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법계에 문제가 많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한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오죽 답답하면 "검찰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관련 기사)는 글까지 썼을까.
문제가 많다는 것은 알아도 그 문제의 성격을 분명히 말하기는 힘들다. 제도의 문제일까, 운용의 문제일까? 제도의 문제라면 단편적, 부분적 문제일까, 아니면 근본적, 전체적 문제일까? 운용의 문제라면 사법부 외부의 문제일까, 내부의 문제일까?
국회의원을 한 차례 (엄청 열심히) 한 뒤 법조인으로 돌아와 있는 저자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넓고 깊은 의견을 보여줄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그는 제도 방면에서 근본적 전체적 문제를, 그리고 운용 방면에서 내부의 문제를 부각시켜 준다.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때
대한민국 대검찰청은 남한 정부의 검찰 기관으로서 법무부 밑에 운용된다. 국가를 대표하는 검찰 기관으로서 대검찰청은 대법원과 함께, 그리고 그 밑에서 일한다. 미국의 연방수사국(FBI)에 상응하는 기구로 흔히 인식된다.
[기구] 대검찰청, 고등검찰청, 지방검찰청으로 구성된다.
[논란] 2010년 하반기 이래 집권당인 한나라당은 예산 관련 문제들로 어려운 행보를 이어 오다가 심각한 부패 논란을 일으켰으며, 이로 인해 검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G20 정상 회의 포스터 사건 :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 회의를 앞두고 대학 강사 박정수가 홍보 포스터에 쥐를 그려 넣어 훼손한 사건이 있었다. 검찰이 집권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 사건에 지나친 압력을 가했음에도 법원 명령으로 그가 석방된 사실이 관심을 모았다. 쥐는 이명박 대통령의 널리 알려진 별명이기 때문이다.
시민 단체인 참여연대는 이 사건을 유엔 인권위원회 제16차 회의에 제출할 계획을 세웠다. 박정수는 후에 (법정에서) 쥐의 모습으로 대통령을 그린 것이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업이라고 자신을 변호했다. 그는 벌금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네티즌 중에서는 그의 쥐 그림을 담은 티셔츠를 판 돈으로 그 벌금을 내자는 제안이 나왔다.
이창동은 박정수의 기소를 철회해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박정수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을 겪고 보니 비록 법률에는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지만, 현실로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정권이 통제하고 있음을 느낀다." (…)
그 뒤를 이어 노무현, 박원순, 한명숙에 대한 정치 사찰 등 남부끄러운 내용이 실려 있다. 2011년 11월 25일 15:43분에 최종 수정되었다는 이 기사의 평가 란에 들어가 신뢰성에 만점을 주고, 객관성, 완결성, 작품성의 세 항목에는 중간 점수를 줬다. 잘 쓴 글은 아니지만 내용에 착오는 별로 없으니까. 누군가 더 좋은 글로 바꿔 올려주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전 세계 독자들에게 우리 검찰의 이런 꼴을 보여주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 <위험한 권력>(최재천 지음, 유리창 펴냄). ⓒ유리창 |
최재천의 책이 고마운 것은 이런 드러난 문제의 바닥에 깔려있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을 보여주는 데 있다. 인사이더 관점에서의 자기비판 시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 점에서는 체계적인 논설보다 수필집의 성격이 저자의 생각을 알뜰하게 표출하는 데 적합한 것 같기도 하다.
판검사만이 아니라 변호사까지 포함한 '법조인'의 자격에 대한 반성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느껴진다.
영미법계에서는 법이 상식이기 때문에 법이 법전 속에 잠들지 않는다. 모든 시민이 법을 이해할 수 있고, 훌륭한 법률가가 될 수 있다. 형사 사건의 배심원이 되어 유무죄를 판단하는 일은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고, 조금만 훈련하면 전공에 상관없이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다. 미국에서 법률가는 흔한 직업이고, 모든 사람이 로스쿨에 갈 수 있다.
