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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톨스토이 없는 이유는? '식민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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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에 톨스토이 없는 이유는? '식민지' 없어서!?

[프레시안 books] 조영일의 <세계 문학의 구조>

<세계 문학의 구조>(도서출판b 펴냄)는 평론가 조영일의 세 번째 책으로 나온 네 번째 책이다. 그의 해명에 따르면 네 번째로 기획된 책이지만 한권을 앞질러 출간된 것이어서 그렇다.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 문학>(2008년), <한국 문학과 그 적들>(2009년)이 '한국 문학 비판 3부작'으로 나온 두 권의 책이며 그 마지막 권보다 먼저 나온 게 <세계 문학의 구조>이다. 조영일은 앞서의 비평집들이 보여준 날선 비판으로 '한국 문학 비판의 대표 주자'란 평판까지 얻었는데, <세계 문학의 구조>는 적어도 제목만으로는 '비판'보다 본래의 '비평'에 더 다가간 느낌이다. 그는 '세계 문학의 구조 비판'이라고 쓰지 않고 그냥 '세계문학의 구조'라고 적었다. (보론으로 실린 글 역시 '세계 문학 전집의 구조'란 제목을 갖고 있다).

조영일의 비평적 입지는 독특하다. 일본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책 다수를 번역한 '전담 번역자'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긴 했지만(한국 문단에 큰 파문을 던진 <근대 문학의 종언>이 그의 손을 거친 번역이다) 동시에 한국 문학(그의 표현으론 '한국 문단 문학')의 경계 가장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어서이다.

그에 대한 반응은 (소수의) 열광적인 지지이거나 (다수의) 매몰찬 기각인 경우가 많다. 양적으로 보아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러니까 가장 많은 글을 써내는 비평가에 속하면서도 정당한 평가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불편한 물건'으로 간주되는 일이 많았다. 사뭇 논쟁적인 주장과 함께 여러 차례 실명 비판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논쟁이 벌어진 일은 거의 없다는 게 그 방증이다. 끊임없이 손수건을 내던지지만 아무도 그의 '결투 신청'에 응하지 않는다고 할까. 이유가 아예 없지는 않다. 그의 비평에 간혹 끼어 있는 논리적 비약이나 논거 부족 등이 상대할 여지를 축소시킨다는 의견도 나온다. <세계 문학의 구조>의 '책머리에'만 보아도 그렇다. 서두이다.

"지금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백낙청)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못 분명한 사실 같다. 최근 내 작업들도 그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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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문학의 구조>(조영일 지음, 도서출판b 펴냄). ⓒ도서출판b
백낙청의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창비 펴냄)을 염두에 둔 것인데, 그러한 물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주는 것이 "내 작업들도 그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한 나르시시즘이다. 보통은 "최근 내 작업들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정도로 진술하는 게 문맥상 온당하다. 그래서 그런 식의 문장 연결이 불편한 독자들도 있을 터인데, 그렇다고 해서 미리부터 책을 덮지만 않는다면 나름대로 충분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 그가 나름 '슬로우 스타터'라서 그렇다.

스스로 '장편 비평'이라고 장르를 규정한 이 저작을 관통하고 있는 건 모종의 '자부심' 혹은 '기개'이다. 일단 <세계 문학의 구조>라는 제목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책을 구성하고 있는 네 개의 장이 일사불란하게 '세계 문학의 구조'라는 주제를 떠받치고 있는 건 아니고 "근대 문학은 전후 문학이다"라는 명제가 오히려 핵심을 구성하지만 조영일은 당당하게 "세계 문학의 구조"라는 대담한 제목을 붙였다. 더불어 책의 표지에는 저자와 책 이름만을 박아놓았다(물론 출판사 이름도 하단에 들어 있지만).

아무런 표지 장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내용'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조영일은 "나는 최근에야 스스로를 문학비평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까지 '책머리에'에 적었다. 이를테면 <세계 문학의 구조>에서 우리는 국민 문학과 국민 작가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보여주는 그의 주장을 읽으며 비평가 조영일의 '탄생' 또한 목도하게 된다. '3부작'을 완결 짓기 전에 <세계 문학의 구조>를 미리 펴내야 했던 이유 혹은 비밀이 거기에 숨어 있을 듯싶다. 조영일은 이 책의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한다.

"<세계 문학의 구조>에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형식적으로는 일단 '장편'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고, 내용적으로는 제목에서도 드러나 있지만 세계 문학의 일부로서만 '한국 문학'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7쪽)

'장편'이란 말이 '장편 소설'을 연상하게 하지만 실제로는 '연작'에 가깝다. 네 개의 장과 보론이 조금씩 소재와 초점을 달리하면서 하나의 주제로 수렴하는 형식이다. 하지만 이런 형식보다 더 눈에 띄는 건 '-습니다' 체 문장이다. 마치 강연 원고처럼 읽히는데, 짐작에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1장 '세계 문학으로'는 노골적으로 가라타니의 '세계공화국으로'란 구호를 패러디하고 있다(<세계 문학의 구조> 표지 또한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 표지와 유사하다. 실제로 조영일은 가라타니의 이 최신작을 번역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물론 스타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조영일은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한 '근대 문학의 종언'론의 견지에서 다시금 백낙청을 비롯한 민족 문학론자들의 세계 문학론을 비판한다. 진즉부터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을 비평의 화두로 삼아온 백낙청은 괴테와 마르크스의 유명한 구절들을 근거로 삼아 세계 문학의 이념을 재정립한다. 요는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은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며 올바른 민족 문학이 곧 세계 문학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조영일의 비판은 흥미롭게도 세계 문학에 대한 괴테와 마르크스의 주장을 그 문맥에 맞게 다시 읽는 것이다.

