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부러워서 나라도 그런 일을 해보고 싶은 생각에 연구 활동을 접은 지 20년이 되어 간다. 보람을 느끼는 일도 있지만, 불안한 마음이 한쪽에서 갈수록 커진다. 이런 일 하고 있는 내가 역사학자 맞나, 하는 것이다.
'역사 에세이스트'는 일반 에세이스트와 달리 역사학과의 연계를 지킴으로써 나름대로 독자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가진다. 역사는 생각의 발판으로서 중요한 것인데, 독자들과 역사를 맺어주는 안정된 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역사와 관련해서는 '능률적인' 길보다 '안정된' 길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나 자신 연구 작업을 하지 않더라도, 연구자들의 업적을 음미할 때나 독자들에게 전달할 때 연구자의 기준을 지키도록 애써 노력하는 것이다.
넓은 범위의 연구 업적을 참고해서 넓은 시각의 역사 서술을 하려면 편의주의의 유혹을 받기 쉽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편리한 업적만을 골라 편리한 방법으로 내놓고 싶은 것이다. 이야기를 쉽게 하면서, 또한 일정한 범위의 독자들에게 쉽게 환영받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유혹에 넘어가면 역사학자의 정체성을 잃는다. 남이 알아주고 말고 하는 것보다, 나 스스로 인정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사람에게 생각의 대상으로 권할 '역사'를 내 이야기 속에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유사품을 팔아먹는 장사꾼, 아니면 특정한 정치 노선을 대변하는 논객이 될 것이다.
{#8950930013#}
▲ <시빌라이제이션 : 서양과 나머지 세계>(니얼 퍼거슨 지음, 구세희·김정희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21세기북스 |
이 책에는 역사학 연구 업적들 뿐 아니라 문학 작품에서 통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자료가 활용되어 있다. 현란할 정도다. 그런데 자료의 활용 방법에서 퍼거슨의 논점을 뒷받침하기 위한 뒤틀림의 흔적을 종종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455쪽의 이런 대목.
영국의 이슬람 인구가 연간 6.7퍼센트로 꾸준히 성장한다면(2004년부터 2008년까지 그랬다.) 영국 인구 전체 중 비율은 2008년 4퍼센트 미만에서 2020년 8퍼센트, 2030년 15퍼센트, 2040년 28퍼센트가 되었다가 마침내 2050년에 50퍼센트 고지를 넘기게 될 것이다.
이 서술이 근거로 삼은 '팩트'는 두 가지다. 2008년 영국의 이슬람 인구 비율이 4퍼센트 가깝다는 것과 2004~2008년의 기간 중 그 증가 비율이 연평균 6.7퍼센트라는 것. 두 가지 팩트가 모두 옳다 하더라도 증가 비율이 앞으로 40년간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퍼거슨의 '숫자 놀음'은 대단히 강력한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이 추세를 막기 위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엄청난 파국이 닥칠 것이라는 매우 불길한 예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슬람 인구 비율이 높아질수록 증가율이 둔화될 자연스러운 추세는 고려되지 않는다. 출산에 따른 증가가 아니라 이민에 의한 증가인데, 어떻게 기하급수적 증가율을 적용시킨단 말인가. 그리고 왜 하필 2004~2008년의 증가 비율을 기준으로 삼는가? 1998~2008년으로 기간을 넓히면 그보다 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2004년을 기점으로 삼는 다른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율이 커짐에 따라 이민자의 마이너리티 특성이 완화되는 당연한 추세도 무시된다. 2050년에 영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할 것으로 그가 예상하는 '이슬람' 인구가 지금과 마찬가지로 종교에 집착하며 유럽 문명과 마찰을 일으키는 존재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단 한 명 테러범의 사례 위에 세우기도 한다. 2005년 7월 7일 런던 지하철 자살 폭탄 테러범 셰자드 탄위르 이야기다.
1983년 요크셔에서 태어난 탄위르는 가난하지 않았다. 파키스탄에서 이민 온 그의 아버지는 포장 전문 음식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피시 앤드 칩스를 팔면서도 벤츠를 몰았다. 그는 리즈 메트로폴리탄대학교에서 스포츠 과학 학위까지 받은 소위 교양인이었다. 그의 사례는 경제, 교육, 여가 선용 기회를 얼마나 풍족히 제공하든 나쁜 사람과 접촉만 한다면 평범한 이민자 아들이 광신도 테러리스트로 변모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런 면에서 이슬람 '센터'들이 대학 같은 곳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알 수 있다. 말이 좋아 센터지, 이들은 성전을 위한 모병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456쪽)
퍼거슨은 특정 범위의 독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구체적인 목적을 갖고 해주는 것이다. 지금 든 두 대목은 유럽의 정체성 유지에 불안감을 가진 사람들을 유혹하면서 극우파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다. 유럽의 아랍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온건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겠지만, 책을 많이 파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열 명의 확고한 지지를 얻는 이득이 100명에게 미움을 받는 손해보다 현실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정략적 계산을 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오세훈도 그에게서 가르침을 얻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수많은 자료를 제시하며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서술을 펼치다가 결정적인 대목에서 증거고 나발이고 없이 독단적인 결론을 내려버리는 대목이 도처에 보인다. 몇 군데만 예를 든다.
