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배용준, 장근석? 일본이 감동한 진짜 '배우'는?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배용준, 장근석? 일본이 감동한 진짜 '배우'는?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 '안성기 평전' 낸 무라야마 도시오

역사에 버림 받은 조선 노동당 유격대와 함께 하는 종군 기자, 대학생·창녀와 함께 '고래'를 찾아 나서는 거렁뱅이, 한물 간 가수를 위해 김밥을 팔며 뒷바라지하는 매니저…. 1957년 아역으로 출연한 <황혼열차>부터 이듬해 개봉을 앞둔 <부러진 화살>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성격과 직업을 가져 본 남자가 있다. 배우 안성기(59).

안성기의 필모그래피는 한국 현대사, 한국 영화사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대를 고민하던 감독이 검열과 음모에 고투하던 1980년대에는 스크린 속 투사가 되었고, 오락적 요소가 강조되기 시작한 1990년대엔 부드럽고 코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0년대엔 근엄한 대통령부터 자상한 아버지까지, 한국 사람들이 갈망하는 아이콘이 되고 있다. 그 배역들은 모두 안성기였으며 동시에 안성기가 아니었다. 이름 석 자의 존재감을 과시하면서도 천의 얼굴을 보여준다.

지난 4월 일본에서 안성기의 일대기를 정리한 책이 나왔다. 얼마 전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권남희 옮김, 사월의책 펴냄)라는 제목으로 한국에도 소개됐다. 저자는 그저 한국이 좋고 안성기가 좋아 처음 책 쓰기에 도전했다는 한국어 교실 '녹두학원' 대표, 무라야마 도시오(村山俊夫, 58) 씨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그는 1980년대부터 지바(千葉)한국어 도서자료실을 차렸고, 1987년 6월 항쟁의 역사적 순간에는 서울에서 한국인과 함께 있었다.

한국어판 출간을 맞아 내한한 무라야마 씨와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팔판동 '사월의책' 사무실에서 만났다. 겉보기엔 평범한 '아저씨'이지만 한국 영화 이야기엔 소년 같은 눈을 빛냈다. "청춘이 아니라도 좋은" 무라야마 씨와 나눈 이야기이다. <편집자>


일본 남자, 안성기에 반하다


▲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무라야마 도시오 지음, 권남희 옮김, 사월의책 펴냄). ⓒ사월의책

프레시안 :
일본에서 안성기에 대한 책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의아했습니다.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소위 '한류 스타'도 아니고, 사생활 면에서 엄청나게 흥미로운 스토리를 가진 사람도 아닌 무난한 배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감사한 마음부터 들더군요. '우리도 이런 배우를 갖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외국인을 통해 받은 기분이 신선했습니다. 왜 많은 배우 가운데 한국 배우, 그것도 안성기에 대해 쓰셨는지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무라야마 :대학 시절부터 한국이 좋아 스물일곱 살 때부터 한국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때(1980년대)만 해도 일본에 한국어를 가르치는 공간이 별로 없었죠. 그래서 직접 도쿄 근교에 자그마한 교실을 열고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스스로 너무 실력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서른을 넘은 시점에, 한국 유학을 가기로 일대 결심을 했죠.

1986년 한국에 와서 대학 부설 어학원에 다니던 무렵, 만화 대여점에서 우연히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접했습니다. 푹 빠져들었죠. 그길로 동명의 영화를 봤는데 그게 저와 한국 영화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때 저에겐 청춘 스타 최재성보다 낙오자에게 지옥 훈련을 시키는 감독의 날카로운 눈빛이 더 기억에 남더군요. 굉장히 매력적이었습니다. 그게 안성기 씨였어요.

일본에 돌아와서, 1994년 도쿄 국제 영화제 교토 대회에서 통역 일을 맡게 되었어요. 안성기 씨가 심사위원 자격으로 영화제에 참석해 처음 실제로 뵙게 됐습니다. 통역과 관광 가이드 일을 하면서 10년간 1만 명 가까운 한국 사람들을 만났는데, 영화배우는 처음이었습니다. 설레는 한편 긴장도 했죠. 그런데 아주 편안하게 대해주시더군요. 영화제 기간 동안 저 말고도 일본의 영화계 사람들 모두 안성기 씨에게 감동을 받았어요.

그전엔 그의 영화에 대해 잘 몰랐지만, 관심이 생겼고 출연작을 줄줄이 보게 되었습니다. 작품들을 보다보니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광주 민주화 항쟁, 그 속의 밑바닥 시민의 모습 등 한국 현대사의 면면을 반영하고 있더라고요. 인품도 훌륭하지만, 안성기를 통해서라면 좀 더 흥미를 가지고 한국 현대사를 바라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걸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프레시안 : 그런 관심을 가졌어도, 결국 책으로까지 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집필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무라야마 : 교토에 있는 리츠메이칸(立命館) 대학교에서 1년에 한 번 한국 배우를 한 명 선정해 출연한 영화를 틀고, 초청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가 있습니다. 2008년 3회째 손님이 안성기 씨였습니다. 교토에서 다시 안성기 씨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정말 반가웠죠.

