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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철학자? 웃기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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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철학자? 웃기고 있네!

[철학자의 서재] 피에르 부르디외의 <나는 철학자다>

'나가수'를 읽는 두 가지 방식

2011년을 뜨겁게 달군 음악 프로그램을 꼽으라면 분명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나가수)를 빼고 이야기할 순 없을 게다. '나는 가수다'라는 방송 문구가 여러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패러디되는 걸 보면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나만 가수다'(임재범의 노래를 듣고 대중들이 붙인 별명?), '나름 가수다'(무한도전), '나는 꼼수다'까지, 심지어 어느 노래 주점의 이름도 '나도 가수다'이다.

대중음악이지만 그래도 나름 예술의 영역인데 그곳에 서바이벌이라는 잔인한 경쟁 양식을 도입하려 한다는 식의 비판들이 이어졌지만, 그건 잠깐일 뿐 오히려 <나가수> 프로그램은 3월 13일에 방영된 이후 무려 8개월에 걸쳐 10기 가수들로 이어질 정도로 여전히 큰 대중적 호응을 얻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나가수>를 보며 출연 가수들의 가창력과 음악적 진정성에 열광하는 동시에 자신들 안에 잠자던 '가수의 꿈'도 한 번쯤은 돌이켜 볼 것이다. 말하자면 "그래 진짜 가수란 저런 거였지!", "나도 한 때는 저런 가수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라는 식으로 우리들에게 그 꿈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대리 만족도 제공해 주는 프로그램인 셈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기능을 교묘하게 잘 활용할 줄 아는 방송 전략이 잘 먹혀들었기에 '나가수'가 이런 인기를 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대체 진짜 가수란, 제대로 된 가수란 어떤 사람일까? 가창력이 뛰어난 사람? 우리들의 음악적 감수성을 자극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렇다면 래퍼는? 또 가창력은 별로지만 속삭이듯, 때로는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사람은 가수가 아닐까? 대체 진정한 가수의 기준은 뭘까?

어쩌면 노래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가수인 건 아닐까? 더구나 노래를 직업으로 삼아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고 지금 어느 곳에선가 노래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가수이지 않을까? 물론 잘나가는 가수와 무명 가수라는 현실적인 구분과 위계는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이렇듯 '나만 가수다'와 '나도 가수다'라는 인식 사이에 분명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겠지만 그럼에도 그 격차는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가수>의 그 노래 잘하는 프로 가수들도 가수지만 무명으로 밤무대를 전전하는 가수들도 모두 가수라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물론 인기와 그 인기에 뒤따르는 대가의 격차가 엄청나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심지어 일반인들이 노래주점에서 '나도 가수다'라고 외친다 해도 그리 주제넘은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하지만 이에 비해 '나도 철학자다!'라든가 '나도 정치가다!'라고 외치는 경우는 어떨까?

<나는 철학자다>를 읽는 두 가지 방식

지금처럼 <나가수> 프로그램이 유행하기 훨씬 이전에 '나는 가수다'라는 문구의 원조(?)라고 할 만큼 유사한 제목으로 출간된 책이 있다. <나는 철학자다>(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김문수 옮김, 이매진 펴냄)!

물론 원제목은 전혀 다르다. <하이데거의 정치 존재론(L'Ontologie politique de Martin Heidegger>(1988년)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부르디외의 책을 우리말 제목으로 새롭게 바꿔 출판한 셈이다. 물론 어떤 이유에서 이런 제목으로 번역하게 되었는지 그 자세한 내막은 전혀 모른다. 하지만 제목을 뽑아낸 그 순발력과 아이디어만큼은 압권인 듯하다. '나는 철학자다!', 그것도 '진정한 철학자다!'라고 외치는 하이데거의 모습을 한마디로 잘 드러내준 제목이라고나 할까?

▲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 ⓒwikigender.org

이 책을 통해 부르디외는 흔히 순수 철학의 대가라고 여겨지는 하이데거의 철학이 사실은 당시의 정치적 보수주의와 결합되면서 형성된 정치적 철학(정치적 존재론)에 불과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한마디로 하이데거가 나치 독일 당시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에 취임했던 일이나 이후에 그런 식으로 나치에 참여했던 과거 자신의 행적에 대한 참회마저 거부했던 모습도 단지 철학자 개인의 우연적 실수이거나 잘못된 정치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 이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역설한 셈이다.

물론 부르디외의 이러한 주장이 단순히 하이데거의 전기적 사실을 뒤져서 그 과거를 낱낱이 밝히는 폭로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은 아니다. 반대로 단지 하이데거의 저작들을 세밀하게 분석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부르디외는 하이데거의 저작을 하이데거의 정치적 행적이나 정치 상황으로 곧바로 환원시켜 비방하는 환원주의적 독해나 하이데거의 정치적 행적과 하이데거의 사유를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는 내적인 독해 모두 거부한다.

