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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전쟁·핵 앞에 선 우리의 외침 "텃밭부터 가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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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전쟁·핵 앞에 선 우리의 외침 "텃밭부터 가꾸자!"

[장정일의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김경인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은 <경제 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최성현·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로 널리 알려진 환경·평화 운동가 더글러스 러미스와 <행복의 경제학>(장석진 옮김, 서해문집 펴냄), <슬로우 이즈 뷰티풀>(권희정 옮김, 일월서각 펴냄)을 쓴 문화인류학자 쓰지 신이치의 대담집이다.

주로 쓰지가 묻고 러미스가 대답하는 이 책의 주요 주제는 제목이 가리키고 있는 평화와 환경.

▲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더글러스 러미스·쓰지 신이치 대담, 김경인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녹색평론사

일본의 헌법 제9조는 일본이 전쟁을 "영구 포기"하고 타국과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어떤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구상에 이런 헌법을 가진 나라가 얼마나 있는지는 학인해 보지 못했지만, 국가는 '군사력을 갖는다'는 게 온갖 정치 이론의 당연한 상식이기 때문에, 일본의 헌법 9조는 파격적이다. 국가는 군사력을 가져야만 국가일 수 있다는 상식이 얼마만큼 위력을 가졌으면, 헌법 9조를 뜯어 고쳐 군사력과 교전권을 확보하려는 일본 우익들의 구호가 '보통 국가' 내지 '정상 국가'일까?

하지만 <경제 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서 러미스는 우리가 따르고 있는 근대화, 성장, 민주주의, 군대에 대한 상식이 모두 "상식이라는 가면을 쓴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특히 당면한 주제인 헌법 9조와 군대를 아울러 논했던 제2장('비상식적'인 헌법)에서 그는 군대가 평화를 지킨다고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헌법 9조를 폐기하려는 자칭 현실주의 세력을 향해 이렇게 묻는다.

"일본 역사를 가지고 생각해봅시다. 일본 정부는 언제 가장 큰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던가. 군사적으로 가장 강했던 시대는 몇 년부터 몇 년까지였던가. 그리고 폭력에 의해 죽은 일본 국민의 수가 가장 많았던 것은 언제였던가. 완전히 같은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현실주의가 아닐까요. 이번에는 괜찮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일본 우익은 군대와 교전권이 없는 나라는 비정상 국가이기 때문에 헌법 9조를 폐기하고 정상 국가를 이루고자 한다. 반면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일본인들은 헌법 9조를 내세워 일본의 평화주의를 선전하고자 한다. 그런데 러미스는 헌법 9조를 폐지하건 유지하건, 이 조항은 이미 '식물 조항'이 되었다고 본다.

그는 앞서 언급한 <경제 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2장에서 신(新)가이드라인 관련 법안, 자위대법 개정, 주변사태법 등의 유사 법안이 헌법 9조의 기본 정신을 어떻게 침식했는지를 밝혔다. 예컨대 일본 자위대의 미군에 대한 후방 지원은 국제법상 교전국에 가담하는 것이며, 자위대의 해외 파병은 교전권을 뜻한다는 것이다.

러미스는 이번 대담에서 그의 단독 저서에서 주장했던 것보다 더 날카롭게 헌법 9조를 둘러싼 일본인들의 이중성을 해부한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뒤인 1951년 일미안보조약을 맺고, 본토(요코스카·요코타·사세보)와 오키나와에 미군 기지를 허용했다. 그런데 많은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헌법 9조를 지키는 모임'이나 평화 운동가조차 헌법 9조와 일본 내 미군 기지가 상존하는 모순성을 살피지 않고, 미군의 항공모함화(化) 된 오키나와의 고통을 함께 느끼려고 하지 않는다.