안성기 씨는 제가 14년 전 영화제 통역을 맡았었다는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웃음) 저 스스로는 아주 특별한 인연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성기에 대한 책을 한 번 쓰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시더군요. 그때부터 올해 4월까지 2년 반 동안 책을 썼습니다.

프레시안 : 한국에선 '국민 배우'이지만 일본에선 그 이름이 익숙지 않은 분들도 많을 텐데요. 이 책, 일본 독자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무라야마 : 안성기 씨와 연배가 비슷하거나 그가 출연한 영화를 주의 깊게 본 분들은 반갑고 고맙게 여겨주셨습니다. 또 2000년대 이후 한류 붐을 통해서만 한국의 모습을 알게 된 분들은 한국에 이런 대배우가 있었다는 사실, 지금의 한국 영화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좋았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프레시안 : 책이 이 배우의 나라에서 소개되니, 감회도 남다를 것 같습니다. <안성기-한국 '국민 배우'의 초상(アン・ソンギ 韓国「国民俳優」の肖像)>이란 원제에서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로 제목이 바뀌었는데 마음에 드시나요?

무라야마 : 한국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하고, 떨립니다. 제목은 그저께(17일) 한국 와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솔직히 어떤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지 제대로 이해를 못 했어요. (웃음) 하지만 번역된 책을 읽으면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안성기 씨 본인은 이 제목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고 하시더라고요.

▲ 무라야마 도시오 씨 ⓒ프레시안(최형락)

안성기를 보면, 한국 현대사가 보인다?

프레시안 : 무라야마 씨 이야기대로 안성기 씨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남부군>, <하얀 전쟁>, <그 섬에 가고 싶다>, <태백산맥>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다룬 작품이 많습니다. 게다가 한 나라의 영화 산업 자체가 국가의 정책이나 관객의 욕구를 반영해 움직이다 보니, 50년 동안 배우를 한 안성기의 일생이 자연스레 '현대 한국 약사(略史)'가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책에서도 그 시대 분위기를 알 수 있도록 역사 서술에 무게를 실었는데요. 굉장히 균형이 있으면서도, 어두웠던 현대사에 대한 문제의식도 엿보여서 놀랐습니다. 왜 한국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무라야마 : 저는 1953년생입니다. 저희 세대는 태평양 전쟁을 겪었던 아버지 세대나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젊은 세대하고는 사고방식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사회 문제나 그로 인한 그늘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를 고민했던 세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예전부터 깊었죠.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한일 관계는 식민 지배 당시와 그 이후의 관계일 겁니다. 거기서 청산되지 않은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그 이후 일어난 한국 전쟁에 있어서도 일본은 고통 분담자가 아니라 수혜자였지요. 한일 국교 정상화도 그저 일본 기업에만 득이 되었고요. 이런 (착취적인) 관계에 대해서 우리 세대 사람은 비판적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저 역시 전후의 한일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요.

그 중에서도 저는 한국의 민중 문화에 끌렸습니다. 민요, 탈춤, 판소리처럼 서민의 감정이나 생활이 반영되어 있는, 권력층을 풍자하는 문화와 그 힘이 좋았습니다. 물론 일본의 가부키 역시 무사 정권 시대 권력층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서민층과 괴리가 있는 고급 문화가 되어버렸으니까요.

1986~1987년 서울로 어학 연수를 왔을 때, 고려대학교의 민요연구회나 농악대 등 동아리를 통해 실제로 그런 활동을 해봤습니다. 역시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몸으로 체험하는 게 즐겁더라고요. 그런 부분도 일본에 다소 알려지긴 했는데, 아직까진 모자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프레시안 : 그래서 문화적인 측면, 영화(배우)를 통해서 한국을 알리기로 생각하신 거군요.

ⓒ프레시안(최형락)
무라야마 :
그런 셈입니다. 일본인이 한국에 관심을 갖는 데에 최근의 한류 붐이 좋은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어요. 하지만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아이돌이나 드라마는 한국인의 실생활을 보여준다기보다 일본 시청자의 구미에 맞게 포장되는 면이 있으니까요. 너무 그쪽으로 편중되지 않도록 한국을 제대로 보게끔 돕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프레시안 : 책에서는 1950년대 이후 한국 영화가 걸어온 길도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한국 전쟁 이후 충무로를 중심으로 영화인이 모이기 시작했고, 1960년대 황금기를 맞았다가, 군부 독재 시절 검열과 3S(Sex, Sports, Screen) 정책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낸 이후, 1990년대 현재의 제작 시스템이 마련되었습니다. 멀티플렉스가 생겨나고 '관객 1000만 시대'도 도래했지만, 스크린쿼터가 축소되고 제작-배급이 수직 통합되면서 그 그늘도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양상을 전후 일본 영화의 흐름과 비교한다면 어떻습니까.

