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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와의 전쟁? 벗겨보니 '주말 연속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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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와의 전쟁? 벗겨보니 '주말 연속극'!

[프레시안 books] 레너드 카수토의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레너드 카수토의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김재성 옮김, 뮤진트리 펴냄)를 읽으며 내가 이 장르의 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단지 레이먼드 챈들러의 팬일 뿐이다. 그건 내가 필립 말로의 팬이라는 뜻이고, 아직 덜 자란 구제불능의 애송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이 글에서 중요한 건 전자다. 언젠가 챈들러는 이렇게 썼다.

여기 이 비열한 거리를 걸어가야만 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때 묻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리얼리즘 속의 탐정은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히어로이다. 그는 모든 것이다. 그는 완전한 남자여야 하고, 평균적인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평범하지는 말아야 한다. 진부한 표현으로 그는 진정한 남자다. 그것은 몸에 배어 자연스럽고, 본능적이고, 필연적이지만 남들 앞에서 스스로 떠벌리지는 않는다. (레이먼드 챈들러, <심플 아트 오브 머더>)

'비열한 거리'는 곧 하드보일드의 거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을 빌자면 "레인코트보다 깡패들 쪽이 훨씬 많고, 우산보다는 주사기 쪽이 더 많은" 거리이고 "만(灣) 입구 부근에서 근근이 생계를 잇고 있는 새우잡이 어부가 가슴에 45구경 세 발을 맞고 죽은 시체를 건져 올렸다고 해도 그다지 드문 사건이 아닌" 도시다.

그것은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사내들의 그림자와 코너를 돌 때마다 마주치는 시체들로 가득한 어두운 뒷골목인 동시에 챈들러가 바라보는 세계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떤 비열함도 없이 맨 몸으로 이 거리를 걷는 남자는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 한다. 다소 냉혹하고 또 비정해질 필요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가 아무리 차가운 도시 남자처럼 보인다고 해도, 자신의 의뢰인에게는 끝내 따듯할 거라는 사실을.

나는 그것이야말로 하드보일드라는 장르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틀렸다. 그것은 변수이지 상수가 아니었다. 하드보일드의 원조라는 대실 해밋의 <붉은 수확>(황금가지 펴냄)과 챈들러 이후에 쓰인 작품들을 읽으며 내가 느낀 불만은 결국 잘못된 기대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언제나 박하거나 너무 과했다. 냉동고 밑바닥에서 몇 번의 계절을 보낸 하드처럼 이빨을 시리게 하거나, 여름날 손에서 녹아내리는 소프트크림처럼 내게 찝찔한 뒷맛을 남겼다.

물론 이건 기본적으로 취향의 문제다. 하지만 단순히 스타일이나 플롯, 캐릭터(에 대한 취향)에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좀 더 총체적인, 작품을 지배하는 어떤 정서에 대한 문제다. 나는 그 사실을 레너드 카수토의 책을 읽으며 알았다. 그것은 바로 '센티멘털리티'의 문제였다.

▲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레너드 카수토 지음, 김재성 옮김, 뮤진트리 펴냄). ⓒ뮤진트리
'하드보일드'와 '센티멘털리티'라는 이질적인 단어들을 한데 묶어 책의 제목으로 붙인 카수토의 주장은 다소 도발적이다. 흔히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의 사내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지는 하드보일드라는 장르가 실은 말도 못하게 감상적이라는 것. 영화 속 어두침침한 뒷골목에 으레 빗방울이 '추적추적' 흩뿌려지는 것처럼, 하드보일드의 세계는 감상이라는 이름의 빗방울에 의해 이미 촉촉하게 젖어있다는 것이다.

젖은 낙엽처럼 지친 날이면 종종 오래된 바의 한쪽 구석에 앉아 김릿을 마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하는 나 같은 애송이들을 발끈하게 할 만한 주장이다. (물론 나를 가장 발끈하게 하는 것은 거만하게 앉아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챈들러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김릿에 비하면) 마티니 같은 것은 비교도 안 됩니다." 보고 있나, 다니엘 크레이그?)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우리 모두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책의 저자만큼은 아닐지라도, 하드보일드의 주인공들 또한 때때로 감상에 빠진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내가 챈들러를 내 의뢰인에게는 따듯한 도시 남자로 생각했듯이). 독일의 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은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범죄 소설을 분석한 1984년의 저서 <즐거운 살인>(이동연 옮김, 이후 펴냄)를 통해 우리의 터프가이들을 이렇게 평한 바 있다.

