 환호하듯이 모텔에서 '떡' 쳤다고 대답했단다. 아무리 현실적인 일이라도 드물거니와 이렇게 자극적인 말이 나오는 책을 아이들한테 권장해주기엔 왠지 떨떠름하다.
지상의 아이들은 어떨까. 마노는 방주고 입학 설명회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소녀를 잊지 못한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손수건까지 고이 갖고 있을 정도다. 로맨시스트로 봐줄 수도 있지만, 왠지 요즘 아이 같지 않다. 마노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로 그려지나 실은 굉장히 답답하고 상투적이다. 의미 있는 주제의 의미 있는 주인공 같은데 고민의 깊이가 너무 얕다. 결국, 방주 시민인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동아리를 배신한다.
시온은 성품과 능력이 완벽한데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갑자기 몸을 던지고, 달리와 또 다른 동료 하상은 늘 화가 나 있는 것 같다. 제 상처가 깊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게 괜찮을 걸까. 또 급히 결말을 내려고 했는지 돌연 달리의 긴 독백으로 설명이 채워진다.
방주시를 이루는 성경 인용도 투박하고, 유별나게 불교 경전을 외우고 다니는 인물 두상은 폭파 계획에 금방 수긍이 갔는지 주저함 없이 가담한다. 이들은 몰래 폭탄을 들이고 직접 만들기도 하는데 폭파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는지도 한번 고민해 볼 문제다. 뭔가 생각도 있고, 능력도 있는 기특한 아이들인데 왠지 몸에 맞지 않는 어른 옷을 입은 듯한 인상이다.
"그만한 능력은 없어, 현실적으로. 하지만 능력이 없다고 해서 한자리에 주저앉아 불평만 하고 있기도 싫고."
"……. 어쩌면 나는 폭파 자체가 상징적인 의미를 갖지 않을까 싶기도 해. 학교 하나 날려버린다고 바뀌는 일이 없다는 걸 분명 알면서 하는 짓이거든."
이 책은 오래 묵혀둔 이야기를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 출판한 거라고 한다. 작가에 대해 기대치가 있는 사람들도 아쉬움을 표하는 것 같다. 그래도 현재 사회를 빗댄 알레고리는 녹슬지 않았다. 철저히 계급화하는 현실을 인식하는 아이들한테 너라면 도시를 폭파할 건지, 모른 척 할 건지 어떻게 하겠느냐며 중요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작가 스스로 이 소설의 의미를 '투척'이라고 했다. 달리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처럼 능력은 없을지라도 잘못된 사회를 보며 두 손 놓고 가만히 있는 것은 죄일 것이다.
청소년 문학의 가능성으로 주목받는 작가가 타이틀에 너무 얽매이지 않되, 본인의 장점과 개성을 살려 좀 더 긴밀하고 인물이 현실감 있는 소설을 그려주면 좋겠다. 그동안의 작품 세계를 봤을 때 분명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있고, 그들이 좋아하는 지점을 아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순진한 아이들만 나와 꿈과 환상이 가득한 세계만 보여주거나 거칠고 난폭한 아이들만 나와 폭력으로 해결하지 않아도 충분한 대안과 위안을 제시하는 작품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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