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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오역' 타령! 번역에 정답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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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오역' 타령! 번역에 정답은 없어!

[親Book] 두 가지 <픽션들>의 대화

보르헤스의 <픽션들>(송병선 옮김, 민음사 펴냄)이 세계 문학 전집의 한 권으로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 놀랐다. 기존에 출간된 책을 전집에 넣어 다시 출간하거나, 번역을 다듬어 개역판을 내거나,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한 출판사에서 기존의 번역본(<픽션들>(황병하 옮김, 민음사 펴냄))은 그대로 둔 채 다른 번역으로 병행 출판하는 일은 여간해선 보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당장 떠오르는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유유정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와 <노르웨이의 숲>(임홍빈 옮김, 문사미디어 펴냄) 정도. 그런데 보르헤스라니, 황병하 판의 빼곡한 각주와 까만 표지의 질감을 빼놓고 어떻게 보르헤스를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새로운 번역을 세상에 내놓는 역자의 변은 이렇다.

"<픽션들>이 보여 주는 허구적 이야기의 참맛, 즉 독자들의 호기심 유발, 교묘하게 구성된 서스펜스, 뜻하지 않은 결말 등 스토리텔링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번역이 요구되는 시점이라는 판단 하에 독자들의 기대 지평선의 변화에 부응하여 보르헤스 사망 25주년을 맞이한 새로운 번역본을 선보이게 되었다. 덧붙여 각주는 작품 읽기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으로 조정했음을 밝혀 둔다." (232쪽)

황병하가 옮긴 보르헤스를 읽은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본문이 다섯 줄, 각주가 스물여덟 줄인 페이지(이를테면 64쪽)와 본문이 두 줄, 각주가 서른세 줄인 페이지(심지어 65쪽)를 보면서 장르적 쾌감을 좇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과연 새로운 <픽션들>에는 각주가 많지 않고, 문장의 결도 다르다. 조금 날렵해졌다고 해야 할까. 확실히 단어 선택이나 문장 구조에 있어서 최근에 번역된 책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여전히 보르헤스고, 그의 문장이 일본 미스터리 소설들의 문장처럼 바뀌는 일(그야말로 보르헤스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작품의 뉘앙스가 달라졌을 뿐이다. 두 번역을 나란히 놓고 보면 차이는 분명하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새로운 번역본에서의 제목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의 한 부분을 역자들은 이렇게 번역했다.

나는 그 어떤 징조나 조짐도 없이 그날이 나의 무자비한 죽음의 날이 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의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한때 하이 펭의 대칭형으로 된 한 정원에서 놀던 어린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나는 죽게 된단 말인가? 그리고 나서 나는 모든 것들이 정확하게 한 사람에게, 정확하게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세기들의 시간, 그런데 단지 현재에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육지와 바다 위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 그런데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 틀림없이 안절부절 못하고 들떠 있을 그 군인이 내가 <기밀>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의심치 않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앙크르 강변에 주둔한 새로운 영국 포병대의 정확한 위치. (황병하 옮김, 147~148쪽)

나는 아무런 조짐이나 전조도 없이 그날이 내게 무자비한 죽음의 날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한때 하이펭의 대칭형 정원에서 놀던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런 다음 내 머릿속에는 모든 일이 바로 한 사람에게, 바로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태곳적부터 언제나 일어나는 일들, 그런 일들은 오로지 현재에 일어난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정말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지금 내게 일어나는 것이다……. (…) 나는 그 용사가 큰 소리로 떠들어 대면서 틀림없이 행복해하고 있을 것이며, 내가 '기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기밀'은 바로 앙크르 강변에 주둔한 새로운 영국 포병대의 정확한 위치였다. (송병선 옮김, 111~112쪽)

▲ <픽션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전체적인 문단의 속도감에서도 차이가 나지만, 세세한 부분들, 이를테면 두 번째 문장 같은 경우 두 번역이 주는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황병하의 "나의 아버지가 죽었는데도"는 조금 뜬금 없어서 독자에게 어떤 추측을 요구하지만(아버지가 화자를 위해 대신 죽기라도 한 걸까?),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라는 문장은 별 무리 없이 죽음을 앞둔 이의 탄식으로 읽히는 것이다.

특히 서로 다른 접속 부사의 사용이 눈에 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세기들의 시간, 그런데 단지 현재에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와 "태곳적부터 언제나 일어나는 일들, 그런 일들은 오로지 현재에 일어난다", 혹은 "육지와 바다 위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 그런데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와 "하늘과 땅과 바다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정말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지금 내게 일어나는 것이다"를 비교하면 차이는 분명하다. '그런데'가 사라지면서, 혹은 '그런데'가 '그리고'로 바뀌면서 전혀 다른 느낌의 문장이 된 것이다. '틀림없이 안절부절 못하고 들떠 있을' 군인과 '큰 소리로 떠들어 대면서 틀림없이 행복해하고 있을' 용사 또한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힘들다.

반면 뜻이 완전히 달라진 문장들도 존재한다. "일단 내가 죽어버리면 나를 난간 너머로 밀칠 경건한 손들 같은 것은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황병하 옮김, 131쪽)와 "내가 죽으면, 자비로운 사람들이 나를 난간 위로 던져 버릴 것이다"(송병선 옮김, 98쪽)는 정반대의 문장이다. 둘 중 하나는 오역이라는 말인데,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아마도 이전에 번역된 황병하의 것이 오역일 가능성이 크겠다. (실제로 송병선은 2007년 3월 <교수신문>의 '최고 번역본을 찾아서'라는 꼭지를 통해 황병하 본의 오역들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고 송병선의 번역이 더 좋은 번역이라고 잘라 말하기는 힘들다. 보르헤스를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번역본을 읽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이다. 하지만 황병하의 문장이 오히려 읽기 편한 경우가 종종 있고, 각주를 읽는 재미 또한 무시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낡은 문장과 단어가 만들어 내는 고색창연함이 주는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아는 보르헤스다.

