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지만 우리는 그렇게 모든 감각을 열어 집중하게 되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최근에 내가 만난 사람은 바로 <영혼 없는 작가>(최윤영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다. 이 무슨 희한한 의인법인가 하면서도, 내가 만난 것은 아무래도 다와다 요코라는 이름을 가진 책날개 사진 속의 인물이라기보다 바로 이 글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고 느껴져 고치지 않는다.
그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나는 그렇지만 나도 살고 나의 삶도 역시 산다고 말하고 싶다. 나의 글도 또한 삶이 있다." (21쪽) 이런 농담 재미없다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사람'을 빨리 읽으면 '삶'이 되고, '삶'이라는 글자의 받침을 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고 발음하면 '사람'이 된다.
이 농담을 제치더라도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한 삶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우리는 대개 한 사람을 고정되어 있는 어떤 본성을 가진 자로 대하기 마련이다. '그를 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더라도 실은 그것이 편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이미 파악한 그'를 가지고 그를 대한다.
그러나 내가 파악한 그가 반드시 그일 수도 없으려니와, 그의 본성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있었는가? 라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아무리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습관이란 것이 강고하고 끈질긴 것이라고 해도 삶은 변하기 마련이고 그 삶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고정된 그의 모습'과 '삶과 더불어 변화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끊임없이 어긋나고, 나와 그의 관계도 서로의 인식 속에서 그리고 시간과 더불어 이전의 형태와 이후의 형태로 변화하며 어긋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어긋남을 잘 견디지 못한다. 안 그래도 쉴 새 없이 변화하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익숙한 것이 낯설게 변하는 경험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자각하게 하고, 그 경험은 많은 경우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밝혀야 한다, 그의 표정이 무엇인지 읽어야 한다, 빈칸이나 백지는 채워야 한다고 끊임없이 요청한다.
결국 우리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건이든 그 모든 것들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확인하는 일만 하고자 한다. '통조림 속의 낯선 것'에서 글쓴이는 글을 읽지 못하는 샤샤를 통해 모든 것을 "읽어 내려고" 하지 않고 "주의 깊게 관찰하는" 일을 배우게 된다. '비누'라는 글자를 아는 사람은 피닉스 그림이 그려진 곽에 담긴 '비누'를 확인하기 위해 그것을 열어볼 필요가 없다.
글자와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 사이의 틈을 보지 못할 때, 생각이 단어와 꽉 들러붙어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려고 하지 않고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다. 예를 들자면, 모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물에 대해 이미 주어져 있는 이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감각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 때의 <영혼 없는 작가>
▲ <영혼 없는 작가>(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을유문화사 |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에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한 고민(느리게 빠르게 넓게 좁게 읽는 것과 같은 문제가 아니라 '경험과 더불어 책을 읽는 것'과 같은 문제)을 계속하게 되는데, 특히 글자에 익숙한 사람과 이미지에 익숙한 사람의 차이라든가 현장에 있는 사람과 이론을 공부하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느끼면서 삶의 배경 또는 경험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생겨나는 갈등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갈등에 대한 생각을 그 강연에서 일부분 다루었는데, 그때 나는 이 책의 한 구절인 "모든 낯선 음향, 모든 낯선 시선, 모든 낯선 맛은 몸 자체가 변할 때까지는 내 몸에 편안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3쪽)를 읽고 그러한 갈등의 문제가 편견의 물질성 또는 편견과 몸의 밀접한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문장에 힘입어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사고방식 또는 익숙하지 않은 존재를 맞닥뜨렸을 때 종종 '구역질 난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생각과 몸의 밀접한 관계, 즉 생각이 몸의 반응에 영향을 미치며, 몸이 생각을 통제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적절하다. "이유 없이 싫다니까!" 하고 말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자들의 존재가 이유 없이 싫은 게 아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물질성을 띠며, 몸은 오래된 생각들이 새겨져 있는 관념체라고도 할 수 있어서,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정작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를 놓쳐버리거나,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며 차단이나 무시의 방식으로 문제를 회피하게 된다. 다소 과장되어 보일 수도 있는 이러한 표현들을 통해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몸은 천천히 변화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어쨌든 그 공간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 대화라는 것이 가능하려면 상대방의 편견과 몸의 시간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 이때 고려란 많은 부분 지루하고 힘겨울 변화와 갈등의 과정을 견뎌 나가는 일을 의미한다.
지금의 <영혼 없는 작가>
나의 경우 실제로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면 속수무책이 되어버린다. 아예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러나 그 사람이 함께 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일 때 우리의 이야기는 논리 싸움이 아니라 감정싸움으로 비화한다.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와는 더 이상 논란을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로 마음먹게 된다.