샘 스페이드, 필립 말로, 네스토르 뷔르마, 류 아처는 현존 사회 질서에 어떠한 환상도 갖고 있지 않은, 냉소적이고 비정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본심을 들여다보자면 이들은 여전히 감상주의자이며, 곤경에 빠진 여인이나 강자에 시달리는 약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인물들이다. (<즐거운 살인>, 70쪽)

물론 이런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은 레이먼드 챈들러였다. 그는 <기나긴 이별>에서 한 여인의 입을 통해 "약간 감상주의자시네요, 그렇지 않나요. 말로 씨?"라고 말하게 하는 한편(이에 말로는 "내가 여기 와서 김릿을 마시기 때문에요? 당신은 어떻죠?"라고 답한다),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며 동봉한 편지에서는 세간의 그러한 평가에 대해 조금 짜증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이것을 내가 원하던 대로 썼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럴 수 있게 됐으니까요. 난 미스터리가 공정하고 명료한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사람들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기묘하고 타락한 세계, 그리고 정직해지려고 애를 쓰던 어떤 사람이라도 결국에는 어떻게 감상적으로 또는 단순한 바보로 보이게 되는가였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 <기나긴 이별>, 627쪽)

카수토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하드보일드 소설이 단순히 감상적일 뿐 아니라, 가족과 가정사에 초점을 맞추는 여성들의 장르인 감상주의 소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앞서 만델은 하드보일드를 낭만주의와 냉소주의의 결합이라고 분석했다. 이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감상주의라니? 하드보일드는 물론 감상주의 소설의 전통 또한 찾아보기 힘든(혹은 감상주의라는 조미료가 대부분의 소설에 뿌려져 있어 그것을 독자적인 장르로 인식하지 않았던) 한국의 독자로서는 어안이 벙벙한 이야기다.

홀대받는 장르들의 무덤에서 감상주의를 구조해 낸 최초의 문학비평가들 중 한 명인 제인 톰킨스는 감상주의를 일컬어 가족 그리고 사람들을 서로 연결해 주는 그 밖의 제도들을 강조하는 세계관이자 권력과 "인간적 감정"(또는 감성) 간의 관계에 대한 의식이라고 묘사한다. 감상주의 소설은 중산층과 백인의 관점을, 주로 농촌을 무대로 한 소규모의 사적인 공동체를 희구하며,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공감할 때 발생하는 신뢰와 자양분 넘치는 사회적 연대를 칭송한다. 전통적으로 이와 같은 공감적 연대는 가정에서 시작하며, 특히 어머니와 아이의 유대는 이타적인 사랑과 희생의 숭고한 원형으로 기능한다. (17쪽)

하지만 (우리가 떠올리는) 대부분의 하드보일드 소설은 가정이 무너지고, 이기적인 개인들 간의 공감이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의 험난한 일과를 그리는 장르가 아니던가? 물론 그렇다. 그것은 가정과 직장, 가족과 시장 사이의 균열을 위태롭게 뛰어 넘으며 계속해서 걸어가려 하는 개인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결코 그 균열을 봉합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그들은 보잘 것 없는 일당과 스스로의 목숨과 자신의 '모럴'을 지켜낸다. 별로 남는 장사는 아니다.

감상주의 소설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감상주의 소설은 그것이 표상하고 있는 가치, 즉 이상화된 가족과 공감에 대한 심각한 도전과 함께 시작한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감상주의는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를 무대로 하여 집단을 중시하는 공감과 하드보일드적 개인주의 사이의 투쟁을 극화"하는 것이다. 물론 감상주의 소설은 온갖 고난을 이겨낸 주인공을 위해 그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가치들을 온전한 형태로 돌려준다. 그들은 인내하고, 그래서 성취한다.

카수토는 이 두 소설을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일종의 짝패로 본다. 모두 "자본주의로 형성된 시장-가정의 분열(바꿔 말하면, 공공-개인의 분열) 틀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어느 쪽을 강조하느냐가 다를 뿐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의 세계관의 양극단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감상주의적인 극단에서 하드보일드적인 극단으로의 이행을 감행하게 한 걸까?