무라야마 : 사실 한국 영화를 본 만큼 일본 영화를 보지 못했습니다. (웃음) 그리고 책에 그렇게 쓰긴 했지만, 제가 한국이나 일본 영화의 전체적 흐름을 잘 안다고 할 수도 없고요. 다만 한국 영화의 흐름은 안성기 씨의 영화 인생과 상당히 겹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출연한 영화를 늘어놓으면 역사의 흐름 역시 저절로 알게 되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그가 굵직한 역사를 다룬 드라마나, 사회적 의식이 있는 감독들의 참여적인 영화에 많이 출연했기 때문일 겁니다. 일본에도 물론 그런 시도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같은 감독처럼 사회 변혁이라는 시각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굉장히 짧은 시기에 끝나버렸지요.

그 이후로는 거의 오락적, 상업적인 영화만이 대세를 차지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2008년에 죽음과 장의사의 이야기를 담은 다키타 요지로 감독의 <굿' 바이>(おくりびと, 다키타 요지로)라는 영화가 일본에서도, 외국에서도 굉장히 호평을 받았는데요. 저는 이 작품이 죽음에 대한 일본인의 시각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죽음이란 물론 개인적인 것이고 주변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만, (이 영화는) 그걸로 끝입니다. 거기에 어떤 사회적인 의미를 찾고 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의 죽음일지라도 사회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한국 영화 역시 1990년대 이후 개인주의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회하고 연결된 사람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여전히 나오고 있는 한국 전쟁이나 남북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렇죠. 일본 역시 태평양 전쟁 당시를 다룬 영화들이 많이 나오지만, '그때 전쟁에 나간 젊은이들은 그저 피해자다, 비극이었다'는 식의 반전 메시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안성기 씨는 사회 참여적인 영화에 많이 출연하셨지만, 현실에서는 직접 발언을 아껴왔습니다.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무라야마 : 그가 직접 얘기하기도 했지만, 배우이기 때문에 영화를 통해서만, 영화의 언어로만 말을 해야 한다는 신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철저한 점이 존경스럽습니다. 누구나 다 자기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있는데 거기에 충실히 산다는 것이 부럽기도 합니다.

프레시안 : 한국에선 최근 '소셜테이너'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발언, 활동을 하는 연예인을 말합니다. 영화배우 중엔 문성근 씨, 김여진 씨 등이 있는데요. 안성기 씨가 견지하는 태도와는 다른 면이 있는데,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무라야마 : 흔히 "OO이기 전에 인간이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배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누구나 당연히 사회적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나름대로 표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억제하는 게 부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사실 일본에는 그런 배우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올해 3월 동일본 대지진 이후 핵발전소에 대해 비판 발언을 하는 야마모토 타로(山本太郎)라는 배우 한 명뿐인 듯합니다. 그렇게 보면 (의견을 강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한국 사람들의 특성 중 하나 아닌가 싶어요. 술자리에서 늘 정치 이야기를 하는데, 일본에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웃음) 그런 뜨거운 면이 또 매력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의 인디아나 존스? 다정한 아버지?

프레시안 : 안성기 씨는 배창호, 이장호, 임권택, 강우석 감독 등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의 페르소나가 되어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감독과의 조합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프레시안(최형락)
무라야마 :
이장호 감독이 안성기 씨에게 형님 같았다면 임권택 감독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배창호 감독은 동지 같은 분이었죠. 어떤 분과 가장 궁합이 잘 맞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품은 <만다라>(임권택, 1981년), <고래사냥>(배창호, 1984년), <남부군>(정지영, 1990년), <라디오 스타>(이준익, 2006년) 등인데요. 전부 다 감독이 다르죠? (웃음) 그때마다 작품의 완성도를 평가할 뿐이라서, 한 감독의 이름만 들 순 없을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책 쓰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나, 안성기란 배우에 대해서 몰입하게 되었던 일화가 있다면 어떤 건가요?