북아메리카가 남아메리카보다 잘살게 된 단순한 이유는 다수에게 분배된 재산권과 민주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영국 정책 모델이 소수에게 부와 권력을 집중한 스페인 모델보다 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노예 제도와 인종 분리 정책은 미국 발전을 저해한 요인이었고, 그 유산이 아직도 남아 10대 임신, 저조한 교육 성취도, 약물 남용, 부당한 투옥 같은 고질적인 문제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를 괴롭히고 있다. (238쪽)
원자폭탄을 서양 문명의 위대한 창조물 중 하나로 꼽는 것이 이상해 보일지 모른다. 그것이 적군에게 죽음을 가져다줄 인간의 능력을 극적으로 높이긴 했다. 하지만 피비린내 나는 일본 상륙 작전과 침공할 필요성을 없애고 전쟁의 규모와 파괴력을 줄이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 원자폭탄과 (…) 수소폭탄은 미국과 소련의 정면충돌을 막음으로써 전쟁과 그 뒤 이어질 모든 갈등의 한계를 결정지었다. (377쪽)
사업과 마찬가지로 종교도 국가가 독점하면 효율이 떨어지는 법이다. (…) 자유 종교 시장에서 종파 간 경쟁은 신을 섬기고 교회에 나가는 일을 더욱 즐겁게 만들 수 있다. 미국에서 종교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435쪽)
사유 재산권은 우리의 소득과 재산에 세금을 매기고 그렇게 모인 돈 중 어마어마한 부분을 낭비하는 정부에 의해 반복적으로 침해되고 있다. 제국이라는 단어는 그것이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손을 빌려 전 세계 나머지 지역에 가져다준 수많은 혜택에도 불구하고 나쁜 말이 되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무의미한 소비사회와 상대주의라는 문화, 즉 어떤 이론이나 의견이 아무리 황당하더라도 그전에 우리가 믿던 것들만큼이나 훌륭하다고 인정하는 문화다. (452쪽)
각 대목에 내가 동의하지 않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내 생각이 옳고 퍼거슨의 생각이 잘못이라고 여기서 우길 생각은 없다. 내가 내 생각을 내 글로 발표할 때는 그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참고할 가치가 있는 근거를 제시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퍼거슨의 책에는 위 내용들이 아무 실증적 근거 없이 나와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는 지적할 뿐이다. 결정적 주장의 바로 코앞까지는 온갖 근거와 인용으로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담론의 흉내를 내다가 결정적 순간에 위와 같은 독단을 내지르는 것이다.
하나의 책을 소개함에는 그 책에 담긴 내용을 소개하는 길이 있고 그 내용을 담은 방법을 소개하는 길이 있다. <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에는 좋은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2011년의 시점에서 중요하게 생각할 만한 주제들이 많이 다뤄져 있다. 그의 정보 수집과 활용 능력에는 참으로 뛰어난 점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소개하는 것보다 내용을 담은 방법, 즉 책의 성격을 밝히는 것이 독자들을 위해 더 중요한 일로 나는 봤다. 특히 책날개에 그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역사학자이자 경영 사상가"로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퍼거슨이 세계 최고의 경영 사상가인지는 내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세계 최고의 역사학자는 결코 아니다. 내가 역사학자들을 좀 아니까, 나를 믿어주기 바란다. 그가 낸 책 중
얘기 나온 김에, <증오의 세기>에 대한 '프레시안 books'의 서평 기사에서 최성각의 아래와 같은 말을 보며 출판사의 저자 소개에 절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만천하의 역사학도가 불신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사마천까지 욕을 보고 있지 않은가. 퍼거슨이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역사학자"라면 나부터 역사학도 아닌 척하고 싶다. (으~ 쪽팔려!)
한반도에 관한 퍼거슨의 논평 중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분단이 이승만과 김일성의 야심 때문이라는 구절이다. 1947년 미국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싶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치명적 결함인 소련이 승전국의 수혜를 받게 된 게 배가 아파 마지못해 주둔하게 되었고, 분단은 오로지 남북의 두 야심가로 인해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역사학자의 이런 무책임한 이해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그러니 역사는 언제나 역사 서술자의 아전인수로 해석될 수밖에 없고, 역사책은 설사 사마천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한계를 안고 있는 미완의 작업일 수밖에 없다.
<위키피디아>의 "Niall Ferguson" 조에는 그의 학자로서의 평판에 관해 이렇게 적혀 있다. 공감이 가는 설명이다. (☞바로 가기 : Niall Ferguson)
동료 학자들은 퍼거슨의 학문에 대한 자세에 의문을 표해 왔다.
저명한 냉전 시대 연구자 존 루이스 개디스는 퍼거슨이 독보적인 "폭과 생산력과 시야"를 가졌다고 평가하면서도 그의 업적에 "설득력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또한 "퍼거슨의 주장 중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들이 있다"고 덧붙였다.
