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너 파전의 동화집 <작은 책방>(햇살과 나무꾼 옮김, 길벗어린이 펴냄)에 수록된 '작은 책방 이야기'는 책에 관한, 정확하게는 어린 시절 읽었던 책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찬가다. 누구나 어린 시절 글자의 주문에 단단히 포박되었던 기억이 한두 개씩은 있을 것이다.
▲ <작은 책방>(엘리너 파전 지음, 에드워드 아디존 그림, 햇살과 나무꾼 옮김, 길벗어린이 펴냄). ⓒ길벗어린이 |
요즘처럼 부모님이 신경 써서 연령별로 구획된 명작 동화들을 하나하나 구입하기엔 어린이 책 시장 자체가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 그때는 '전집'들이 참 많았다. 전집에 관한 나의 첫 번째 기억은 계몽사 소년소녀문학전집이다. 1권이 <그리스 신화>이고 마지막 50권이 <한국 현대 동화집>이었던 주황색 커버들. 당시 <작은 책방>은 <보리와 임금님>이라는 제목으로 그 전집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다음 순서는 에이브문고과 에이스88문고였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면 둘 다 정식 계약을 하지 않고 출간한 것이 분명했지만, 그 안에 수록된 동화들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동화라기보다는 청소년 소설 카테고리를 넘나드는 '현대' 작품들이 거리낌 없이 끼여 있었다. 우리 집에는 에이브문고 88권짜리만 있었지만, 가장 친한 친구네 집에 에이스88문고 50권이 있었다.
에이브문고를 섭렵한 뒤 친구네 에이스88문고를 호시탐탐 노리던 와중, 가장 매혹적인 제목의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당시의 제목은 <톰 깊은밤 13시>였다. 필리파 피어스라는 작가가 썼다. 에이브문고 중 그의 또 다른 책 <조각배 송사리호>도 신나게 읽었지만, 13살짜리가 '작가주의' 개념으로 책을 골랐다고는 양심상 말 못하겠다. 단숨에 그 책을 완독한 다음, 나는 그야말로 홀려버렸다. 가능하면 친구에게 돌려주고 싶지 않을 만큼, 톰이 자신만의 비밀을 그러안고 전전긍긍하듯 나 역시 이 책을 나만 알고 있는 보물로 남겨두고 싶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문득 그 책이 생각났을 때, 별 기대 없이 검색해보았다. 그리고 그 책이 새로운 제목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햇살과 나무꾼 옮김, 창비 펴냄)로 출간되었다는 걸 알고는 당장 주문했다. 기본적으로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는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의 <비밀의 정원>(최지현 옮김, 마루벌 펴냄)과 꽤 유사한 토대 위에 놓여있다.
▲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필리파 피어스 지음, 햇살과 나무꾼 옮김, 창비 펴냄). ⓒ창비 |
비밀스런 정원에서 낯모르던 소년과 소녀가 만난다. 단, <비밀의 정원>이 10년 동안 사람이 드나든 적 없는 실제의 정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그럼으로써 그 황폐한 정원이 이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지상낙원으로 바뀌어가는 과정 자체가 독자에게 크나큰 시각적 즐거움이며, 아마도 전 세계 정원 마니아에게는 풍부한 영감을 주었을 것 같다!),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만 만날 수 있는 환상의 정원을 배경으로 한다는 차이점은 있다.
동생 피터가 홍역에 걸리는 바람에, 여름 방학 내내 재미없는 이모네 집에 틀어박히게 된 톰은 심술이 잔뜩 났다. 이모가 사는 연립주택에는 또래 친구들도 없고, 연립주택 꼭대기에 사는 주인 할머니는 굉장히 무섭기 때문에 시끄럽게 놀 수도 없다. 이모부는 "아이들은 밤 9시부턴 반드시 자야한다"고 을러댄다. 심심한 톰은 거실의 오래된 괘종시계 소리를 벗 삼아 자정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괘종이 12시 이후에 1시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13번을 울린다? 거실로 슬그머니 나온 톰은 뭔가 달라진 것을 깨닫는다. 마룻바닥엔 없던 양탄자가 깔려있고 낯선 가구들로 꽉 차 있으며 희한한 옷차림의 하녀가 분주히 일하고 있다. "빨리! 빨리!" 톰의 주위에서 집이 재촉하듯이 속삭였다. "시간이 지나고 있어. 자꾸자꾸 간단 말이야." 늘 잠겨있던 뒷문을 열어보자, 원래 쓰레기통과 자동차밖에 없던 뒤뜰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널찍한 정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밤마다 톰은 정원으로 갔다. 처음엔 정원이 없을까봐 늘 마음을 졸이며 갔다. 어떤 때는 문을 열려다 말고, 정원이 없으면 어떡할까 하는 생각에 그냥 돌아온 적도 있었다."
톰은 그렇게 매일 밤 13시가 되면 간단하게 현실 너머의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그 정원을 오가는 사람들 눈에는 톰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어린 소녀 해티는 톰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이 집에서 가장 외로운 천덕꾸러기 해티는 톰과 함께 정원의 온갖 비밀 장소를 넘나들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이 정원에서 두 꼬마가 할 수 있는 일, 놀 수 있는 거리들은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톰은 조금씩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이 13시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좀 뒤죽박죽이다. 어느 날엔가 톰은 폭풍우가 몰아쳐 거대한 전나무가 정원에 쓰러지는 걸 보았지만, 그 다음날 밤 그 전나무가 멀쩡하게 서 있었다. 해티도 어느 순간엔 훨씬 어려졌다가, 그 다음엔 톰보다 나이 많은 소녀로 성장해있다. 비선형적 시간의 흐름 중 대체 어느 지점에 표류하는 것인지 톰은 점점 헛갈리기 시작한다. (낮 시간보다 훨씬 깨끗하고 새 것처럼 보이는) 13시의 괘종시계에는 요한 계시록의 구절이 적혀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어떤 시간여행을 다룬 책 중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향수에 대해 이만큼 아름답게 묘사한 책을 본 적이 없다. 해가 떠있는 동안의 현실과 밤 13시의 현실 모두를 갖고 싶었던 톰의 욕망은, 과거나 미래를 목격하거나 바꾸고 싶어 하는 시간여행 구조와는 많이 다르다. 톰의 환상 여행 플롯은 시간 여행 클리셰에 걸 맞는 정교한 디테일을 품고 있지만, 그 정서의 결은 과학적인 흥분보다는 상실감과 고독에 맞닿아있다.
유년기에만 때때로 가능한 어떤 기적 같은 순간을 통해 환상의 한 자락을 거머쥘 수 있다는 가능성. 어른에게는 물론 어린 시절과 또 다른 차원의 행복이 있지만, 13번의 괘종을 듣고도 "저 놈의 고장난 시계"라고만 투덜거리며 돌아눕게 만드는 불감증을 피할 순 없다. 어린 시절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집 마당 구석구석을 뱅뱅 돌면서 내게도 톰 같은 기적의 순간이 일어나지 않을까 안타깝게 기다렸다.
어른이 되어 다시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를 읽었을 때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평범한 논리를 되씹으며 현실과 타협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시절을 띄엄띄엄 기억해내는 게 전부였다. 환상의 세계를 간절하게 믿을 수 있는 아이들만이 서로의 심장에 공명하는 괘종소리에 이끌려 침대를 나설 것이며, 자신들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간직한 채 시간의 뒤편으로 슬쩍 몸을 숨길 수 있을 것이다.
톰의 정원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 또 다른 정원을 꿈꿀 수 있게 해주었다. 혹은 이 책 자체가 나의 유년 시절의 정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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