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사전에서 'Axe'를 검색해보면 첫 번째 뜻이 '도끼', 두 번째 뜻이 '비용을 대폭 절감하기 위한 조치, 특히 정리 해고 행위'다. 같은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목이) 잘렸다'라는 단어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가를 막론하고 직업을 잃는다는 것에서 풍겨 나오는 어떤 분위기, 비인간적인 냉정함과 절박한 분노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모가지를 자른다'라는 '살인' 행위와 동의어가 된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액스>(최필원 옮김, 그책 펴냄)는 바로 그 두 번째 뜻에 관한 스릴러다.
미국 코네티컷 주, 버크 데보레는 제지 회사 세일즈맨이자 영업부장, 제품 담당 책임자로 차근차근 승진하며 성실한 23년을 보냈다. 월급은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를 먹여 살리기에 충분했다. 주택 융자금, 세금, 학자금, 식비, 자동차 연료비, 옷 구입비 등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당시 "돈의 들락거림은 건강한 몸의 들숨과 날숨처럼 환상의 궁합을 자랑했었다."
그러다가 1995년, 회사가 캐나다의 제지 회사에 합병되면서 무려 4분의 1 가량의 직원이 해고됐다. 데보레는 곧 재취직을 할 것이라 믿었다. 해고되기 전 '인계 기간'과 '재교육' 시간에 배운 점들을 전부 활용하여 정성스럽게 이력서를 썼고, 부지런히 구직 활동을 했다. 하지만 "해고 자체가 거의 모든 산업에서 너무 광범위하게, 일률적으로 진행되다 보니"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데보레는 여전히 실직자였다.
▲ <액스>(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그책 펴냄). ⓒ그책 |
살아남기 위해 미쳐버린 사내의 심리만 묘사했다면 <액스>는 쉽게 질려버릴 장광설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액스>를 돋보이게 만드는 뛰어난 요소 중 하나는 공간에 기울이는 작가의 관심이다.
데보레는 여섯 명의 경쟁자를 제거하러갈 때마다 그 희생자가 사는 곳을 꼼꼼하게 살펴본다. 사는 곳은 경쟁자의 경제적 위치, 심리적 안정성을 말해주는 중요한 요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롱아일랜드에서 좀 떨어진 코네티컷 강변의 고급스러운 대저택, 그러니까 수영장과 정자, 테니스 코트(한 마디로 과시를 위한 잉여의 사물들)를 구비한 저택들을 바라보며 "이곳의 빌어먹을 주민들만큼이나 나 역시 이런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며 결의를 다진다. "저들은 깔끔하게 깎인 저 잔디를 떠받치고 있는 땅이 얼마나 얇고 위험천만한지 알고 있을까?" 그리고 경쟁자가 사는 곳은 이 대저택가에서 벗어난 동네이며, 그곳의 '작아져가는 집들'을 보며 경쟁자와 자신이 거의 동등한 위치임을 확인하곤 안심한다.
두 번째 경쟁자는 매사추세츠 주 롱홈에 산다. "아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지어졌을 (…)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군인들이 후세에 오십 년 후 사회 질서가 무너진 세상을 선물하려 베이비 붐 세대를 만들었을 때" 지은 집이다. 불황 탓에 집을 급매물로 내놓았고, 수리 비용도 마땅치 않기 때문에 이곳저곳 게으르게 대충 수선한 티가 역력한 그런 동네다.
세 번째 경쟁자가 사는 뉴욕 리치게이트 블랙 강변의 공장촌은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던 시절에 지어졌을 매우 오래된 집들"이다. "호황과 공장은 이미 오래전에 이 마을을 떠났다. 끊임없이 개발되는 과도적 기술 탓이다." 공장의 1층은 작은 상점들로 개조됐지만 그 상점들이 관광객들을 끌어올 확률은 매우 낮다. 이 동네는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천천히 몰락할 것이다.
코네티컷 주 다이어스 에디는 인디언으로부터 이름을 따왔다. 뉴욕 세이블 제티는 "오래전 인디언들이 카누를 띄웠던 곳"이자 "유럽 탐험가들이 처음으로 발을 들였던 곳"이다. 두 곳 모두 한때 그 공간을 점유했던 이들을 전부 밀어낸 다음 유럽의 백인들이 원래부터 자신의 땅인 양 행세한 곳이며, 동시에 활력과 생기 역시 상실해버린 곳이다. 코네티컷 주 에러버스는 대도시 변두리의 통근하는 사람들의 거주지로서만 기능하는, "고급화를 위해 쏟아 부은 돈과 노력을 찾아보기 힘든 곳"으로 묘사된다.
데보레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등재된 '정리(Clearance)'라는 단어의 두 번째 의미를 책상 앞에 붙여놓았다. "(땅에서) 삼림, 낡은 집, 거주자 등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개척하는 것." 회사에서 정리 해고를 당하듯, 살던 곳에서도 '정리'되는 사람들의 흔적이 도처에 난무하다. 모두들 그 흔적을 모른 척한다. 세월의 흐름에 따른, 기술의 혁신과 경제 발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인과관계라고 정당화하며 서로 무한한 자리 뺏기 게임을 벌일 따름이다. 직장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공간 속에 켜켜이 쌓인 역사의 전쟁 속 일부이기도 하다. <액스>의 모든 요소들은 바로 그 경쟁을 은유하기 위한 디테일로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다.