저자는 "하드보일드와 감상주의 문학은 모두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왜곡되는지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 두 세계가 변화하는 양태에 특히 민감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전도된 설명이다. (책 어딘가에서 저자도 밝히고 있듯) 장르 소설은 사회의 증상이다. 그것이 바로 만델이 <즐거운 살인>의 서문을 통해 "나는 범죄 소설의 역사를 문학사보다는 사회사로 간주"한다고 밝힌 이유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사회다. 감상주의 소설이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던 19세기 중반과 하드보일드 소설이 완전히 정립된 20세기 중반 사이에 미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것은 도시화, 세속화, 그리고 현대 복지 국가의 확립이다. 물론 포디즘으로 인한 대량 생산과 그로 인한 급속한 자본주의화도 빼놓을 순 없다. 그런 변화가 미국인들의 삶의 조건을 돌이킬 수 없이 바꿔놓았고, 그런 현실을 반영하는 하드보일드 소설이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감상주의의 가치가, 실낙원에 대한 희구와도 같이, 어떤 감상적인 향수로 남아 여전히 미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은 어느 누구도 살아본 적 없는 감상주의의 이상적인 가족관이 그들의 가치관에 일정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경향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현실이 더욱더 차갑고 냉혹해질수록 따뜻한 가정의 꿈을 꾸게 된다고 해야 할까. 물론 그것이 꿈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하드보일드의 여명기에 등장한 대실 해밋의 샘 스페이드가 "사랑하는가 또는 사랑하지 않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연인을 주저 없이 고발했던 반면(물론 "그녀를 사랑한다고 인정할 뿐 아니라 그의 찌푸린 얼굴과 긴장된 목소리는 그가 사실은 그녀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 준다"고 지적하는 저자는 한 문학 이론가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전체 주장을 뒷받침한다. "감상주의와 감상주의에 대한 비난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가정적이 되어가는 하드보일드의 (이제 여자 또한 맡게 된) 주인공들이 가족이라는 개념의 수호자를 자청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저자는 이러한 과정을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통해 하나의 완결된 서사로 재구성한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범죄 소설은 인간관계에 대한 갈망을 그것의 충격적인 거절로 보여 준다." 대리 만족이라는 환상을 주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공감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제 하드보일드 소설의 인물들은 더 이상 냉정하지 않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가정을 찾는 쓸쓸한 남자/여자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의 좌절에 함께 좌절하고, 그들 또한 쟁취하지 못한 이상적인 가정에 대한 욕구를 더욱 키워나간다. 하지만 그 감상주의적인 공감의 끝에 마침내 닿게 되는 것은 그들이 꿈꾸던 실낙원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대상, 바로 연쇄살인범이다. (지면 관계상 그것은 "민족의 융합을 방해하는 유태인이라는 불손 세력"과 같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사실만을 지적하기로 하자.) 이 책은 바로 여기까지의 이야기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거의 다 한 것 같다. 450쪽에 이르는 이 책의 나머지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직접 읽으면 된다. 사실 이 책을 끝까지 읽는다고는 해도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의 첫 부분에서 뒷골목(하드보일드)과 빗방울(센티멘털리티)라는 표현을 썼다. 그건 결국 정확히 어느 시점에 무엇을 계기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저자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는 의구심을 포함한다.

물론 저자를 탓할 생각은 없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미국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대부분의 지면을 개개의 작품들을 읽으며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는 재료들을 중구난방으로 모으는 것에 할애하는 대신, 좀 더 커다란 맥을 짚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이 책은 '하드보일드 소설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하나의 아이디어에만 매몰된 느낌을 주고, '하드보일드 소설을 통해 본 사회사'라고 하기에는 여러모로 미흡한 느낌을 준다. 저자는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회의 굵직한 사건 몇 개를 가져오지만 그때뿐이다. 사회사는 문학사를 위해 소비되며, 그 문학사는 제목의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저자의 아이디어 외에는 별다른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물론 이건 조금 박한 평가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움이 느껴지는 부분은 저자가 서문에서 잠깐 언급하고 있는 애덤 스미스와 관련된 부분이다. 감상주의 소설의 정신적 원형을 "사람들은 자기 안에 내재된 도덕적 역량을 채우고 타인들과 조화롭게 살고자 공감적 선행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1759년)에서 찾고, 범죄 소설의 원형을 "현대 자본주의의 작동 논리를 제시하는" <국부론>(1776년)에서 찾는 저자는, 이 흥미로운 연결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고 슬쩍 넘어갈 뿐이다. 그 두 가지 자아의 분열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오늘날의 미국 사회를 바라본다면 제법 흥미로운 그림이 그려질 거라는 생각이다.

물론 저자에게는 (지금의 나만큼이나) 할 이야기가 많았을 것이고, 그래서 (역시 지금 이 글이 그런 것처럼) 더 멀리 나아가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수많은 일차 자료를 꼼꼼하게 제시하는 그의 성실함은 높은 평가를 받을 가치가 있다. 이 글의 처음에 밝혔듯 나는 하드보일드라는 장르의 팬이 아니다. 만약 그 분야의 팬이라면 저자의 이러한 성실함에 (무엇보다 그가 나열하는 수많은 소설들의 장면 장면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덧붙임

마지막으로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 몇 권을 소개한다.

먼저 이 글에서도 몇 차례 인용한 바 있는 에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이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입장을 철저히 견지하는 탓에 장르 소설 팬이라면 조금 부당하고 억울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또한 출간 후 이미 오랜 시간이 흘러 조금 빛바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럼에도 무척 재미있는 책이다.

그리고 카수토가 "범죄 소설의 노장 편집자이자 출판업자로 이 분야의 권위자"라고 표현한 오토 펜즐러가 직접 기획한 <라인업>(박산호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스물두 명의 범죄 소설가들이 그들의 인물과 소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솔직한 어조로 말하는 책이다. 특히 몇몇 작가들의 글은 무척이나 재미있다.

그리고 챈들러, 챈들러, 챈들러, 챈들러다. 시중에 나와 있는 그의 모든 책을 읽어라. 역시 덜 자란 구제불능의 애송이라고 욕해도 좋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다. 만약 이 글을 통해 챈들러를 다 읽은 사람이 있다면, 연락하시라. 김릿 한 잔 사겠다.

딱 한 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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