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 소망이 현재 가족의 삶을 갉아 먹는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그리고 내가 영화로 표현하고 싶은 세상이 이 소망과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현실과 욕망, 신념 사이에 커다란 모순이 생겨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문화기획집단 '영희야 놀자'의 강유가람 감독은, '영화'로 이 충돌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강남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다룬 중편 다큐멘터리, <모래>(시네마달 배급, 2011년)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모래'는 경기 불황 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집값과 그것이 오를 거라는 열망, 부동산 하나로 안정된 삶에 진입할 수 있다는 환상 등 언제든 부스러져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을 상징한다.
▲ <모래>에 등장하는 은마아파트. ⓒ영희야놀자 |
'강남 아파트'를 가진 우리 부모, 하지만…
지난 19일 오후 7시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위치한 '함께 일하는 재단'에서 <모래> 상영회와 <문화로 먹고 살기>(반비 펴냄)의 저자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이 참여한 감독과의 대화 행사가 열렸다. 이날 공개된 <모래>는 가족이란 필터를 통해 '강남 아파트 신화'와 '문화로 먹고 살고 싶은' 젊은이들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동시에, '산업 역군' 세대인 부모의 삶과 정치 성향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1970~80년대 서울의 아파트 건축 현장을 찍은 슬라이드 필름을 벽 한 구석에 영사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나는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산다"라는 감독 자신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오고, "1989년 2000만 원이었던 이 아파트의 가격은 지난 25년 동안 마흔 배 상승했다"는 호들갑스러운 뉴스 멘트와 함께 지은 지 30년 넘어 문턱에 개미가 기어 다닐 정도로 낡아빠진 아파트의 모습이 비춰진다.
은마아파트. 이는 한국 사회, 강남이라는 맥락 속에서 재개발 욕망의 정점이자 막차와 같은 이름이다. 외환 위기 이후, 2000년대 초·중반에 걸쳐 강남의 아파트 값이 폭등하는 가운데 오래된 이 아파트의 재개발이 발표되자 그 이름은 곧 '로또'가 되어버렸다. 많은 이들은 무리한 담보 대출을 해서라도 이 베팅에 몸을 실으려 애를 썼다.
감독의 가족 역시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로 현재의 삶을 빚져야 하는 전형적인 '하우스 푸어'다. 재개발이 예정된 강남 아파트라는 상징 자본을 거머쥐고 있지만 매달 500만 원 가까이 되는 이자를 갚아야 한다. 감독은 "우리 집은 모래 위에 지어진 집 같다"며 부모가 집을 처분하도록 설득하려 애쓴다.
집 처분에 대한 찬반이 감독과 부모 사이 유일한 갈등 원인은 아니다. 감독은 "어디 사느냐"는 주변의 질문에 괜히 부끄러워 다른 동네의 이름을 대기도 하는 진보적 성향의 고학력자이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여당 지지자다.
또 남대문 시장에서 의류 판매업을 하는 어머니는 "고생해서 키운 너는 내 분신이나 다름없다"는 말로 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 기대 안에서 모자람 없이 자란 감독은 "왜 우리 가족은 서로에게 기대서 살 수밖에 없는가"라고 버거워 한다.
사실 감독의 아버지는 재개발/재건축의 병폐를 이미 몸소 경험한 바 있다. 10여 년 전 답십리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 일하며 주민들의 이기적인 욕망에 직접 맞부딪혔고, 그들의 불만을 처리하느라 건강까지 해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가친척의 빚보증, 암 투병 바라지로 점철된 삶에 "돈을 벌지 않는" 두 딸의 존재가 얹혀 가장으로서의 그의 어깨를 더욱 거세게 짓누른다.
영화는 결국 삼촌의 죽음, 부모의 사업 정리 등의 사건을 거쳐 가족이 은마아파트를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더 많은 이익을 남기고 싶어 했던 부모는 마지막까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감독조차 "나 역시 이 집이 비싼 가격에 팔렸으면 내게도 혜택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속내를 깨달으며 당혹감을 느꼈다"라며 부서진 모래성에 대한 미련을 고백한다.