무라야마 : 책에도 나오지만, 1990년대 후반에 "영화 일에서 물러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나겠다"고 까지 얘기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쭉 주연으로만 들어오던 시나리오가 어느 시점부터 그렇지 않은 게 많아진 거죠. 이 얘길 직접 들은 강우석 감독만큼이나 저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국민 배우라는 타이틀까지 거느린 사람인데, 영화를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인데, 겨우 4~50대에 벌써 영화에 출연할 기회가 없어진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하니 충격이었죠. 외국에는 로버트 드니로나 더스틴 호프만,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지금도 충분히 영화를 이끌고 나갈 수 있는 노장 현역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그 속에서 '이런 건 배우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영화계 전체가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고 문제의식을 확장하고, 배우가 존재감을 발휘하는 건 배역 크기와 상관없다고 생각을 전환하는 부분에 상당히 감동을 받았어요. 영화배우이기에 앞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좌절을 경험했을 때의 모습에 특히 매력을 느꼈고, 극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프레시안 : 안성기 씨는 배우 인생 50년 동안 거지 왕초부터 대통령까지 안 해본 역할이 없으신데요. 배우로서 연기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직업과 성격을 거쳐 온 셈입니다. 앞으로 기대하는 역할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무라야먀 :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해리슨 포드 같은 역할을 하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또 <제7광구>(김지훈, 2011년)에 나오는 자상한 아버지 이미지의 역할도 앞으로 더욱 기대하는 모습입니다. 이 영화에서 친구 딸인 해준(하지원)을 만나 옛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배우는 과거에 <진실게임>(김기영, 2000년)이란 영화를 함께 한 적이 있는데, 궁합이 좋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두 배우가 아버지와 딸 비슷한 관계로 나오는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사람 이야기 계속 전하고파

프레시안 : 어학서인 <기초 일본어 작문>(공저)을 제외하고 사실상 첫 책입니다. 제대로 글을 쓰신 건 이번이 처음인가요? 처음 이야기를 듣고는 저자가 직업 작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무라야마 : 네. 하지만 늘 욕구는 있었죠. 특히 2004년에 일본 방송 대학 졸업 논문을 쓰면서 (무라야마 씨는 젊은 시절 지바 대학을 다니다 중퇴했고, 뒤늦게 일본 방송 대학에서 공부했다.)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여 글로 쓰는 것의 매력에 사로잡혔어요. 당시 논문 주제가 '1973년부터 시작되는 한국 내 일본어 교육의 역사'였는데, 그걸 쓰기 위해 많은 자료를 봤습니다. 제가 사는 교토 근처에 국회도서관 분관이 있는데, 거기엔 1970년대에 나온 한국 신문들이 마이크로필름 형태가 아니라 낡은 신문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요. 당시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좋은 경험이었지요.

프레시안 : 책을 보면 과연 자료 수집에 철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1960년대 험악했던 영화사들의 분위기라든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축 처진 한국의 모습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요.

무라야마 : 사실 '평전'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 주변에 있는 많은 인물들을 인터뷰하든지 그 사람을 옆에서 계속 지켜보면서 써야 하는데, 한국에 살고 있지도 않고 자주 올 수도 없는 형편이라…. 어쩔 수 없이 자료에 의존한 측면이 있죠. (웃음) 주로 출판된 책이나 잡지를 이용했지만 인터넷의 도움도 컸습니다. 인용된 자료 중 많은 부분을 안성기 씨 팬 카페 자료실을 통해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릴 빌어 감사드립니다.

프레시안 : 말씀하신 한계, 그러니까 해당 인물을 옆에서 지켜보거나 주변인을 널리 인터뷰하지 못한 점은 그가 '배우'이기 때문에 더 그렇지 않았을까요? 깊이 접근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을 것 같아요.

무라야마 : 사생활 부분은 꼭 배우여서가 아니라, 안성기 씨 본인이 매우 엄격하시죠. 사실 책 초반에 한국 전쟁 이야기를 하면서 안성기 씨 부모님을 소개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이미 공개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당황하시더군요. (웃음) 그런데 저 스스로도 해당 인물의 사적인 부분까지 노골적으로 보여준다든지, 너무 깊이 들어가고 싶진 않았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다음에 또 책을 쓰신다면, 어떤 걸 쓰고 싶으십니까?

무라야마 : 앞으로도 한국 사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겉보기엔 비슷한 게 많지만 사고방식이나 삶의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정말 많습니다. 일단 당장은 한국에 이미 나와 있는 한국인들의 평전을 번역하고 싶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직접 쓰고 싶은 인물은 화가 이중섭(1916~1956년)입니다. 이중섭과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사이의 러브스토리가 정말 절절하고 로맨틱합니다. 부인께서 살아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계신 동안 한 번 꼭 만나고 싶습니다.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무라야마 : 책을 어떻게 보실지 상당히 궁금합니다. 읽고 느끼신 것,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언제든 제 이메일(nokto@movie.ocn.ne.jp)로 연락 주세요.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