러미스 : 2년 정도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도쿄에서 국제연합대학(United Nations University) 심포지엄에 참석했는데, 끝난 후 두 명의 여성이 찾아와 이렇게 말하더군요. "러미스 선생님, 9조를 세계 유산으로 지정하자는 이야기가 있던데, 멋진 생각 같아요. 정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일미안보조약이 존재하는 한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생각해보세요, 일본에는 미군 기지가 있고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밑에서 실제로 미국의 군사력으로 보호받고 있잖아요. 그런 상태에서 평화로운 일본을 칭찬해달라는 것은 너무 억지스러운 얘기 아닐까요?"

그녀들은 깜짝 놀라 묻더군요. "어머, 일미안보조약을 없애나요? 다른 나라에는 군사력이 있는데, 그럼 위험하지 않을까요?

쓰지 : 그거 참 재미있네요. 9조와 안보가 완전히 따로따로군요!

러미스 : 맞아요. 9조가 문화 유산이 되길 바란다면서, 그 말을 한 지 1분도 채 안돼서 미국의 군사력으로 보호받고 싶다고 하니, 원. 어떻게 그런 의식을 가질 수 있는지, 참 궁금합니다. 거기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 걸까요? 그 대답은 오키나와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미국 기지=오키나와 문제'가 될 수 있는 거죠. 9조의 이상적인 세계와 불쌍한 오키나와를 따로따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가 봐요. (…) 본토에서는 9조를 지키는 운동이 꽤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서, 9조를 위한 모임이 6000개 이상 있다고 해요. 하지만 일미안보조약을 없애기 위한 조직은 거의 없어요. 왕성하지도 않고, 그러한 의식 자체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이런 지적을 통해 러미스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일본 헌법 9조는 일본인들이 세계에 자국의 평화 이미지를 선전하기 위해 내세운 '얼굴 마담'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 9조가 세계에 자랑하고 싶은 명실상부한 '평화 헌법'이 되기 위해서는 일미안보조약이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의 대담자들은 한국과 일본이 각기 미국과 안보 조약을 맺은 나라며, 향후 한국과 일본이 안보 조약을 맺을 큰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헌법 9조는 폐기 유무를 떠나 이미 돌입한 '식물 조항' 상태에서 산소마스크마저 떼어낸 상황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의 대담은 일본 헌법 9조에서 마하트마 간디가 생각한 국가와 민주주의에 대한 고찰을 지나, 두 사람의 공통 주제인 환경에 당도한다. 환경주의자의 면모를 확연하게 보여주었던 <경제 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서 러미스는 자본주의나 마르크스주의가 다른 것 같지만, 문명과 인간의 삶에서 근대화와 기계·기술에 대한 의문이나 견제가 없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의 말을 들어보면 하부 구조, 즉 생산 수단과 제 관계가 가장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 것이 기초입니다. 그것이 더욱 현실적이고 객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20세기가 되어 밝혀진 것은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하부 구조는 역시 타이타닉호의 가장 아랫방, 기관실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더 깊은 하부 구조가 있는데, 곧 자연환경 그 자체가 그것입니다. 타이타닉호의 바깥에는 바다가 있습니다. 바닷물이 없으면 타이타닉은 뜰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하부 구조는 경제 제도입니다만, 경제 제도 바깥에는 역시 자연환경이 있습니다.

경제 제도, 즉 생산 수단, 생산의 제 관계는 절대적, 근원적으로 환경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환경이 바뀌면 경제 제도의 하부 구조는 틀림없이 바뀝니다. 환경이 파괴되면 경제 제도도 파괴됩니다. 아무리 자연환경을 무시하고자 해도 인간이 생물인 이상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러미스는 근대화와 발전에 대한 환상이 환경을 파괴해 왔다면서, 벌써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늦었지만, 이제라도 근대화와 성장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날 것을 주문한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이런 경고를 들어 왔지만, 계속해서 발전해야 한다는 근대화 논리와 경제 발전을 하지 못하면 패잔병이 된다는 공포가 '환경의 신음'을 외면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태도를 '현실주의'라고 애써 믿고 '상식'이라고 굳게 따랐다. 여기에 대해 러미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국가와 기업이 합세한 '패권' 즉 헤게모니에 다름 아니며, 우리들의 현실주의에 곧 빙산과 부딪치게 된다는 뜻에서 '타이타닉 현실주의'라는 끔찍한 이름을 붙여준다.

