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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당신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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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당신이 부럽다!

[親Book] 메리 피어슨의 <파랑 피>

2000년대 초 영미 과학 소설(SF) 출판계의 대표적인 변화로 '청소년 소설의 증가'가 있었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인기로 청소년 문학, 그 중에서도 판타지 문학 시장이 커지며 이웃 장르라고 할 수 있는 SF 역시 청소년 독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양방향에서 일어났다. 한쪽에서는 아동·청소년 소설 작가들이 SF에 도전했고, 다른 쪽에서는 성인 독자들을 대상으로 SF를 쓰던 작가들이 대상 연령대를 낮춘 작품을 내놓았다.

이러한 변화는 반짝 유행에 그치지 않았다. 2008년 네뷸러 상 수상작은 국내에도 소개된 어슐러 르 귄의 청소년 소설 <파워>(이수현 옮김, 시공사 펴냄)였고, 2010년 네뷸러 상 수상작 또한 테리 프래챗의 디스크월드 시리즈인 아동·청소년 소설이었다. 2006년부터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SF와 판타지에 수여하는 '안드레 노턴 상'도 만들어졌다. 2005년 세상을 뜬 소설가 안드레 노턴을 추모하는 상이다. 출판사의 홍보 방향이나 서점의 집계 방식에 따라 청소년 소설에 들어가기도 하고 SF에 들어가기도 하는 소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런 변화는 한국의 번역 출판에도 반영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온 청소년 소설 중 SF의 비중은 놀랄 만큼 높다. 해마다 나오는 SF가 몇 권 안 된다고 하지만, 청소년 소설의 꼬리표를 달고 조용히 출판되는 책들 중 SF를 찾아서 꼽아 보면 다 읽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많다. 원서로 읽고 "앗, 직접 번역하고 싶다!" 생각해 알아보니 최신간인데도 청소년 소설로 이미 출판권이 팔렸거나 출판된 경우도 몇 번이나 있었다. 좋은 책 욕심이 많은 번역자 입장에서는, 먼저 맡은 번역자가 부럽기도 하고 심술이 나기도 한다. 원서가 'SF'로 나왔다면 이런 일은 절대(!) 없을 텐데, 하고 말이다.

2010년 말 비룡소의 청소년 소설 시리즈 '블루픽션'으로 나온 메리 피어슨의 2008년 작품 <파랑 피>(황소연 옮김, 비룡소 펴냄)도 나의 그런 부러움과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었다.


▲ <파랑 피>(메리 피어슨 지음, 황소연 옮김, 비룡소 펴냄). ⓒ비룡소

열일곱 살 제나 폭스는 1년 전 큰 사고를 당했다.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 제나에게는 주위의 모든 것이 낯설다. 할머니는 왜 어린 시절의 제나를 제나가 아니라 '그 애'라고 부를까? 어머니는 어째서 성공적이었다던 보스턴에서의 사업을 내버려 두고, 아버지와도 떨어져 캘리포니아의 외딴 집에서 제나를 키우고 있을까? 어째서 정신이 들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보통 음식이 아니라 '영양식'이라는 이상한 것밖에 먹을 수 없을까? 열여섯 해나 살았는데, 학교도 다녔던 것 같은데, 친한 친구들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다들 어디에 있지?

열일곱 해를 잃어버린 제나에게 남은 것은 제멋대로 떠오르는 혼란스럽고 단편적인 기억과 부모가 정성스럽게 기록해 온 성장 디스크뿐이다. 제나는 남의 인생을 보듯 디스크들을 하나씩 틀어 보며 과거를 억지로 떠올려 보려고 하지만, 무언가가 빠져 있다. 주위 어른들이 숨기려고만 하는, 제나가 스스로 기억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비밀이 제나를 내리누른다.

외동딸을 탄생의 순간부터 가까이에서 아끼고 사랑하며 키운 부모가 큰 사고로 딸을 잃게 되었을 때 내린 결정. 제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러나 알 권리는 있다. 자신의 인생이고, 자신의 몸이니까. 제나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발견하고, 자신이 손 쓸 수 없는 부분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아름답다. 마치 나비가 처음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말리는 시간처럼.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제나는 외친다. "난 더 이상 어머니의 기적이 되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어머니의 기적이 될 수 없어요."

족쇄가 된 부모의 사랑을 넘어서는 성장이 필요해지는 순간과, 그 순간에 당사자뿐 아니라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용기를 이 소설은 선명하고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작가가 원래 그 앞 장에서 소설을 마무리했다가 갑자기 마치 한 단어 한 단어 짚어주듯 떠오른 강렬한 영감에 덧붙였다는 마지막 장에서의 도약은 그야말로 '과학 소설로서' 경이롭다.

메리 피어슨은 십대 딸이 암 판정을 받은 것을 계기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50년 전이었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병이지만 지금이니까 나을 수 있다는 희망, 십대에 항암 치료를 받으며 투병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부모의 무력감, 병동에서 본 더 어린 아이들의 더 혹독한 투병. 그런 과정을 함께 지나며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부모의 입장.

그 모든 것이 지나고 4년 후에야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초고를 3분의 4 정도 썼을 때 이번에는 둘째딸이 암 판정을 받았다. 그때는 정말 정신을 놓을 것 같았지만, 그 경험을 통해 불가능한 순간에 자신이 어떤 일을 할지는 결코 알 수 없다는 이해가 깊어졌다고 지금은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속도감 넘치는 의학 스릴러이기도 한 이 소설이 갖는 깊이와 힘의 무게를 가늠케 하는 부분이다.

미국에서는 올해 8월에 후속편이 나왔다. 제나와 함께 사고를 당했던 카라와 로키의 이야기이다. 후속편을 읽으며 나는 또 몸부림쳤다. 아, 번역할 사람이 부럽다! 부러워! 그리고 아직 <파랑 피>를 읽지 않은 당신도 부럽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필요할 때, 아껴 놓았던 훌륭한 SF를 펼쳐드는 즐거움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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