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것만으론 왜 이 책이 '19세 미만 구독 불가'인지를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지금까지도 '잭 더 리퍼의 정체는 무엇인가'에 관한 무수한 추측만을 양산하는 미스터리를, 20세기를 예견하는 어떤 정신의 정수로 자리매김하는 앨런 무어의 시선은 무정하다. 구약 성경의 '분노하는 하나님'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인간과 훨씬 더 가까웠기 때문에 그만큼 인간의 약점과 단점을 더 혐오했을 고대 이름 모를 신의 시선처럼 염세적인 시선으로 19세기 말 더러운 런던을, 거대한 악의 실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가는지를 내려다본다. 그 시선을 견딜 수 있는 독자만이 <프롬 헬>의 마지막 쪽까지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잭 더 리퍼는 1888년 8월 말부터 11월까지 런던 화이트채플 가의 창녀 5명을 살해했다. 폴리 니콜스, 애니 채프먼, 리즈 스트라이드, 케이트 에도우즈, 메리 자네트 켈리. 그들은 우발적으로 살해된 게 아니다. 부검을 담당했던 의사의 표현에 의하면 "상당한 외과적 기술"을 가진 이가 대단히 의도적으로 그들의 겉 거죽과 내장을 골고루 정교하게 훼손했다고 한다. 스티븐 나이트의 저서 <잭 더 리퍼 : 그 마지막 해답>에서 제시하는 가설을 바탕으로 한 앨런 무어의 그래픽 노블 <프롬 헬>은 처음부터 잭 더 리퍼의 정체를 밝힌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 프린스 에디가 사탕가게 점원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비밀 결혼식을 올렸고, 이 비밀을 인근의 창녀들 5명이 공유하게 된다. 왕실은 스캔들의 확대를 막기 위해 그녀들의 입을 막으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 과업을 왕실 의사이자 비밀 조직 프리메이슨의 일원이었던 윌리엄 위시 걸이 수행하게 된다.
▲ <프롬 헬>(앨런 무어 지음, 에디 캄벨 그림, 정지욱 옮김, 시공사 펴냄). ⓒ시공사 |
이런 시각이 다소 무모해보일 수도 있다. <프롬 헬>은 실존 인물 윌리엄 위시 걸의 친구 아들 하워드 힌튼의 1884년 논문 <4차원이란 무엇인가?>를 되풀이 인용하며 '구조'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그 애는 시간이 인간의 환영이라는 이론을 세웠어. 모든 시간은 영원이라는 거대한 하나에 공존한다는 거지. 영원의 모놀리스 속에 있는 4차원의 패턴은 3차원의 식별자에겐 그저 임의의 사건으로 보인다고."
윌리엄 위시 걸은 대꾸한다.
"힌튼, 그렇다면 역사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개념은 가장 영광스러우면서도 가장 끔찍해."
이쯤 되면 모든 고통과 폭력의 역사가 50년 혹은 100년 주기로 순환된다는 그럴 듯한 음모론(혹은 평행 이론)이 즉각 연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롬 헬>은 결정적인 순간, '세계의 불가사의' 유의 음모론 가장자리에서(그리고 필연적인 냉소적인 운명론으로부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품위를 유지한다.
대신 인류 문명을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올려놓았던 시발점인 19세기 말의 풍경을 통해 이런 형태의 살인이 왜 그 이전엔 존재할 수 없었으며, 그 이후에는 그토록 많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냉정한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프롬 헬> 곳곳에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실존 인물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와 윌리엄 예이츠, 아티스트 윌리엄 모리스와 월터 시커트와 제임스 휘슬러,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 <엘리펀트 맨>으로 잘 알려진 기형 인간 조셉 메릭,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와 코난 도일, 극작가 버나드 쇼가 등장하는 건 그 때문이다. 잭 더 리퍼로 대표되는 당시의 광기를 되받아치는 이들의 작품과 재치 넘치는 경구들은 이후 20세기라는 야만의 시대를 예견하는 예언자적 디테일이다. 흔히들 말하듯, '악마는 사소한 디테일 속에 있다'.
이 지점에서 앨런 무어의 <프롬 헬>은, 휴즈 형제의 동명의 영화와 결정적으로 갈린다. 앨런 무어의 원작을 옮긴 영화에선 주인공을 바꿔버린다. 잭 더 리퍼, 즉 윌리엄 위시 걸이 아니라 잭 더 리퍼 사건을 조사했던 애벌라인 형사를 연기한 조니 뎁을 중심에 놓는다. 영화 속 애벌라인은 위시 걸을 진범으로 지목했던 심령술사 로버트 리즈와 가장 유명한 허구의 탐정 셜록 홈스를 합쳐놓은 것 같은 인물이다. 아편에 심취하며 '비전'을 통해 사건의 핵심에 접근해가는 애벌라인 형사는, 조니 뎁이라는 스타가 기존에 연기했던 익숙한 아웃사이더 이미지를 재탕하는 데 그쳤다.
'잭 더 리퍼가 누구냐'를 밝혀내는 미스터리 스릴러로 포장된 영화는, '잭 더 리퍼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가'에 집중했던 원작이 포착한 지옥으로부터의 울부짖음을 보여주기에 역부족이었다. 당시 새롭게 등장한 매체였던 타블로이드를 싹쓸이한 최초의 '스타'이자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 영감을 불어넣었으며 최초의 프로페셔널 경찰 조직 '스코틀랜드 야드'를 처음으로 무력화시켰던 범죄자 잭 더 리퍼는, 영화 속에서 천재적이고 신비로운 탐정 애벌라인의 추리에 의해 정체가 손쉽게 드러나는 광인으로만 그려진다.
1880년대와 잭 더 리퍼는 폭력의 20세기를 예견하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1990년대 말, 21세기를 향해 질주하는 세기말에 <프롬 헬>을 완성한 앨런 무어는 그야말로 20세기를 자기 식대로 완성하고 정리한 셈이다.
"20세기란 얼마나 빌어먹을 세기였는지! 그 모든 예술과 공포와 전쟁과 음악과 철학을 보라. 히틀러와 스탈린과 반 고흐가 같은 시기에 존재했다."
그리하여 앨런 무어는 윌리엄 위시 걸에게 이 같은 대사를 선사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네틀리. 시작일 뿐이야. 좋든 싫든 난 20세기를 제공했다. (…) 나는 인간이라기보다 신드롬이다. 인간의 심장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난 비다. 난 담을 수 없다. 생명에서 자유로운 내게 족쇄를 채울 수 있겠는가?"
이 책의 제목은, 자신이 잭 더 리퍼라고 주장하며 신문사와 경찰서에 보내온 수많은 편지 중 콩팥 반쪽을 동봉했던 어떤 편지의 첫머리에서 따온 것이다.
"지옥으로부터. 러스크 씨, 내가 죽인 여인한테서 떼어낸 콩팥 반쪽을 드립니다. 당신을 위해 보존한 겁니다. (…) 잡을 수 있다면 잡아보시오, 러스크 씨."
1888년 3월 지중해 지역에는 피처럼 붉은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 해 가을을 사로잡을 공포의 전주곡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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