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 차일드의 <인류사의 사건들>(고일홍 옮김, 한길사 펴냄)은 무척 기다리던 번역이었다. 진즉에 우리 지식 사회에 소개되고 논의되어야 할 책이라는 점에서 <인류사의 사건들>의 출간은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꼽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역사, 문명의 기원에 대한 본질적 사유와 탐색의 가치를 보다 깊이 주목하자는 뜻에서다. 출간도 "문명 텍스트"의 하나로 이루어졌다.
우리 사회는 당장에 일어나는 현실의 변화에만 주목한 나머지 지나간 과거를 잊기 일쑤이고 현실을 이루는 뿌리를 돌아보지 않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이런 관성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난다. 그러다 보니 "기원과 변화의 지점"에 대한 정밀한 기억과 분석의 힘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런 지적 토대 위에서는 그 다음 단계의 발전을 위해 과거의 어떤 한계를 돌파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가치를 계승해나가도록 해야 할지에 대한 문명사적 축적과 발전의 역량이 진보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가 문명의 구도를 폭넓게 이해하고, 우리의 현실에서 어떤 문명사적 진로를 잡아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담론이 부족한 까닭도 모두 이런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고든 차일드는…
▲ <인류사의 사건들>(고든 차일드 지음, 고일홍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
고든 차일드는 우리 사회에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선사 시대를 비롯해서 고대 문명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인류학자, 문화학자, 고고학자들에게는 언제나 되돌아가서 읽어야 하는 고전적 역작을 많이 낸 학자이다. 그는 1892년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으로 영국에서 공부했고, 고고학과 인류학, 역사를 전공했으며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신의 방법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온 인물이다.
그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든 차일드로서는 문명과 야만이 공존하고 있는 현실을 경험하면서 인류의 문명사적 기원과 그 발전의 경로에 대한 관심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을 테니 말이다.
유럽 문명의 선사 시대와 고대사적 기초에 대한 탐구를 정리해낸 <유럽 문명의 전개(The Dawn of European Civilization)>(1925년), 선사 시대 인류의 진화 과정을 밝혀낸 <인류사의 전개(Man Makes Himself)>(1936년) 같은 책을 통해서도 우리는 고든 차일드가 끊임없이 인간이 살아온 발자취를 추적하는 걸 볼 수 있다.
고든 차일드의 관점은 독특하다. 그는 인간이 환경의 산물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그 산물은 어떤 필연성을 가진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다양하고 여지가 많은 능력과 마주해서 생겨난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견해를 갖는다. 이런 생각이 그의 책 <인류사의 전개>의 원제를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만든다"라는 의미의
인간 진화의 특징
<인류사의 전개>에서 고든 차일드는 "환경에 고도로 전문적 적응을 한 존재들은 도리어 환경이 변화하는 순간, 멸종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관찰을 내놓는다. 가령 공룡이 사라진 것도 당시 자연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최대의 진화를 한 존재가 환경이 급속하게 달라지면서 적응 능력이 조율되지 못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육체적 발달 과정을 볼 때 환경에 대한 적응의 수준이 다른 생물체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지만, 이에 대응하는 여러 장치를 마련해오면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문명의 체계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에 다양한 변화의 여지가 많은 존재가 살아남고 역사를 발전시킨다는 견해다.
<인류사의 사건들>은 바로 이러한 관점을 보다 발전시켜, 인류의 기원사로부터 구석기, 신석기 시대를 거쳐 철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인간이 어떻게 환경에 자신을 적응시켜나가는 동시에 그 환경을 넘어서는 물리적, 정신적, 공동체적 진화를 스스로 만들어왔는가를 분석하고 정리해내고 있다. 이와 함께 고든 차일드는 인간의 물질적 진화 과정만이 아니라, 그 정신적 결과물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고 있는데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인류 집단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 버팀대이자 가치를 갖는지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고든 차일드에 따르면, 인간은 단순한 수집 또는 채집 생활에서 사냥의 시기를 지나 농경 혁명에 이르면서 단지 "자연에 기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산의 능력을 지닌 존재"로 혁명적 변화를 했으며, 이를 출발점으로 해서 도시와 문명의 연관 구조가 만들어져왔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이 바로 중근동의 고대사를 형성하고 메소포타미아 등의 문명을 만들고 이후 그리스와 로마로 연결되는 토대가 되었음을 증언한다.
전 단계 문명의 한계를 돌파하는 인간
그런데 이러한 문명사의 흐름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고든 차일드의 관점과 견해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지점은 이런 흐름에 대한 정리보다는, 그 흐름을 주도한 세력이 중심에 있는 세력이 아니라 주변부적 존재, 또는 세력 내지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있는 세력이라는 점을 강조한 대목이다. 이들이야 말로 기존의 문명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돌파하는 해결책을 절박하게 찾고 그걸 실행에 옮기는 과정을 통해 그 다음 문명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고고학과 역사의 관계를 설명하는 장으로 시작해서, 로마 제국의 문명이 끝나가면서 고대 문명의 쇠락에 대해 분석하는 장으로 마쳐진다. 애초에는 자연과의 투쟁에서 뇌와 손이 발달하고 도구를 발명하며 언어로 그 사회적 결속력을 다진 인류가 점점 더 복잡한 사회구조를 창출해내는 과정을 아주 쉽고 분명하게 묘사한다. 고든 차일드는 문명의 발전이란 어느 지점에서 문제를 해결했던 문명의 시스템이 더는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면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린다.
하지만 그는 인류가 때로 후퇴와 몰락이 있었으나 큰 줄기로 보면 진보해온 역사라고 하면서, 한번 발전한 역사는 다시는 본래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언제나 전 단계의 역사적 축적 위에 서 있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결국 우리는 전 단계의 역사적 한계와 축적에 대한 지식이 문명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힘이 되는지 절감하게 된다.
인간, 역사, 문명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필독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책의 원본은 1941년 고든 차일드의 서문이 실린 1946년 펠리컨 북(펭귄 북의 전신)의 문고판으로 미국에서는 이 해에 최초로 출간되었으니 1942년 영국에서 나온 4년 뒤다. 1930년에서 40년대 서구 지식 사회는 인류가 지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제국주의의 역사를 통해 절감하고 있던 시기로, 인류라는 보편적 존재의 기원과 그 발전의 역사에 대해 폭발적인 관심이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시기적 상황과 그 지적 요구의 출발점은 다르지만, 우리 역시도 이젠 우리의 현실이나 역사가 다른 역사 그리고 문명의 체계와 별도로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의 기원사적 연구가 오늘의 인류적 조건을 해명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있는 상황이다.
나로서는 이 책이 고등학교 이상의 연령대에게 필독서로 읽혀지기를 기대한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새로운 자료 발굴로 낡은 것이 된 대목도 있으나 고든 차일드의 관점과 분석, 그리고 그의 견해는 여전히 의미 있게 남는다. 인류가 살아온 발자취와 그 미래를 가늠하고자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그 지적 질문에 대한 시동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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