주인공 데보레의 위험천만한 살인 행각은 물론 불편하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역전시키기 위해, 타인에게 그보다 더한 불행(그러니까 목숨을 잃는)을 떠넘기면서까지 중산층의 삶에 재 진입하겠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그는 극빈자도 아닌, 터무니없는 부자도 아닌 소위 '중산층'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가에 대해 역설한다.
"우리 중산층은 인생의 매끄러운 진행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고소득 계층으로의 진입을 포기했으니 우리를 밑바닥으로 내몰지는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회사에 충성했으니 우리의 생계를 끝까지 책임져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제대로 행해지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가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우리 중산층은 가운데 껴서 보호받고 지켜져야 하지만 무언가가 잘못돼 버렸다. 가난한 이가 형편없는 일자리를 잃게 되면 그냥 사회 복지 수당을 받아 살면 된다.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일이다. (…) 하지만 우리가 조금이라도 미끄러지면 그 여파는 몇 개월, 아니 몇 년 넘게 이어진다."
여기서 더 미묘해지는 지점은 데보레가 "나의 진짜 적이 누군지 물론 알고 있다"고 선언하는 순간이다.
"나는 처음부터 내 계획의 아이러니를 깨닫고 이 일을 시작했다. 그들, 여섯 명의 관리 전문가들은 내 적이 아니었다. 내 적은 기업가들이다. 내 적은 주주들이다. 요즘에는 전부 공기업이다. 그리고 주주들은 투자 수익에만 관심이 있다. 제품이나 전문 기술이나 회사의 명성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 사회의 선을 추구하는 것 역시 애초부터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 민주주의의 밑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 하지만 적을 안다고 해결될 건 없다. 당장 주주 천 명을 죽인다고 내가 뭘 얻을 수 있겠는가? (…)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환경을 바꿀 수 없다. 이것은 내게 주어진 패다.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그 패를 남들보다 현명하게 쓰도록 노력할 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건 최악의 시나리오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사고하려 노력한다. 월급날만 기다리며 충성을 바친 우리를 회사가 헌신짝같이 내팽개친다면, 우리는 단결을 통해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고 그 결정을 뒤집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선 종종 그 같은 이성과 이상이 부서진다. 많은 이들은 분노를 속으로만 삭이며 스스로를 망가뜨린다. 그런데 <액스>의 데보레는 과감하게 (모두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판타지를 실현시킨다. 사다리를 넘어뜨리는 데서 나아가, 적극적으로 위험 요소들의 '모가지'를 쳐버린다.
그런데 판타지가 현실로 바뀌는 순간, 지켜보는 독자들에게는 그 실현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데보레는 스스로가 자본주의의 악몽 같은 함정에 빠져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젠 그 자신이 최악의 악몽이다. 데보레는 끊임없이 "케 보이?(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질문한다. 그리고 사근사근하거나 우호적이지 못한 자신의 성격, 아주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뛰어나지 않았던 그저 적절한 수준의 업무 능력을 철저하게 회사라는 타자의 관점에서 평가하며,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한다. 이 체제에 어울리는 존재, 이 체제가 욕망하는 존재. 다시 말해 상대방을 깔아뭉개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채 1등을 하라는 끊임없는 타자의 속삭임을 경계 너머로 성취해버린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문체는 지극히 하드보일드하다. 짧고 스피디한 문체 속에 이 미친 남자의 장광설이 울려 퍼진다. 부당함에 대해 외치는 그의 정당한 절규는 점점 더 나 홀로만 살아남겠다는 저주로 변해가고, 그 광기의 미묘함은 우리의 마음을 대단히 불편하게 만든다. 데보레는 이미 성취해버렸고, 우리는 사실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해 주저하는 뒤쳐진 경쟁자에 불과하다.
<액스>는 1997년에 출간됐다. 1996년 미국 주식 시장은 대대적인 주가상승을 기록했고 너도나도 축하의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러나 <액스>는 그 성공 신화 이면의 대대적인 정리 해고와 명예 퇴직이 배태한 쓰라린 블랙코미디를 주시한다. 내게는 <액스>가 2011년의 한국에서 전혀 화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충격적이다. 현실이 고달프기 때문에 픽션에서 그 고통이 되풀이되길 원하지 않는 걸까? 소설, 혹은 영화, 혹은 음악, 혹은 TV는 달콤한 위안만을 제공해야 하는가?
거꾸로, 정리 해고 철회를 외치며 40일 동안 단식을 하고 270일이 넘도록 고공 크레인에 올라가있는 한진중공업 노조원들을 생각한다면 이 소설은 너무 안이한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한 걸까? 스티브 잡스의 부고가 뜨자마자 "국내 업계는 호재를 잡았다"며 호들갑을 떠는 몇몇 매체들의 헤드라인에 비한다면, 살인이라는 어떤 궁극적 행위를 통해 삶의 조건을 돌이켜보는 태도는 19세기적인 구닥다리에 불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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