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주요 내용은 노무현 정부 시절에 검찰을 나름대로 개혁하고자 했지만 조직의 저항이 거세서 실패로 돌아간 사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내용들은 사료로서 가치가 있을 듯하고, 장차 개혁적인 정부가 들어섰을 때 검찰을 비롯해서 관료제 전반을 어떻게 대접해야 할 것인지를 고려할 때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점에서 이런 책이 나온 것은 어느 모로 보든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노무현 정부 때 검찰 개혁에 관해 과연 어떤 종합적이며 구체적인 청사진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저자들도 이를 약간은 인정하고 있지만, 지금의 시점에서도 검찰 개혁에 관해 저자들이 가지고 있는 구상들은 불충분해 보인다.
우선 수사권 조정 문제를 살펴본다.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가지는 것을 문제라고 보는 데까지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권 독점을 깨기 위해서 경찰에게 수사권을 주는 것이 유일한 방안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예컨대 노동위원회, 소청심사위원회, 고충처리위원회, 인권위원회,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 금융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교육위원회 등 온갖 종류의 위원회들이 있다. 이 모든 위원회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해당 사안의 진상을 조사해야 할 직무상의 필요가 발생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의 어휘로 이런 위원회에도 "수사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공감할 사람은 물론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사"가 아니라면 적어도 직무상 필요한 만큼 조사할 권한은 있어야 하는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 이들 위원회는 어느 정도 조사를 시행하고 있다.
단, 조사를 받아야 할 상대가 조사에 불응할 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위원회에 맞설 만한 권력이나 연고 자원을 보유한 상대가 조사에 불응할 때, 조사가 흐지부지되어버리는 문제가 도처에 만연한 상태다. 이럴 때 쉽게 동원되는 핑계가 "수사권이 없기 때문"이라는 상투적인 문구인 것이다.
"수사"라는 것이 단순히 누군가를 찍어서 족치기 위해 체포해서 구속하고 협박하고 고문하는 작업이라면 이런 수사권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검찰도 경찰도 가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이 만약 주어진 사안의 진상을 파고들어 확인하는 작업이라면 모든 위원회에게 수사의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 수사 받는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될 테니까, 수사의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고 수사의 절차가 법에 의해서 엄격하게 통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사권 문제는 검찰 또는 경찰이라고 하는 특정 관료 집단 사이에서 어떻게 나눠줄 것이냐는 방향이 아니라, 문제되는 사안의 진상을 밝히는 데에는 모든 시민이 협조해야 할 의무를 강조하는 한편, 수사의 주체가 수사 받는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
▲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문재인·김인회 지음, 오월의봄 펴냄). ⓒ오월의봄 |
이는 물론 제도의 개혁만이 아니라 문화와 의식의 개혁까지 수반되는 과제다. 그러므로 모든 위원회에게 수사권을 허용하기에 앞서서, 일단 국회의 국정조사위원회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에게는 누구든지 수사할 수 있도록 관계 법률을 개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한다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는 따로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검찰의 인권 침해가 문제되는 경우에는 인권위원회에서, 검찰의 여타 비리가 문제되는 경우에는 기존의 특별 검사 제도 및 국회의 국정 조사를 통해 진상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권위원회와 국회가 증인에 대한 소환장 및 구인장을 실질적으로 발부할 수 있도록 하고, 이런 영장이 부당하게 발부되었을 때에는 법원에 피해의 구제를 요청한다면 견제의 원리는 충족된다.
아울러 경찰에게 수사권을 주는 문제 역시, 단순히 수사권만 주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판사로부터 직접 수사 절차를 통제받도록 하는 것이 진상 확인이라는 사회적 필요와 피의자의 인권 보호라는 개인적 필요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방법이다.
다음으로 저자들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주제에 관해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저자들은 노무현 정부에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너무 중시한 것이 개혁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원인 중의 하나라고 보는 듯하다(368~371쪽). 그러면서도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중요한 시대적 과제 중 하나로 본다(92~93쪽). 나는 여기서 정치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저자들의 혼란한 심사를 목격한다.
이러한 혼란은 한편으로 검찰의 전면 독립 주장을 위험하다고(65~67쪽) 보면서, 동시에 정치적 중립은 필요하다고 보는 태도에서도 엿보인다. 아울러 절차적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직접 행동주의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기득권자들의 기득권 지키기와 억압자들의 피억압자에 대한 집단적 대응은 인정하지 못하는(83~84쪽) 태도에서도 엿보인다.