가령 "민족적 편협성과 제한성은 더욱더 불가능하게 되고, 많은 민족적, 지방적 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 문학이 형성된다."(<공산당 선언>)는 게 마르크스·엥겔스의 유명한 주장이었다. 조영일은 이 주장에 앞서 마르크스가 "국산품에 의해 충족되었던 낡은 욕구들 대신에 새로운 욕구들이 등장하는데, 이 새로운 욕구들은 그 충족을 위하여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들 및 풍토들의 생산물을 요구한다"고 적은 대목에 주목한다. 그럼으로써 "마르크스는 세계 문학을 세계 시장의 형성과정에서 생겨난 '민족적 자족성의 불가능'에서 나온 파생물로 보고 있는 것"으로 교정한다. 한편, 괴테의 경우는 세계 문학을 '촉진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조영일에 따르면 그 배경은 전쟁이었다.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보편적 세계 문학이 화제가 되었는데, 거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민족이 너무나도 두려운 전쟁에 의해 시달린 나머지, 재차 자기 자신을 되돌아봄으로써 외국의 많은 것들에 대해 깨닫고 이것을 받아들이거나, 이제까지 몰랐던 많은 정신적 욕구를 여기저기서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괴테의 '정신적 욕구'는 마르크스의 '새로운 욕구'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며 그것은 참혹한 전쟁을 통해 획득하게 된 어떤 강제적 충동이 만들어낸 '초국가적 연대감'이라는 것이 조영일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괴테의 세계 문학 구상은 칸트의 세계공화국에 대한 구상과 나란하다. "자연의 계획이 뜻하는 것은 전 인류 안에 완전한 시민적 연합을 형성시키는 데 있다"는 칸트의 구상은 보편적 문학에 대한 구상으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공화국이 국민 국가를 지양한 것이라면, 세계 문학 또한 국민 문학(혹은 민족 문학)을 지양한 것이다. '민족 문학이 곧 세계 문학'이란 구호에 맞서 저자가 '민족 문학에서 세계 문학으로'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세계 문학, 혹은 세계 문학의 구조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이라면, 조영일이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건 국민 문학의 기원이란 주제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국민 문학은 전후 문학이다"라는 것인데,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일본 근대 문학은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감 없이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소위 '국민 서사'라는 게 가능하자면 그것은 국가 간 전쟁과 같은 일대 사건을 요구한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일본 '국민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소세키가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듬해에 일어난 러일 전쟁은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이제까지 일본 문학이 내세울 만한 게 별로 없었지만 러시아란 대국도 무찌른 만큼 문학 쪽에서도 대단한 무엇이 나올 거라는 전망을 그는 피력한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 국민 문학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발표된다. 그렇듯 근대 전쟁과 근대 문학은 '상호 협력'했다는 것이 조영일의 시각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조영일은 "국민 전쟁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국가의 문학은 본질적으로 부실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어떤 나라는 근대 문학이 발달했으나 어떤 나라는 그렇지 못했던 것일까요?"란 물음의 답은 그대로 주어진다. 근대적 서사를 추동시키는 원동력으로서 식민지를 가져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 곧 해당 국가가 내셔널리즘을 거쳐 제국주의까지 경험해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가 판단의 잣대이다. 따라서 한국 근대 문학사가 좀 부실해 보이는 것은 작가적 역량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이렇다.

"좋고 나쁘고의 문제를 떠나 한국 근대 문학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 '제국주의적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것(그리고 '식민지'를 가져보지 못한 것)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3쪽)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주장이다. 같은 세대의 젊은 비평가들 가운데 가장 명민하거나 유려한 비평가는 아닐지 모르지만 조영일은 가장 흥미로운 비평가이다. "한국에는 근대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한 적 없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치는 비평가를 적어도 나는 알지 못한다(그가 각주로 처리한 대목을 보면 가라타니 고진도 "한국에는 애당초 근대 문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주장에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내용에 대해서는 특별히 덧붙일 게 없다. 본문에 충분히 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조영일은 미리 입막음해놓고 있지만,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해놓고 '충분히 썼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한 마무리이다. 나폴레옹 전쟁과 러시아 근대 문학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시바 료타로와 이문열에 대한 이야기가 "국민 문학은 전후 문학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흥미로운 논거이지만 충분한 논거인지는 의문이다.

'장편 비평'이 '이론'의 무게까지 감당하는 건 아니라고 조영일은 말할지 모르겠지만, 근대 문학과 세계 문학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변경하고자 한다면 주장에 더 많은 무게를 실어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다음 '장편 비평'을 기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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