쓸쓸한 내레이션이 흐르는 동안 짐을 모두 빼내 을씨년스러워진 아파트의 모습이 한 장면 한 장면 비춰진다. '중산층의 시간'을 박제해 놓은 가족 사진 액자가 걸려 있던 자국이 비춰지는 순간,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 강유가람 감독. ⓒ영희야 놀자 |
카메라를 통한 세대 껴안기
강유가람 감독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여성학과를 졸업한 뒤 2005년 세계여성학대회 사무국, 희망제작소 등에서 일하다 전업 영화 작업에 뛰어 들었다. 경력에서 알 수 있듯 그가 선택한 삶은 안정적인 취업과 내 집 마련, 결혼 등 부모 세대가 생각하는 '생애 주기 완성'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 영화는 강남 아파트에 대한 중산층의 환상을 보여주는데 머무르지 않고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세대 간 단절을 고백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 점에서 'TK(대구 경북) 출신/한나라당 지지자/독실한 기독교 신자' 등 한국 사회 '보수'의 특성을 모두 지닌 아버지의 삶과 정치의식을 바라본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손경화 감독)과 비슷한 결을 보여준다.
하지만 <모래>의 카메라는 결코 아버지 세대를 대상화하지 못한다. 조한혜정 연세대학교 교수가 추천사에서 평한 대로 <모래>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예리한 메스를 들이대기보다 성찰과 연민의 시선으로 이를 껴안"으며, "카메라를 통해 화해와 공생, 우정과 환대의 세상으로 나아간"다.
상영 이후 이어진 대담 자리에서도 우석훈 박사는 "영화 속 가족이 우리 집보다 살가워서 부러웠다"고 말했다. 이런 결과는 "(아버지와) 평생 해본 대화 시간보다 이 영화를 시작하고 나서 대화한 시간이 더 길다. (아버지와 나는) 살아온 길이 다르기 때문에 개인적인 욕망의 실현 역시 다르게 표현되었던 것 같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감독의 사려 깊은 노력과 맞닿아 있다.
<모래>는 분명 사적인 다큐멘터리이지만 전 국민의 열망인 부동산 소유의 꿈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학 교수는 추천사에서 "(이 영화에서) 외려 자술하는 것은 은마아파트 그 자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강유가람 감독은 "빚이 없는 사람에겐 아파트가 노후 대책일 수도 있겠지만, 서민들 가운데선 금융 위기 이후 아파트에 목을 매서 잘 되었단 얘기를 듣지 못했다"며 "한국 사회의 경제적인 상황과 그것 때문에 무언가를 잃은 세대의 (보편적인) 상실감을 조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직장을 박차고 나와 '문화로 먹고 사는', 불안정한 길을 택한 강유가람 감독은 자신과 같은 고민을 겪고 있을 이들에 대한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나 역시 마지막 직장을 그만둘 때 정말 두려웠지만 막상 시작하니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고 그것은 여러 지원 단체들과 함께 하는 팀 멤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며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문화로 먹고 살기> 등 여러 저술 활동을 통해 젊은 문화 종사자들을 응원해 온 우석훈 소장 역시 "더 많은, 더 좋은 작품을 위해 다방면의 지원이 필요하며, 행정가들이 그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격려했다.
<모래>는 제 3회 DMZ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9월 22일~28일) 한국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25일(일) 오전 11시, 28일(수) 오전 11시 파주 씨너스 이채에서 상영된다. 영화제 이후에는 <개청춘>, <두 개의 선> 등 저예산 다큐멘터리 유통으로 그 힘을 입증한 '공동체 상영'으로 만나볼 수 있으며, 관련 문의는 독립영화 배급사 시네마 달로 하면 된다. (☞바로 가기, 02-337-2135~6)
▲ 우석훈 2.1 연구소 소장, 강유가람 감독. ⓒ영희야놀자 |
<문화로 먹고 살기>의 저자 우석훈과의 대담 "20대 문화 생산자, 가늘고 길게 갈 수 있을 것" 우석훈 :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일본 버블 경제 몰락 시기에도, 사람들은 아파트 가격이 떨어질 거란 사실을 10년 동안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도 부모님이 은마아파트 가격 떨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초조해한다. 오히려 그걸 받아들이고 이사를 결심하는 순간부터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한다. '은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재개발로 달리고 싶은데 달리지 않을 거라는 뜻에서다. 하지만 이렇게 차갑게 얘기하는 것과 거기 사는 사람을 영상으로 보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강남에 살면서 부자도 아닌데 꼬박 한나라당 찍는 사람들을 그렇게 욕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마음이 무겁다. 신문에선 집값이 떨어지면 우리가 다 망한다고 하는데, 젊은 세대는 애초에 아파트가 없으니까 (값 떨어져도) 당하는 거 없지 않나. 