▲ <픽션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어린 시절, 낡은 세계 문학 전집에서 우연히 읽게 된 고루한 번역의 셰익스피어가 그 이후의 어떤 셰익스피어보다도 셰익스피어답게 느껴지는 것처럼. 오역도 마찬가지다. 작품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수준이 아닌 한, 그것은 오히려 작품의 의미를 더욱 더 풍부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그것이 보르헤스의 작품이라면-바벨의 도서관에 비치할 또 하나의 보르헤스를 만드는 일,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정원에서 다른 길을 걸어간 보르헤스를 만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처럼.

허버트 쾌인은 로스커먼에서 죽었다. 나는 <타임스>지 문학 부록이 그에게 반 칼럼 크기의 추모 기사밖에 할애하지 않았다는 것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 기사는 부사를 이용해 모든 수식 형용사들의 뜻을 고쳐놓고 있었다(또는 엄중히 훈계를 가하고 있었다). (황병하 옮김, 116쪽)

허버트 퀘인은 로스커먼에서 죽었다. 나는 <타임스> 문학 부록에서 반 단짜리 추모 동정 기사밖에 할애하지 않았으며, 거기에 부사를 사용해 수정되거나 아니면 질책 받지 않아도 될 찬미의 표현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송병선 옮김, 88쪽)

일단 두 번역은 뜻이 다르다(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신판의 번역이 옳을 것이다(비록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내 마음을 잡아끄는 것은 황병하의 문장이다. 부사를 이용해 모든 수식 형용사들의 뜻을 고쳐놓고 있었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퍽이나(부사) 재미있는(형용사) 번역이라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에 더해 굳이 괄호를 친 후 '(엄중히 훈계를 가하고 있었다)'라고 쓰고 있는 보르헤스를 상상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라고 쓰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결국, 두 번역은 모두 장단점이 있고, 어떤 것을 좋아할지는 개인의 취향에 달려 있겠지만 함께 보면 더욱 재미있다는, 무척이나 뻔한 이야기. 맞는 말은 언제나 뻔한 법이다. 출판사의 제안에 의해 <호밀밭의 파수꾼>을 새롭게 번역, 기존의 번역본과 함께 병행 출판한 하루키도 언젠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고전이 될 만큼 뛰어난 명작은 몇 가지 다른 번역이 있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창작이 아니라 기술적인 대응의 한 형태에 불과하므로 다양한 다른 형태의 접근이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게 당연하다. 사람들은 흔히 '명번역'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것은 달리 말하면 '매우 뛰어난 하나의 대응'이라는 의미이다. 유일무이한 완벽한 번역이란 원칙적으로 있을 수도 없으며,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는 작품에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고전이라 불릴 만한 작품에는 몇 가지 얼터너티브(대안)가 필요하다. 양질의 몇 가지 선택지가 존재해 다양한 측면에서 집적하여 오리지널 텍스트의 본디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하는 것이 번역의 가장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잡문집>, 263쪽)

옳고 또 뻔한, 혹은 뻔하지만 옳은 그의 말은 어쩐지 내게 발터 벤야민의 번역론을 연상시킨다.

즉, 어떤 사기그릇의 파편들이 다시 합쳐져 완성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미세한 파편 부분들이 하나하나 이어져야 하면서 그 파편들이 서로 닮을 필요는 없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번역도 원작의 의미에 스스로를 비슷하게 만드는 대신 애정을 가지고 또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원작이 의도하는 방식에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동화시켜 원작과 번역 양자가 마치 사기그릇의 파편이 사기그릇의 일부를 이루듯이 보다 큰 언어의 파편으로 인식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번역자의 과제',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번역자의 과제 외>, 137쪽)

이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나의 그릇으로 한데 접합되어질 조각들은 서로 닮을 필요는 없지만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도 서로 맞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번역은 원작의 의미를 닮기보다는 상세한 부분까지도 애정을 기울여 원작이 지니고 있는 의미의 양식을 통합하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원작과 번역은 여러 조각들이 한 그릇의 부분인 것과 같이 보다 더 커다란 언어의 조각들로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번역자의 작업', <문예 비평과 이론>, 95쪽)

물론 이것을 오늘의 결론으로 삼기에는 약간의(사실은 엄청난) 무리가 있다. '사기그릇의 파편' 혹은 '그릇의 조각들'이라는 비유를 원작과 번역의 관계가 아니라 번역과 번역의 관계로 고쳐야 하고,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순수 언어'라는 개념과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한) 벤야민의 언어 철학을 철저하게 무시해야 하는 것이다.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 오독이지만, 이 글의 어딘가에서 나는 오역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밝혔고, 오독에 대한 입장 또한 마찬가지다.

너무 가난한 나머지 한 봉지에 2쿼트 분량의 주스를 만들게 되어 있는 쿨 에이드(설탕과 함께 물에 타서 각종 과일 맛을 내는 주스 분말)를 설탕도 없이 4쿼트 분량으로 만들어 먹는 쿨 에이드 중독자 소년의 이야기를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이런 문장으로 끝맺었다.

그 애는 자신만의 쿨 에이드 리얼리티를 만들어 내었으며, 그걸로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았다. (<미국의 송어 낚시> 30쪽)

쿨 에이드를 만드는 회사도, 쿨 에이드를 파는 가게 아저씨도, 아마도 소년의 가난한 엄마 아빠도, 소년의 그런 행동이 썩 내키진 않았겠지만, 아무려나, 소년은 그렇게 했다.

나는 당신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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