"나치와 가깝다는 이유로 하이데거 철학을 비난하는 비방자든, 나치 참여와 하이데거 철학을 분리시키는 찬양자든 다음과 같은 점을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곧 하이데거의 철학이란 철학적 생산장(場)이 강요하는 특수한 검열 때문에, 하이데거를 나치즘에 밀착하게 했던 정치적-윤리적 원리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는 점 말이다." (14~15쪽, 강조는 부르디외)

말하자면 하이데거 자신이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그 역시도 당시의 철학적 생산장(독일 대학, 선후배로 이루어진 철학 지식인 사회, 하이데거 자신의 사회적 지위, 이로 인해 형성된 하이데거 자신의 아비투스 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관계망)의 한계 안에서 나름의 정치적 입장을 수용하면서 이를 철학적 이론으로 순화시켰을 뿐이기 때문에 하이데거의 철학을 정말이지 순진하게 순수한 철학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부르디외는 하이데거가 자신의 철학을 생산해내는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가 그 당시 민주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양자에 대해 문제 제기하면서 극복을 외치던 독일의 보수 혁명가들(특히 융거)로부터 정치적 입장들을 어떤 식으로 수용하고 어떤 식으로 철학적으로 순화시켜냈는지, 또 근대성과 기술 문명에 대한 혐오와 동시에 민족적이고 농민적인 고향에 대한 향수가 어떤 식으로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표현되는지, 더구나 지식인 사회에서 "시골 소부르주아 출신의 평교수"(88쪽)로서 선배 철학자들뿐 아니라 전통 철학과 대결하면서 새로운 지위를 점하기 위해 그야말로 정치적인 노력(?)을 수행하면서 과연 어떤 식으로 정치적 존재론을 확립해갔는지를 분석한다.

결국 부르디외의 주장은 학문적으로 순수한 '존재론'이란 단지 철학과 철학자들이 만들어내는 가상일 뿐 모든 존재론도 '정치적 존재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이데거의 철학도 철저하게 순수한 철학인 듯이 자신을 포장할 뿐이며 또 그러한 포장을 통해 하이데거 자신이 마치 진정한 철학자라는 듯이 뽐낸다는 것이다.

철학자의 자기 인식과 정치

부르디외의 이러한 지적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되새기게 해준다. 우선 철학자도 역시 순수할 수 없으며, 기본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 말이다. 또 그럼에도 하이데거는 이러한 자신의 정치적 상황을 애써 부정하고, 자기 철학의 순수성을 확보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만이 제대로 된 철학자라는 생각에 빠져들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게 한다.

물론 "나만이 철학자다!"라는 선언은 그의 저작 속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철학이란 용어 대신 '사유'라 말하고, 철학자 대신 '뎅커(Denker)'라는 용어를 강조하는 그 이면에 자신은 진정한 사유를 수행하는 제대로 된 철학자인 '뎅커다!'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고 추측할 뿐이다. 어쩌면 스스로 '나만 철학자다'라고 외치는 철학이 얼마나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하이데거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만 철학자다', 좀 더 완곡하게 바꾸면 '나는 철학자다'라는 이 외침은 지식인과 일반인, 철학자와 일반인, 진정한 철학자와 소박한 철학자, 뎅커와 일반 철학자, 철학 교수와 철학 강사 등등의 위계로 계속해서 재생산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나도 철학자다'라고 말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심지어 우리는 철학과 교수임에도 스스로 '나는 철학자다'라고 외치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왜? 나는 '하이데거 같은 사유의 대가'는 아니니까! 하지만 왜 그래야 할까? 당당하게 '나도 가수다'라는 식으로 왜 "나도 철학자다!"라고 외치지 못하는 걸까?

가수는 노래하는 사람이다. 노동자는 정신 노동이든 육체노동이든 노동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철학자는?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철학자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철학을 공부하는 나는 왜 '나는 철학자다'라고 외치지 못할까? 이상한 자기인식이다. 철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아직은 철학자가 아니다. 왜 아직은 사유의 대가가 아니니까? 이처럼 '나는 가수다', '나는 노동자다'라는 자기 인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철학자들의 자기 인식을 어떻게 봐야 할까?

아마도 '나만 철학자다'와 '나도 철학자다'의 그 간극이 현실에서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우리 솔직해지자. 우리도 '나는 철학자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당신도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면 철학자다. 그것은 마치 가수가 노래하는 사람이듯이 그냥 그러한 자기 인식의 표현일 뿐이다.

다만 좀 더 중요한 인식이 있다. 내가 철학을 공부하는 철학자이지만, 과연 자신이 생활 속에서 무엇으로 먹고 사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 신념을 표출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시간 강사다. 일용직으로 분류되는 비정규직 교수 노동자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철학자다. 바로 이런 면에서 '나도 철학자다!'

철학 자체의 순수성이란 없다. 철학자의 순수성이란 것도 없다. 이런 식의 '철학', '철학자'라는 기호는 '사상가', '뎅커'라는 기호만큼이나 공허하면서도 지나치게 환상적인 개념일 것이다. 그 어느 철학자든 자신이 속한 지식인 그룹이나 특히 직업에 따라, 또 그에 따라 복잡한 형태로 갖추게 된 정치적 신념에 따라 구체적인 어떤 철학자만이 있을 뿐이다.

이제 이런 자기 인식을 기반으로 '나도 철학자다'라고 외치자.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정치적이라는 점도 기억한다면, '나도 정치가이다'라고 외치자. 전문가 정치인들만이 밀실에서 비공개로 정말로 무식하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날치기하는 이러한 얼빠진 정치 상황에서 그들만이 정치가는 아니라고 외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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