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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낳은 딸 vs '금속으로 만든 딸', 뭐가 진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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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낳은 딸 vs '금속으로 만든 딸', 뭐가 진짜야?!

[김용언의 '잠 도둑'] 게이비 우드의 <살아있는 인형>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이게 우리 회사의 모토지. - 영화 <블레이드 러너> 중에서

안드로이드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영화는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소설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러나 게이비 우드의 <살아있는 인형>(김정주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을 읽고 나면 그 상상의 폭은 더 넓어진다. 인공 생명에 대한 관심은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력을 얻었고, 18세기에 이르러 "마법사들의 야망이 과학이라는 존경받는 이름"으로 되살아나며 만개했다.

즉 과학이 마법과 주술과 전설과 신화를 대체하며 시작된 자동인형(Automaton)의 역사는, 한때는 불경하고 불유쾌한 장난으로 치부되었으나 그리스 신화의 다이달로스의 재래부터 에디슨의 '말하는 인형'과 수학자 앨런 튜링이 제안한 '튜링 검사'와 MIT 인공지능연구소까지 넘나들며 영광스런 부활을 거듭했다. <살아있는 인형>은 소설은 아니지만 그 안에 빼곡하게 제시된 픽션들의 예를 넘어서는 흥미로움으로 충만한 책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자동인형' 항목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동력을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는 기계', '살아있는 존재의 행동을 모방하는 사람 모습의 형상', '판에 박힌 일을 단조롭게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인간'.

맨 앞 구절이 기본적인 정의라면 뒤의 구절들은 자동인형이 내포한 정반대의 질문들을 드러낸다. 자동인형은 단지 인간과 닮기만 한 존재인가, 혹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뛰어넘는 존재인가. 반대로 노동 시장에서 기계의 부품처럼 움직이는 인간이 자동인형과 구별될 수 있는 지점이 무엇인가. 게이비 우드의 표현대로, 무수한 소설이나 백과사전 같은 참고 서적들의 페이지 사이 어딘가에는 "여러 세기 동안에 걸쳐서 공포와 사실로 이루어진 진정한 역사"가 있다. "이것은 신 행세를 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온갖 인공 생명을 보면서 경외감에 사로잡힌 채 자기 자신의 진정성에 관해 고민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살아있는 인형>은 그 역사의 '두렵고 낯선'(unheimlich) 팩트를 추적하는 일종의 기행문이다.

▲ <살아있는 인형>(게이비 우드 지음, 김정주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 ⓒ이제이북스
첫 번째 등장인물은 르네 데카르트다. 17세기, 계몽주의가 본격적으로 발현하기에 앞서 데카르트는 <인간론>을 통해 '짐승-기계' 가설을 주장했다. "동물은 오로지 물질로만 이루어진 기계이며, 인간에게는 '합리적인 영혼'이 있지만 동물은 이성에 의거한 사고를 할 수 없다." 당시 데카르트는 이 '기계성'을 인간의 범위에까지 밀고 나갈 생각도 있었지만 종교재판소의 권위에 눌려 그렇게까지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지 못했다는 해석이 뒤따른다. 이게 사실이라면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이성적인 사고 능력의 범위를 어디까지 두어야 할지 다소 모호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더 수수께끼 같은 일화가 뒤따른다. 데카르트에게는 1635년 태어난 딸 프랑신이 있었고, 그녀는 다섯 살 어린 나이에 성홍열에 걸려 죽었다. 데카르트는 딸의 죽음이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이었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그리고 9년 뒤인 1649년, 그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부름을 받고 험난한 뱃길에 나섰다. 데카르트는 선원들에게 어린 딸과 함께 여행 중이라고 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딸의 모습을 볼 수 없던 선원들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데카르트의 선실에 몰래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처럼 움직이고 행동하는 인형을 발견한다. 원래부터 자동인형과 해부학에 큰 관심을 보였던 데카르트가 시계태엽과 금속 조각으로 직접 만든 '딸'이었다. 대경실색한 선원들은 이 불길한 기계가 사악한 운명을 몰고 온다며 뱃머리에서 던져 버렸다.

그 다음의 주인공은 18세기를 떠들썩하게 주름잡은 자동인형의 아버지 자크 드 보캉송이다. 그는 시계태엽 장치를 정교하게 조작하여 플루트를 연주하거나 피리를 부는 자동인형을 만들었다. 플루트는 "손가락과 호흡 뿐 아니라 악기에 불어넣는 공기의 양과 다양한 입술 모양"에 의해 음이 생성되는 까다로운 악기다. 보캉송은 인형의 성대와 입모양을 인간의 그것과 똑같이 설계했고(결과적으로 인형이 '숨을 쉰다') 심지어 플루트 구멍을 막는 손가락의 힘을 조절하기 위해 인형의 손가락에 '가죽'을 씌웠다. 피리 부는 인형의 경우 "인간의 가슴을 가장 피로하게 하는 악기"인 피리를 그 어떤 인간보다 빠른 속도로 지치지 않고 불 수 있다. 보캉송의 자동인형은 인간을 그대로 모방했고 한발 더 나아가 어쩌면 인간의 불충분함과 무능력을 보충할 수 있는, 인간적인 결점을 극복할 수 있는 일종의 '보철' 작용까지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을 경이감에 빠뜨렸다.

