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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원숭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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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원숭이'가 아닙니다!

[이은영이 사랑하는 저자] 로버트 새폴스키

'프레시안 books'는 2012년 신년호를 '내가 사랑하는 저자'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열두 명의 필자가 사랑하는 저자와 만났던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독자 여러분도 사랑하는 저자와 만나는 기쁨을 누리길 기대합니다.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기다리진 않았다.

굳이 몇 번의 반복 학습을 거치지 않고도, 이름만 들어도 탄성이 절로 나오는 유명 대학의 석학이시라면 거짓말 안 보태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실 테고 머나먼 나라에서 일면식도 없는 '이 양'이 보낸 "선생님 책 한국어판에 실을 사진 한 장만 보내 주십시오." 하는 요청 편지 따위는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나 있으리라는 것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다행히 총명하고 친절한 비서나 조교를 두고 있다면 그나마 일찍, 일주일 이내에 답장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꼭 답을 바라고 편지를 쓴 것도 아니니 보통은 그냥 잊어 먹고 지낸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당연히 오래 걸리리라 생각하며 '보내기'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기억을 장기 냉동 보관해 두었던 터라, 예기치 못하게 빨리 등장한 그의 존재를 내 눈과 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마터면 기능성 약제들과 외국 대학 학위를 싼값에 제공해 준다는, 해외에서 날아오는 각종 스팸 메일들과 뭉텅이로 쓰레기통으로 쓸어 넣어 버릴 뻔했으니 말이다. 낸시와 제나, 리처드, 브렌, 안젤라, 제럴드로 이어지는 길고 긴 이국적인 발신자들의 메일 행렬 가운데 로버트, 로버트 새폴스키가 있었다.

▲ 로버트 새폴스키. ⓒ사이언스북스
더없이 친절하게 "케냐에서 '락(Rock)'과 함께"라는 설명까지 달아 보내 준 한 장의 사진. 대개의 저자들처럼 책꽂이나 연구실을 배경으로 근엄한 얼굴을 한 상반신 사진이나, 마치 '지금 (자연을) 만나러 갑니다' 하고 이마에 적혀 있는 듯한, 울창한 숲 한가운데 신성함이 마구 묻어나는 표정의 사진을 보내 왔겠지, 지레짐작하고 있던 내게 그는 '훅' 하고 한 방을 날려 왔다. 아무런 의심 없이 첨부된 파일에 마우스를 갖다 대고 오른쪽 버튼을 클릭하자 모니터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명문 스탠퍼드 대학의 교수도 아니오, 숭고미로 가득 찬 현장 생물학자도 아닌, 그냥 시커먼 털북숭이 한 쌍이었다!

사진을 대면한 처음 몇 초간은 당최 사진 속 상황이 이해되질 않아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야바도 아닌 것이 웬 시커먼 털북숭이 덩어리 둘 중 하나는 인간이고(그리고 아마도 그 '인간'이 '새폴스키'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코원숭이라는 사실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지면서, 나는 파안대소와 함께 모니터상에 현현하신 두 물체를 향해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불경하게도!) 목구멍으로 넘기려던 커피를 도로 뿜어내고야 말았다.

로버트 새폴스키는 1970년대 후반부터 30여 년간 아프리카 케냐에서 (사진에 등장하는) '락'을 비롯한 개코원숭이(baboon, 비비라고도 부른다)의 지배 서열 관계를 비롯한 사회성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 반응을 연구하고 있는 영장류학자이자 신경 과학자인 동시에 <디스커버(Discover)>, <뉴요커(The New Yorker)>,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 등 유수의 잡지에 칼럼을 쓰고, 몇 권의 대중 과학서를 출간한 작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스트레스에 대한 그의 주요 연구 성과를 담은 책이 <스트레스>(원제는 "why zebras don't get ulcers(얼룩말은 왜 궤양에 걸리지 않을까?)"이다!)라는 제목으로 지난 2008년에 출간된 적이 있다. 본인이 직접 선정하여 보내 준 사진에서 예감할 수 있듯, 새폴스키는 유머 감각이 풍부하고 틀에 박히지 않은 거침없는 언변과 글 솜씨(그리고 패션 감각! 누가 야생에서 은폐 효과가 뛰어난 사파리룩 대신 현란한 체크 셔츠와 폴리에스테르 반바지, 거기에 더해 새하얀 테니스 양말을 신을 생각을 하겠는가!)로 청중과 독자를 사로잡는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소문 나 있다.