하지만 일본, 한국 등 대륙법계에서 법은 특수하고도 비밀스러운 영역이다. 아무나 법률가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성적으로 선발된 학생들 중에서 또다시 선발을 거쳐 비로소 쟁취할 수 있는 직업이 대한민국 법률가요, 검사다. (62~63쪽)
국가와 사회에 책임을 가지는 '공직' 취임에는 그에 상응한 기준, 절차와 방법이 있다. 대표성이 강한 공직은 선거를 거치고, 기능성이 강한 공직에는 청문회 등 절차가 따른다. 법관과 검사의 임명에도 나름대로 기준, 절차와 방법이 있지만, 비슷한 무게의 책임을 가진 입법부와 행정부의 직책에 비하면 기준은 너무나 단순하고 절차와 방법은 너무나 간소하다. 고시와 연수원의 성적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시험과 연수의 성적은 국민의 복리를 대변하는 대표성보다 체제 유지에 효율적으로 공헌하는 기능성을 말해주는 지표다. 고시와 연수원을 거친 한국 법조인이 가진 엘리트의식은 이 기능성에 대한 자부심일 뿐이다.
물론 기능성도 사법 제도 운영에서 중요한 요소다. 법조인이 정치적 고려 없이 기능성만으로 사법 제도 운영에 전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가 한국에 늘어나고 있다. 정치권에서 정치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검찰과 법원을 정치에 이용하려는 추세를 말하는 것이다(99~102쪽).
이 추세에 대응해서 국가 체제의 안정에 공헌하는 것이 사법계(법원-검찰)에 필요한 역할이다. 검찰이 이 역할에 거꾸로 가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근년 들어서는 법원마저 그 뒤를 따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헌법재판관들이 '관습 헌법'이란 것을 저희들끼리 제정해 내는 것이나 신영철이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며 그 자들의 개인적 도덕성을 많은 사람들이 의심했다. 합당한 의심이다. 그런데 그런 '행태'가 확산되고 있는 데는 개인적 도덕성을 넘어서는 제도의 문제와 운용의 문제들이 있다. 최재천의 책은 그런 문제들에 관해 많은 설명을 해준다.
저자가 제기한 문제들 중 마음에 크게 남는 하나가 사법부(내지 사법계)의 '독립성'에 관한 것이다. 그는 사법부의 독립이 '공정성'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카를로 과르니에리의 말을 인용한다(30쪽). 헌법재판소가 미디어 법 의결 절차의 하자를 인정하면서도 무효를 판결하지 않은 일이 생각난다. 입법부의 독립성을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종합편성채널 4사까지 만들어졌다. 독립성이 아니라 '독점성'의 추구일 뿐이라는 저자의 표현이 너무나 정확하다.
책을 덮어놓고 '권력'과 '권위'의 차이를 생각해본다. 법원과 판사의 권위는 법정 모독죄 등의 장치를 통해 삼엄한 보호를 받는다. 검찰과 검사의 권위는 그와 같은 제도적 보호는 아니라도 관습에 의해 그에 버금가는 보호를 받는다. 사법 제도의 사명이 사회의 안정성을 지키는 데 있기 때문에 그 권위를 보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독립성을 빙자해서 독점성을 추구한다면 독점의 대상이 무엇인가? 권력과 이익이다. 권력과 이익의 독점적 추구는 사회의 안정성을 해치는 짓이다. 그렇다면 그 권위는 "보호할 가치가 없는" 권위가 되는 것이다.
검찰 권력의 도덕성은 시녀 정도를 넘어 창녀 수준으로 치달리고 있다. 자정 능력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그 타락을 억제하고자 국가와 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개입할 것은 불가피한 일이거니와, 제일 먼저 주목되는 것이 법원의 역할이다. 법원은 그 동안 한편으로 검찰의 뒤를 따라 타락하는 추세도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검찰의 타락을 견제하는 자세도 보여 왔기 때문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대한민국 사법권 침해 여부를 검증하자는 움직임이 법원에서 일어난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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