이 대담집은 제목에 드러나 있듯이, 환경 운동과 평화 운동의 접점을 확인하고, 여러 사람에게 두루 알리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문 가운데 쓰지가 걱정하고 있듯이, 환경 운동과 평화 운동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소 반대 운동과 반핵 운동이 지구(환경) 대 민족(평화)이라는 이질적인 관점으로 구획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단견에 대해 러미스는 "국가가 전쟁 상태일 때에는 엄청난 환경 파괴"가 발생한다면서, 전투기가 한번 이륙할 때마다, 폭탄이 한번 폭발할 때마다, 군대가 한번 훈련을 할 때마다 엄청난 환경 파괴가 벌어진다고 말한다.

그는 이 대담에서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쟁만 아니라 항시적인 '전쟁 상태'도 마찬가지로 환경을 파괴한다고 말하면서, 아주 놀랍게도, 구미와 일본 등이 주도적으로 벌이고 있는 경제 성장 정책(활동)을 항시적인 전쟁 상태라고 부른다. 경제 활동이 전쟁의 변조거나 연속이기 때문에(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일본인들이 미국과 벌였던 '경제 전쟁'), 그런 상태에서는 기술의 발전과 물질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노동 시간을 줄지 않고(과로사), 불필요한 욕구가 생겨나며(사치와 낭비), 경쟁적인 성장과 효율이 부르는 환경 파괴가 일어난다(지구 온난화, 원자력 발전소).

실제로 벌어진 전쟁만 아니라, 각 나라가 벌이고 있는 '경제 전쟁이 이미 자연과의 전쟁'이라고 말하는 러미스는, 그것의 해결책으로 간디의 지역 자치와 개개인이 노동이 활성화 되는 자립 사상을 꼽는다. 지역과 개인이 자급자족이라는 간디의 이상과 실험을 통해서만, 우리는 근대화와 성장은 물론이고 그것이 불러온 세계화라는 주박에서 풀려나게 된다는 것이다.

"간디의 이상적인 사회는 그런 사회입니다. 각각의 마을이 거의 수입을 하지 않고, 먹을 것도 약도 마을 단위에서 생산하는 것. 오늘의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이 도시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금방 이루어질 수는 없겠지만, 그 과장을 일단 시작이라도 하자는 것이 폴란(도시에서 텃밭 가꾸기를 제안한 미국의 작가이자 환경 운동가)의 뜻이라고 생각해요. 자급자족의 경제가 커다란 효과를 낼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두 사람이 대담을 마쳤을 때, 미국발 2008년 경제 공황이 시작됐다. 러미스는 책의 후기에 "지금은 무엇이 진정한 경제 활동(즉 노동)인지, 무엇이 허상의 경제 활동인지를 진지하게 분별하기에 적합한 시기라 할 것이다. 그런 뒤 이 경제 제도로 인해 왜곡되었던 진정한 노동을 어떻게 그 제도로부터 독립시킬 것인지, 그 방법"을 생각하자면서,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예를 들어(이것은 아주 작은 예에 불과하지만) 자기가 살고 있는 집 근처에 만일 공터가 있다면, 채소가 됐든 과일이 됐든 일단 심어보는 것이다"로 마쳤다.

이런 결론이 순진하고 소박하다는 것을 두 대담자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이 권면으로부터 깨닫게 되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평화 운동이든 환경 운동이든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는 것. 두 가지 것은, 우리가 상식으로 맹신해 온 기준과 열망이 바뀌지 않고서는 어느 것도 실행하기 힘들다. 게다가 마음이 바뀌고 나서는, 몸과 시간을 바쳐야 한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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