그런 그를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The Man Who Mistook His Wife for a Hat)>로 유명한, 역시 인기 작가이자 신경학 전문의인 올리버 색스는 "우리 시대 최고의 과학 저술가 중 한 명"이라 칭했으며,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제인 구달에다 코미디언을 잡종시키면, 새폴스키처럼 글을 쓸 것이다"라고 평했을 정도다.

이 업계(과학계, 대중 과학서 시장)에서는 글 잘 쓰는 사람이 참으로 드물다. 담고 있는 내용 자체가 어려운데다, 그 어려운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은 또 어찌나 딱딱하고 지루한지. 어떨 때는 글을 쓴 이 전문가, 석학이라는 작자가 자신이 평생을 바쳐 연구했다는 이 분야를 제대로 이해는 하고 있는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까먹지나 않았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칼 세이건이나 리처드 도킨스, 제인 구달 같은 정말 글 잘 쓰는 희귀한 존재들이 간혹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대개 시간이 지나면서 과학의 현장에서는 발을 살짝 뺀 채 경계에 머물며 거의 전문적으로 글을 쓰고 강의를 하는 등 사람들에게 과학의 중요성을 알리는 전도사로 나서기 십상이다(실제로 과학계 내부에서는 일반인을 위한 글쓰기 등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과학자는 '칼 세이건화(saganized)'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단다. 새폴스키가 과학의 대중화, 대중의 과학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칼 세이건상'을 받았을 때도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반대로 글을 잘 쓰지만, 대중적인 글쓰기에 대한 동종 업계 내부로부터의 우려와 연구 및 학술적인 글쓰기와의 병행이 힘들어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아깝게 썩히고 마는 이들도 있다.

새폴스키는 그런 과학계의 속사정을 고려할 때 더더욱 희귀한 존재이다. 일단 그는 누가 봐도 참 쉽고 재미나게 글을 잘 쓴다. 그의 글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되도록 외계어(학술 용어들)를 쓰지 않고 일상적인 언어로 작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겪은 경험과 지인들의 경험, 유명 인사들의 경험을 우려내어 과학적 사실들을 무척이나 재미나게 설명하고 있다. 더없이 훌륭한 것은 그 글이 웃기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제목의 절을 발견하고 나는 포복절도하고 말았다! 토론 및 전망을 이야기하는 절이었다.) 그리고 주변의 노파심 어린 시선에 보기 좋게 한 방을 먹이며, 30년 넘게 영장류학과 신경 생물학을 접목시킨 자신만의 고유한 연구를 왕성하게 이어 오고 있다.

이 글을 쓰기로 결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행하고 있던 원고 하나를 예기치 않게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두 개의 일은 마감 날짜가 동일했다! 스트레스 전문가 새폴스키도 이야기했지만 예측할 수 없음은 통제할 수 없음을 뜻하고 그것은 곧 스트레스의 증가를 의미했다. 연말로 가까워지며 예측하지 못한 일들은 점점 더 늘어나 부모님의 방문(즉, 집안 대청소를 해야 하고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 회사 송년회 진행 등등 내게 주어진 얼마 없는 시간을 어떻게든 빠듯하게 쪼개 써야 했고, 이러다 모든 일을 망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밤잠을 설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남들은 모르는 새폴스키의 매력을 널리 알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기에(물론 그의 책이 한국에서 잘 팔리기만 했다면야 내가 굳이 나서서 자랑질을 하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눈물을 머금고 흥미진진한 방송 3사 연말 시상식 시청을 대신 포기하기로 했다. 케냐에서 미국으로, 미국 내에서도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무척이나 바쁜 생활을 이어 가는 와중에도 비행기에서 기차에서 쉼 없이 학술 논문과 칼럼과 책을 집필하고 있는 새폴스키의 일상도 내가 처한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데 일말의 도움이 되었다. '나야 내내 바쁜 것도 아닌데, 뭐…….'

