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드골 정부 시절 앙드레 말로가 문화부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프랑스는 문화를 공공재의 관점에서 접근하기 시작한다. 즉 문화는 예술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동등하게 누려야 할 사회적 재화이며, 이를 위해서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후 정권 교체가 있었음에도 문화를 국가가 후원하는 공공재로 인식하는 관점에는 변화가 없었다.
▲ <문화는 정치다>(장 미셸 지앙 지음, 목수정 옮김, 동녘 펴냄). ⓒ동녘 |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문화 이론에 대한 영미권의 서적이 많이 소개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책들이 대부분은 미국식 대중문화론에 경도되거나 도시 개발을 위한 정책 지침서로 양분되어 있어서 문화 이론과 정책의 상관관계를 유추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문화 정책의 필요성을 시대 상황과 연결시키거나 정치권력의 변화 속에서 설명한 책이 드물었다.
그러던 차에 프랑스의 사례를 중심으로 정치권력과 문화 정책의 관계를 보여주는 책이 소개되어 한국 사회의 변화를 문화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새로운 정책적 대안을 고민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내가 보기에 프랑스에는 사회 성격을 변화시킨 세 번의 혁명 과정이 있다. 첫 번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며, 두 번째는 1848년 6월 폭동이고, 세 번째가 1968년 5월 혁명이다. 첫 번째가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완성시켰다면, 두 번째는 자유주의 시장 경제와 사회적 계획 경제를 두고 논쟁이 촉발된 계기가 되었다. 서유럽의 역사는 그 이후로 150년간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계급 투쟁이 전개된다.
그러다가 1968년이 되면 경제와 계급이 아니라 욕망과 취향이 사회 혁명의 중심에 들어선다.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식 소비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과 지식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가장 큰 쟁점이 되었다. 소비 생활과 지식이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분하는 이른바 '구별 짓기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회학이 프랑스 사회에서 주목받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좋아서 먹는 음식, 내가 좋아서 보는 영화, 내가 좋아서 구매하는 옷들이 사실은 부자와 빈자의 사회적 차별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또 학교는 개인들의 자율성과 개성을 보장하는 곳이 아니라 계급을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에 불과하다.
프랑스의 문화 정책은 바로 이러한 시대 상황과 깊숙이 맞물려 있다. 즉 문화는 더 이상은 순수 미학의 영역이 아니라 지배의 수단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되었고, 개인의 취향은 국가가 보호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론적인 수준에서 보면 프랑스의 문화 정책의 목표는 바로 욕망의 해방, 일상생활의 민주화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나는 한국 현대사에서 두 번에 큰 단절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가 1987년이며, 두 번째가 1997년이다. 전자는 형식적 민주화를 이루어 내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후자는 경제적 민주화에 대한 고민을 촉발시킨 계기가 된다. 그런데 2008년 이후 새로운 형태의 변화가 한국 사회에 밀어닥치고 있다.
광우병 파동, 등록금 집회, 대학의 구조 조정 등과 같이 생활 세계의 주제들이 민중들의 고통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이러한 쟁점을 주제로 사회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경제적 파탄이 원인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 깊숙한 곳에는 인간의 존엄과 행복에 대한 갈망이 자리를 잡고 있다.
국민들이 공중파에서 방영되는 가수들의 경쟁 프로그램에 흥분하며,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현실에서 좌절당한 슬픔을 생활 세계에서 위로받고 싶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투신과 유명 연예인의 자살은 얼핏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사람들의 욕망에서 경제적 박탈과 문화적 박탈은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닐까?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던 이명박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은 기댈 곳이 없다. 정치가 내 삶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정주부로부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신용 불량자가 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민초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자존심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이다. 그들이 외치는 것은 "더 많이 일하고 빨리 죽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 너무도 끔직하다는 것이며, 그러기에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문화적 혁명이 우리 사회에서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
장 미셸 지앙은 현재 유럽 사회에 만연된 쾌락주의를 치유하기 위해서 문화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고도 산업 사회에서 개인주의 경향은 문화적 타락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이와 비슷하게 한국 사회에서도 경제적 파탄이 문화적 퇴폐주의를 만들어 내고 있다.
삶의 탈출구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사람들은 향락에 탐닉한다. 그런데 문화마저 상품 논리에 지배를 받게 되면서 향락은 윤리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보통 사람들의 부러움이 된다. 향락적 소비가 문화적 특권인양 판을 치면서 계급적 차별을 만들어내고, 세계화가 시대적 대세인양 득세하면서 제국적 오리엔탈리즘을 심화시키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민족성과 지역성은 자리를 잡을 곳이 없다. 한복을 입으면 고급 호텔 식당 출입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방 대학을 나오면 일자리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어가 신분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화적 지배가 도를 넘어 광기처럼 치닫고 있지만, 정작 그 피해자들은 자신이 희생자라는 것을 잘 모른다. 그 가련한 피해자들 중에 지식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가 맞이한 심각한 문화적 문제이다. 파편처럼 찢겨진 정체성을 회복하고, 일상생활에 최소한의 활기를 찾기 위해서 한국적 문화 정책이 절실하다.
또 장 미셸 지앙은 현재의 문화 정치를 위협하는 요인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세계화, 종교적 이데올로기, 엘리트주의.
경제 논리에 빠져버린 세계화의 횡포는 문화를 이윤 창출의 관점에서 생산한다. 미국이 만든 영상, 게임, 음반들이 유럽 시장을 침투하여 미국식 문화 지배를 강고히 한다. 또 유럽 내에서 심화되고 있는 이민자 문화와 전통 문화의 갈등은 정치적 공공성을 무너뜨리고 노골적인 인종 차별 정책을 부활시키고 있다. 다문화 사회가 맞이한 사회적 분열은 치유책을 잃고 헤맨다. 마지막으로 문화의 양극화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문화란 그저 상류층을 위한 고급 예술로 치부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인들이 한국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겠다. 특히 미국식 세계화가 한국을 정체불명의 사회로 만들어 가고 있다. 명품 열기에 빠져 수십억 원짜리 모피 전시회가 한강변에서 이루어지고, 유치원생부터 70세 노인까지 영어 배우기에 미쳐간다. 디지털 강국을 외치며 정보통신 업계가 수조원의 이익을 올리지만 정작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소통은 점차 사라져 간다.
삶의 구석구석이 모두 규격화된 경쟁 논리에 묶여 있어서 개인들은 지쳐가지만, 정작 영혼을 구원해야 할 종교는 이미 정치권력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쉴 곳이 없다. 스마트폰의 열기는 어쩌면 파편화된 한국 개인주의의 실상인지도 모른다. 문화를 말하는 정치권의 정책은 여전히 경제적 이윤 논리에서 헤매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젊은 작가들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죽어간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문화 정책인가?
파리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대중음악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축하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한류의 성공을 위해서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이 희생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권력과 돈이 예술의 순수함을 망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문화 정책의 목표가 국위를 선양하고 경제적 수익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책 담당자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공감해야 한다.
문화란 인간적 삶을 위한 최소한 권리이며, 이를 위해서 정치가 나서야 한다. 왜냐하면 문화는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번역한 목수정은 미래의 한국 정치는 문화 정책이 관건이라고 말하는데, 내게는 아주 신선한 주장으로 보이며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어쩌면 다음 대선은 바로 문화적 권리를 둘러싼 투쟁이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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