그런데 그 젊은 사람들이 아직 의존하고 있는 아버지 세대의 '하우스 푸어', 집값이 오를수록 빚도 함께 늘어나는 그런 사람들의 삶은 어쩔 것인가, 그게 과제인 것 같다. 강유가람 : 처음부터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찍으려 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같이 작업하는 30대 초반의 감독들끼리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버지 세대와 소통하기 어렵다는 문제와 정치적 견해차를 공통적으로 겪고 있더라. 그래서 아버지들의 정치의식을 블랙 코미디처럼 찍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예를 들어 우리 아버지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우리나라가 망할 거라고 말했다. (웃음) 그런데 이런 부모 세대의 정치의식을 우리가 겉핥기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경제적인 토대를 집중해서 보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강남 부동산 문제를 짚었는데, 우석훈 소장의 신문 칼럼 등에서 도움을 받은 측면이 적지 않다. 또 나는 아버지를 찍고 있긴 했지만, <모래>를 만드는 일은 내 자신-부모님과는 다른 방식의 길을 선택하고 싶어 하는-을 부모님한테 어떻게 인정받을 것인가 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나 외에도 20~30대의 젊은 문화 기획자들은 작업에 대한 갈등만큼 부모님과 겪는 가치관의 갈등이 많다. 우석훈 : 이런 다큐멘터리를 좀 많이 봤으면 좋겠다. 문화 분석을 하면서 20대들한테 '책을 써라',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라' 라는 조언을 많이 한다. 20대가 문화 관련 업종에 접근하기 쉽지 않은데, 그 중 그나마 진입 장벽이 낮은 것이 자본이 덜 드는 이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영화 관람 수요 관련 데이터를 보면, 20대 여성들이 제일 선호하는 영화 장르는 드라마, 남성들은 액션이다. 다큐멘터리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데이트를 하면서 같이 다큐멘터리를 보러갈 확률이 0.2퍼센트도 안 된다는 거다. 말하자면 없는 수요를 만들어야 하는데, 대학교에서 다 같이 다큐멘터리 보는 문화를 만들면 좋을 것 같고 영화진흥위원회의 관람 관련 지원도 필요할 것 같다. 또 요즘 TV 오디션 프로그램들, 비슷하고 무의미한 게 많지 않나. 차라리 젊은 감독들이 다큐멘터리 만드는 과정을 프로그램으로 만들면 어떨까. 재미도 있고 사회적인 반향도 있지 않을까. 강유가람 : 영화를 편집하던 올해 초, 한 젊은 영화인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돌아가셨단 뉴스를 보고 너무 우울해졌던 적이 있다. 내가 이 길을 선택한 게 과연 괜찮은 걸까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때 다시 초심으로 돌아와 <모래>를 완성할 수 있게 한 힘은, 같이 하는 '팀'이었다. 영희야놀자 등의 단체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지금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 고민하는 분들에게도 그런 행운이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팀워크만으로 작업과 생계가 가능한 건 아니다. 그래서 더 안정된 작품 제작 지원, 생활 지원과 같은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런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분들의 이해와 협조,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지원이 제도화, 활성화 되면 충분히 많은 작업자들이 자기 꿈을 얘기할 수 있는 환경이 열릴 것이다. 우석훈 : 정부가 문화·예술 산업 종사자들을 지원하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기본 소득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건 사실 모든 사람에게 주는 것이니까 '예술인'에 국한되는 얘기는 아니다. 또 하나는 예산이 덜 들기 때문에 실행하기 더 쉬울 것이다. 문화 직종의 특성상 작업을 쉬는 기간이 있지 않나. 그 시간에 생계를 보전하고 다음 작업을 충실하게 할 수 있도록 부조해주는 제도다. 독일 같은 곳에서 실제로 시행 중에 있다. 우리나라엔 단건 지원은 많아도 이런 생애 지원이 부족하다. 한가지 더 얘기하자면 <모래> 속 가족이 참 살갑단 생각을 했다. 우리 부모는 내가 <조선일보>와 죽도록 싸워도 <조선일보> 한달치를 우리 집에 갖다 놓는 그런 부모다. 화해가 안 된다. (웃음) 그런데 <모래>를 보면 "저렇게 애교 떨면서 사상 검증을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마저 들지 않나. (웃음) 노력하면 살갑게 소통할 수 있었는데 왜 그러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그 방법을 몰랐던 거다. 그런 면에서 지금 20~30대는 '가늘고 길게'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노력 위에 정부의 지원, 그리고 소비자들의 사회적 지지가 받쳐준다면 미래는 희망적일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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