▲ <스트레스 : 당신을 병들게 하는 스트레스의 모든 것>(로버트 새폴스키 지음, 이재담·이지윤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무엇보다 그의 책을 읽는 동안에는 정말 그 어떤 스트레스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삼겹살과 알코올, 연말이 주는 허무함과 흥분이 가득한 전철 내에서 극도로 공포스러운 표지(나름 스트레스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겠다고 디자이너와 상의해 만든 표지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새폴스키의 매력과 책의 재미를 살리지 못했던 것 같아 새폴스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를 한 두껍디두꺼운 책을 손에 들고 킥킥거리는 내가 이상하게 보였을 것도 같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키워드로 부와 권력, 종교, 의료 서비스 등 우리 인간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날카롭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꼬집고, 모든 개인이 스트레스 없이, 그리고 그로 인한 동맥 경화나 심장병, 당뇨 등등의 신체적 질병과 분노와 범죄 등 정신적 질환 없이 평화롭게 인생을 마감하기 위해서는 사회 자본을 높이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브라보! 새폴스키를 국회로!!) 선언을 마주하고서 어떻게 미소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흔히 인간 본성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들은 오랫동안 유지되고 지배 질서로 자리 잡힌 인간 사회의 부조리한 면들을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결국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니, 입 닥치고 순종하라는 얘기냐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심리에 대한 이해가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범죄자의 심리에 대한 이해가 범죄의 발생을 낮추거나 예방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나침반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들이지만 특정 상황과 조건에서는 이타적 성향을 나타내더라는 과학적 사실을 기반으로, 많은 진화 심리학자들과 진화 경제학들이 '그' 특정 조건들을 밝혀내고 있으며, '그' 특정 조건들로 실제 인간 사회에서 이타성과 협동을 끌어내는 사회 실험들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예측할 수 없음은 통제할 수 없음을 낳고, 이는 스트레스로, 그리고 결국 각종 질환으로 이어진다. 인간 본성을 이해함으로써 인간 행동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면, 우리는 (아주 없애기는 힘들겠지만) 스트레스 수준이 낮고, 지금처럼 수많은 질환으로 고통받지 않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새폴스키는 사회성이라는 면에서 인간과 가장 유사한 행동 양상을 보이는 개코원숭이를 연구함으로써 인간 본성과 행동을 예측하고, 인간 스스로가 야기하는 부작용들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자 노력한다.

"원숭이를 너무 의인화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에도 특유의 재치와 입담으로 "그럴 리가! 나는 원숭이를 의인화하는 게 아니라, 인간을 원숭이화하는 거라고!"(아마 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심인 듯싶다)라 답하며, '과학이란 어렵고 지루한 거야.', '학술적 글쓰기(곧 연구)와 대중적 글쓰기는 병행할 수 없는 거야'라는 등의 고정관념을 타파한, 진정 틀에서 벗어난 그의 '후리(free)함'을 나는 존경하고 사랑한다.

굳이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않고도, "최고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궤양에 걸리기보다 남에게 궤양을 걸리게 한다", "그는 궤양이 생기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야. 대신 남의 궤양을 만들어 주지",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은 질병에 걸리는 경향이 있지만, 흥미롭게도 어떤 질병은 부자에게서 더 많다", "(영장류에서는) 어떤 중요한 개체가 죽거나 영향력 있는 누군가가 집단에 합류했거나, 주축이 되는 협력 관계가 체결되거나 결렬될 때와 같은, 사회적 서열이 불안정해는 기간에는 우위의 개체들이 스트레스 반응을 강하게 보인다(무엇보다도, 1917년에 당신이 러시아의 황제였다면 과연 편안했을까?)", "예복을 입고 번잡한 길거리에 서서 텔레토비의 대사를 읊어 봐. 스트레스가 사라질 거야" 등등의 명대사들은 꽉 막힌 내 가슴을 뻥 뚫어 주기에 충분하다.

새폴스키를 만날 날이 혹시 찾아온다면, 맨발로 뛰어나가 그의 새하얀 테니스 양말에 입맞춤이라도 하고 싶지만(러시아계 정통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지금은 무신론자가 된 그는 아마 자신을 신성화하는 듯한 내 태도에 무척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럴 일은 아마 없을 듯하니, 그저 그가 쓴 글들로나마 그를 영접하는 수밖에. 다행인 것은, 그가 아직 죽지 않았으며, 아직 연구를 계속하고 있고, 아직 왕성하게 글을 쓰고 있기에, 그의 글을 너무 빨리 다 읽어 버려 심심해지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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