이와 같은 혼란은, 내 나름대로 진단해보면, 법의 영역이 기본적으로 정치 안에 속하지 정치 바깥에 놓일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때문일 것이다. 민주 사회에서 법이란 근본적으로 구성원들 사이의 합의이고, 따라서 그것은 정치 사회의 합의, 즉 정치적 합의에 해당한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정치"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이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개인들 또는 집단들 사이의 이권 투쟁을 가리킬 때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치 본연의 의미가 그렇기 때문은 아니고, 오히려 과거 한국에 사회적 협동이라는 의미의 정치는 없고 권력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군부를 비롯한 지배 집단의 권력 행사와 거기에 대칭되는 반대파의 저항이라고 하는 야만적인 정치만이 있었고, 정치 사회의 공동 기획이라는 차원의 정치는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법이라도 정치에서 중립적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로 생겼고, 그 또한 쉽게 배신당하는 경험들이 누적되다 보니, 한편으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바라면서 바로 그 뒤에서는 정치적 중립으로 뭐가 나아질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경찰관, 검찰관, 재판관이 피의자의 정치적 성향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경찰관, 검찰관, 재판관이 자신의 파당적 이해관계에 따라 직무를 수행해도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들이 어떻게 직무를 수행하더라도 거기에 정치적인 의미가 없어질 수는 없다.
절도범을 끝까지 추적해서 처벌한다면, 도둑질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정치적 가치가 실현된다. 공직자나 재벌의 비리를 샅샅이 수사해서 밝혀낸다면, 공직의 권위나 자본의 권력이 남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정치적 가치가 실현된다. 수도 이전이나 표현의 자유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까지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훨씬 일상적인 범죄의 수사와 재판까지도 모두 자체로 고도의 정치적 함의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항들을 제대로 담아서 표현하기에 "정치적 중립"이라는 용어는 전혀 적절하지 않다.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들은 모두 파당적 이해관계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정치 사회의 기본적 합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는 모두 정치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한편으로는 구분하는 경계선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서로 이어주는 연결선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인다. 검찰 개혁의 필요성을 널리 전파한다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의 출간을 환영하고, 독자들의 일독을 적극 권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법치주의를 확립하는 문제는 이 책에서 표명되고 있는 수준보다는 훨씬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요구하는 과제일 것이다.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고안해내기 위해서는 상당히 깊은 수준의 법철학적·정치철학적 탐구가 필요할 텐데, 이 책에서는 그런 흔적이 조금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예컨대, 저자들은 독일과 일본의 군국주의 법학이 우리 검찰제의 뿌리임을 반복적으로 지적하면서 비판한다. 그러면서도 한국이 대륙법 체계라는 점을 필요 이상으로 부각한다. 대륙법 체계라고 하는 독일과 프랑스의 법철학과 사법 제도에 오늘날 보통법 체계의 요소들이 얼마나 스며들어가 있는지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대륙법 체계"의 "성문법주의"를 강조하더라도, 개별적 사건에서 성문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는 문제는 성문법에 의해 연역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 독일이든 프랑스든 일본이든 한국이든 이미 판례법의 중요성은 어떤 의미에서 성문법을 능가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수많은 성문법 규정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 또 수많은 판례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때, 일차적인 판단의 주체는 사법 공무원들일 수밖에 없다. 이렇다고 보면, 사법 개혁의 문제는 법조인 충원이라는 문제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다른 전공은 접어두더라도 당장 법학 교수라 할지라도 사법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면 법관으로 임용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해서도 뭔가 발언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근본적인 사법 개혁은 너무나 큰 문제일 테니까 접어두자. 저자들이 제시하는 정도의 검찰 개혁만을 추구하고자 해도 단순히 선거에서 승리해서 국회 다수 의석이나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개혁 주체들의 통일된 인식이 부족했다는(374~375쪽) 진단은 이 점을 건드리고는 있지만, 근원을 찌르지는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검찰을 개혁한다는 과제는 집권한 다음에 무슨 위원회를 구성해서 청사진을 마련하는 방식으로는 거의 무망하기 때문이다.
선거에 임할 당시에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마련해서 공약으로 제시하지 않으면 어떤 정권도 4년 내지 5년 정도의 기간에 개혁을 성사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검찰 조직은 저자들도 강조하고 있듯이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자체의 구조와 문화를 발전시킨 강고한 집단이다. 이런 조직의 문화와 구조를 일부분만이라도 변경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설계도에 대한 주권적인 승인이 선행해야 한다. 그래야 4~5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 조직적 저항을 누르고 개혁을 추동할 힘이 생긴다.
이 모든 얘기들을 두 사람의 저자에게 다 요구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리일 수 있다. <검찰을 생각한다>가 우리 사회의 모든 깨어있는 시민에게 검찰 개혁이라는 화두를 진지하게 제기하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한 공론이 일어나서 2012년 선거를 앞두고는, 근본적이든 아니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정도에 그치든, 검찰 개혁을 위한 분명한 청사진이 구체적으로 마련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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