앞서 퍼거슨의 정보 수집과 활용 능력의 뛰어난 점을 얘기했다. 글도 참 잘 쓴다. 기능적인 면에서는 아주 훌륭한 필자다. 그런데 학술적으로 허술한 점이 많고, 그 이유가 상업적 성공과 신자유주의 선전이라는 현실적 목적에 대한 집착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식품에 비기자면 아주 그럴싸하게 포장된, '질 좋은 불량 식품'이다. 내 말을 곧이들어 주는 독자가 있다면 이 책보다는 <해리 포터>를 권하겠다. 이런 책은 모르는 사이에 생각의 균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6개 장은 경쟁, 과학, 재산권, 의학, 소비, 직업을 각각 다룬 것이다. 자본주의의 승리를 가져온 일등공신으로 오랫동안 찬양받아 온 소재들이다. 이 진부한 소재들을 새로운 방법으로 요리해서 참신한 메뉴를 개발하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서양의 주도권이 쇠퇴하더라도 이 소재들을 주재료로 하는 개인주의-자본주의는 인간 세상을 계속 지배할 것이라고 퍼거슨은 주장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위의 6개 요소는 절대적 이점을 가진 것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자원 공급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19~20세기 상황에서 강한 이점을 발휘한 요소들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한계에 이른, 과학기술 만능주의가 힘을 잃은 21세기 상황에서는 그 이점이 약화된다. 철지난 재료로 아무리 별난 요리를 한들 황홀하던 그 맛이 되살아날 수 없다.
퍼거슨은 자신의 새 요리에 중국이 맛을 들이기 바란다. 그 요리를 오래 먹어 온 서양인들이 "이렇게 맛있는 것 세상에 따로 없어!" 하는 표정을 계속 지음으로써 손가락 빨며 바라보던 중국인들이 덥석 달려들게 만들고 싶다. 궁지에 몰린 자본주의가 중국 등 아직 남아있는 공간에서 마지막 꽃을 크게 피우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중국이 자본주의 막차에 타지 않기 바란다. 중국인만이 아니라 온 인류에 불행한 길이 될 것으로 걱정하기 때문이다. 퍼거슨은 반대편 주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를 다 끌어댄다. 그런데 나는 그가 내놓는 얘기보다 내놓지 않는 얘기에 더 관심이 많다. 근대 문명을 개관하는 이 책에 어째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시각이 빠져 있는 것인가? 왜 환경의 위험과 자원의 한계에 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이 책을 권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뉴라이트 논객들이다. 3년 전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 작업 때 그쪽 담론 수준의 유치하고 천박함에 너무 놀랐었다. 이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 지지 담론 중에 이만한 폭과 깊이를 갖춘 것이 따로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뉴라이트 쪽에도 바로 권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번역이 너무 어지럽다. 꼭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수정판을 기다리도록 권해야겠다. 저자의 견해 자체가 억지스럽게 비틀린 대목이 많은 위에 수많은 오역이 겹쳐져 있으니 꼭 암호문을 읽는 것 같다. 상당한 범위의 내용에 관해 전문 지식을 가진 나로서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곳이 많았다. 참고 가치가 큰 책이라면 원서를 구해서 읽었을 것이다.
어떤 일이나 마찬가지로 번역도 능력과 노력의 결합에 의해 성과를 얻는 일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능력보다 노력의 문제를 많이 느낀다. 번역자들의 언어 능력은 훌륭한 것으로 보이는데, <위키피디아> 등 간단한 온라인 조사로도 충분히 걸러낼 수 있는 숱한 착오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어놓는 경우까지 있다. 216쪽에 나오는 카라보보 전투(1821년) 이야기 같은 것. 시몬 볼리바르의 콜롬비아 군이 베네수엘라 왕당파에게 결정적 승리를 거둔 이 전투가 반대의 결과처럼 되어 있다. 이어지는 이야기와도 아귀가 안 맞는 이런 착오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이 책을 펴낸 21세기북스와 몇 해 전에 겪은 개인적 경험 때문에 얼른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출판사에서 무리한 일정을 강요한 것이나 아닌지. 두 명의 역자가 함께 맡은 것도 책을 빨리 내려는 출판사의 조바심 때문이었을 것 같다.
경위야 어떻든 역자의 이름을 걸고 책이 나왔으면 번역자의 책임이다. 나는 4년 전 21세기북스에서 무리한 일정을 요구하다가 끝내 내 승인 없이 내 이름을 걸고 낸 책 두 권의 판매를 금지시킨 일이 있다.(<히스토리카 세계사> 2권과 5권) 그 일을 계기로 번역이라는 직업을 포기했다. 그 득실을 생각하면 어느 번역자에게도 출판사의 횡포에 맞설 것을 권할 수 없다. 나는 다행히 저술이라는 대안을 찾았지만, 한 동안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이 책의 두 분 역자에게는 꼭 권하고 싶다. 혹시 재쇄를 찍는다면 다만 몇 십 군데라도 너무 심한 착오를 바로잡도록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 이 책은 너무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