18세기의 새로운 프로메테우스로는 헝가리 사람 볼프강 폰 켐펠렌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1769년 제작한 체스 두는 자동인형(일명 '터키 사람')은 유럽 각지를 단숨에 휩쓸어버렸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아들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인 요제프 2세가 '터키 사람'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나폴레옹과 예카테리나 대제도 '터키 사람'과 함께 체스를 두었다고 전해진다. 놀라운 것은 이 인형이 실제로 체스에서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인형은 상대방이 두는 수를 읽고 게임의 향방을 가늠하며 자신이 치고 나아가야 할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악마가 '터키 사람'을 조종한다며 성호를 그었고 귀부인들은 게임을 구경하다 종종 졸도했다.

19세기로 접어들어 좀더 '현실적인' 사람들이 이 자동인형에는 분명 속임수가 있으며 인형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도 이 사건을 관심 있게 지켜보며, 자신이 창조해낸 탐정 뒤팽처럼 나름대로의 추리를 발표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기계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사람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이 둘 것 같지 않은 바로 그 방식으로 체스를 두기 때문이다."(체스 두는 인형이 왼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포는 모든 체스 선수는 오른손잡이라는 가설 하에 이같은 논리를 전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중들은 '터키 사람'에 열광했다. 그들은 계몽주의 시대에도 여전히 "이성이 마법보다 매력이 없다"는 걸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살아있는 인형>에서 '터키 사람'에 대한 비밀이 연달아 폭로되는 장은 그야말로 숨 막히는 서스펜스로 넘쳐난다. 인간이 장난감을 조종하지만, 장난감 역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건 위험천만한 유희에 자발적으로 순응했던 인간과 그 인간의 욕망을 빌어 생생하게 되살아난 기계 사이의 대등한 대결이다. 스스로의 한계에 끝없이 도전하는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을 기이한 방식으로 반사시키는 기계 사이의 내기는 환상의 실현과 (라캉적 의미에서의)실재의 엿봄 사이를 불안하게 오간다.

이제 19세기 말 축음기를 발명한 그 시대의 '마법사' 에디슨이 집착했던 '말하는 인형' 제작기, 그리고 에디슨의 '전설'을 각색한 프랑스 작가 빌리에 드 릴라당의 소설 <미래의 이브>, 영화를 환상의 매체로 만든 최초의 감독 조르주 멜리에스의 삶이 뒤를 잇는다. 영화가 자동인형을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멜리에스의 영화 속에서 조각상은 인간으로 변하고, 달이 얼굴을 찡그리고, 인형이 움직이며, 주인공이 자신의 목을 벤 다음 그 머리를 가지고 놀거나 느닷없이 나타나는 자신의 분신을 쫓아다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세기 '인형 가족'으로 불렸던 유명한 난쟁이 남매의 할리우드 정복기가 펼쳐진다.

그 이후를 생각해본다. 영화를 통해 온전히 환상을 충족시킬 수 있는 우리는 자동인형 앞에 섰을 때 더 이상 충격 받지 않는다. 인간의 움직임을 캡처하는 각종 최첨단 테크놀로지는 애니메이션에서든 (판타지와 SF)실사영화에서든 환상성을 자유롭게 실천한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그 영화 속에서 기계적인 존재의 질감은 날이 갈수록 완벽하게 실제처럼 보이고, 거꾸로 그 안에서의 인간은 점점 더 '부자연스럽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로버트 저매키스의 <크리스마스 캐롤>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에서 가장 어색한 것은 여전히 인간의 얼굴이다. 하지만 그 외의 환상적인 존재들, 혹은 (있을 수 없는)자연 현상과 사건들은 이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알렉스 프로야스의 <노잉>에서 전철이 선로를 이탈하여 역내 사람들을 덮치는 무시무시한 장면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에서 도시가 말 그대로 '접히는' 광경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관객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부르짖었다. "와, 이건 진짜같다!" 인간에 의해 생명이 불어넣어진 어떤 존재들과 인간 자체가 '자연스러움'을 사이에 두고 여전히 끝나지 않는 경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스위스 뇌샤텔에 전시된 자크-드로의 글 쓰는 자동인형은 지금도 관광객들 앞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가끔은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걸까?"를 쓴다고 한다. 이 인형의 질문 앞에, 극장에 앉아 편안하게 인간-기계의 영원불멸한 반복 재생과 점점 더 '자연스러워지는' 기계-인간의 내기를 구경하던 우리는 급작스런 불안에 사로잡힐 수박에 없다. 우리가 스크린에서 보던 기묘한 대비가 실은 현재에서도 그대로 연장되는 것은 아닌가. 임신과 출산이라는 자연의 섭리(라 불리던)에 의존하지 않고 일종의 무성생식(無性生殖)을 통해 '나를 닮은 형상'을 배출하려던 욕망은 어느새 우리를 따라잡아버린 게 아닌가. 인간을 인간답게 구분지어 주는 특성이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걸까. 이제 기계가 우리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보다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요인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결점 투성이 기계에 가까워진 건 아닌가.

<살아있는 인형>은 분명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사실 내놓을 수가 없다). 그 답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 <살아있는 인형>에 자주 언급되는 E. T. A. 호프만의 <모래 인간>(과 이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호프만의 또다른 걸작 <호두까지 인형>에서도 자동인형에 대한 무시무시한 상상력을 발견할 수 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등과 함께 R. L. 러츠키의 <하이테크네>(시공아트 펴냄, 김상민 외 옮김)도 아울러 함께 읽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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