몸의 시간을 고려한다는 것, 변화와 갈등의 과정을 견뎌낸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매번 느낀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갈등을 없는 듯이 회피해 버린다고 해서 그 갈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다시금 우리는 논리 싸움으로든 감정싸움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상대방을 만나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하고, 또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의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듣고 이야기하는 일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다시 펼친 <영혼 없는 작가>에는 여러 종류의 '듣고 말하는'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이제까지 해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고,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일을 다루고 있다. 이 세계에서는 이제까지 봐왔던 사물, 글자, 심지어 자신의 몸도 처음 본 것처럼 낯설어지고, 꿈 속의 사람이나 죽은 자의 말도 들을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일본 여자 그림이 있는 참치 통조림을 땄을 때, 그 안에 들어 있는 한 덩어리 참치 살이 그림 속 여자가 변한 것으로 보인다('통조림 속의 낯선 것'), 하드롤빵이나 물고기에게서 영혼의 생김새를 떠올리고, 티베트 고승의 목소리에서 죽은 사람의 말을 듣는다('영혼 없는 작가'), '유럽'은 보이지 않으면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걱정을 갖고 있는, 보이고 싶어 하는 몸으로 이해된다.('"유럽이란 원래부터 없었다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독일어를 처음으로 배우는 과정에서 연필은 남자로 타자기는 여자로 느껴지고(독일어 명사에는 성(性)이 있다), 비가 온다('es regnet')라고 말할 때 'es'(그것)가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게 만든 것처럼 느껴진다(「엄마말에서 말엄마로」) 등.
사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자신의 맥락을 갖고 있는 어떤 통찰을 각기 담고 있는데, 이제까지 우리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당연하게 생각하고 보아왔던 것들로부터 거리 두는 일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익숙한 말과 익숙한 내 주변의 물건들,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나의 몸이 낯설어지고, 생활하다 보면 금방 잊힐 뿐인 잠 속의 꿈이 밥 먹고 양치질하고 똥 싸고 일하는 일상의 매 순간에 침입한다. 이 이야기들은 모든 것이 뭔가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 같다는 기묘한 느낌을 주면서도, 곧 숨은 그림을 찾은 것처럼 왜 이제야 이것을 발견했는지 의아해지게 만드는 효과를 갖고 있기도 하다.
"나는 글을 쓰는 동안 나의 몸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자 시도할 것이다. 내가 이들 이야기를 열심히 들으면 나는 내 세포 방들이 내게 얼마나 낯선지를 알게 된다. 이 세포 방들은 유전으로 물려받은 것과 먹어서 생긴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내 몸에게서 들은 어떤 이야기가 시간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일이 종종 있다." (22쪽)
이 문장이 말하고 있듯이, 자신이 살아온 방식과 거리를 두는 일은 이미 자기 안에 들어와 있던 낯선 것들을 발견하고 그것의 말을 들을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 '우리' 또는 이곳에 있는 무수한 '나'는 미리 주어진 본성과 같은 것이 없어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각자 변할 수 없는 부분과 변할 수 있는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변할 수 있는 부분은 오로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말과 이야기들을 들음으로써만 작동된다. '영혼 없는 작가'도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인간의 몸 또한 통역 작업이 행해지는 여러 방을 가지고 있다. 내 추측에는 여기에서는 원본이 없는 통역이 일어나고 있다." (23쪽)
사물의 말, 죽은 자의 말, 꿈의 말이 적힌 이야기들은 익숙해져 버린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게"(28쪽) 하고, 그러한 일상의 이미지에 묶여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을 해방시키는 기회"(80쪽)를 준다. 다와다 요코의 다른 책 제목이기도 한, '벌거벗은 눈'으로 세계를 보는 일이 중요한데 이것은 동요 없는 상태를 지향하는 내면의 관조나 명상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편안하게 보아왔던 모든 것들과 그것에 대한 자신의 사고방식과 싸우는 것에 더 가깝다. 맨눈으로 보는 것, 주변의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의 생성은 모두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함께 이루어지는 일들이며, 기존의 익숙한 시선과 익숙한 이야기와의 갈등을 느끼면서 진행되는 활동 과정이다.
'낯선 말'과 다른 만남
한 모임에서 '소통'이라든가 '타자'라든가 하는 말들이 오가고 있는데 문득 그 말들이 공허해짐을 느낀 적이 있다. 그 공허함은 그러한 이상적인 형태의 소통이나 타자와의 만남이 현실에서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 말들의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듣고 있는 데서 생겨난 것이었다.
나 역시도 그러한 말들을 당연한 듯이 듣고 말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말의 의미 자체가 모호해짐을 느꼈다. 그때는 바로 그곳에서 그 말들에 대해 더 이상 어떤 설명도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 말들이 중요하게 부각되게 된 각자의 경험의 맥락이 지워지고, 말의 의미나 내용을 통일해야만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다는 듯이 합의를 방해할 것만 같은 어긋나는 말들은 무시되거나 차단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소통'이나 '타자'라는 말들은 형식만 남은 채로 사람들의 입에서 편안하게 들어왔다가 나갔고, 모임이 끝나자마자 버려졌다.
형식만 남은 말은 생각을 추동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루어야 할 문제들을 해결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어떤 사물, 사람, 사건을 만났을 때 그들에게서 항상 같은 것만을 보게 만든다. 변화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움직이는 삶을 굳어버리게 한다. 익숙해진 말과 익숙한 인식 틀의 폐해를 현대 철학에서는 "재현의 폭력"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는 유창하게 모국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구역질이 났다. 그 사람들은 말이란 그렇게 착착 준비되어 있다가 척척 잽싸게 나오는 것이고 그 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거나 느낄 수 없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14쪽)
'철학자의 서재'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 books'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금요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이 연재의 일부를 묶은 <철학사의 서재>(알렙 펴냄)가 2010년 나왔습니다.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