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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월드컵 준결승 진출이 조작이었다면…"

[예병일의 '스포츠 뒤집어보기'] 축구가 있어서 좋은 날

내가 필요할 때마다 요긴하게 사용하는 사진 중에 2002년 한일 월드컵 준결승전 우리나라와 독일의 경기 장면이 있습니다. 이 사진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꿈이 이루어진다"고 쓰인 관중석의 카드 섹션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축구 경기를 많이 보기는 했지만 경기장에서 축구를 본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는 지인은 "경기장에서 직접 경기를 지켜보니 박진감과 스릴이 느껴지는 것이 안방에 편안히 앉아서 보는 것과는 기분이 완전히 다르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축구팬이라면 누구에게나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2002년 월드컵 대회에서 우리나라의 선전이 혹시나 무슨 음모나 조작에 의한 것이라면 어떤 기분을 가지게 될까요? 최근에 K리그 승부 조작이 큰 문제가 되고 있듯이 "스포츠란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표현에 잘못이 없는 게 분명하다면 승부 조작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한창 축구계의 분위기가 뒤숭숭한 이때에 축구의 묘미를 한껏 살려 준, 그래서 축구가 있어서 행복했다는 이야기를 가지게 한 몇 장면을 돌이켜 보며 빨리 사태가 해결되어 경기장에서 행복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축구 경기가 펼쳐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버마와의 준결승전(1974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을 좋게 기억하는 분들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지던 한국 경제가 오늘날 장족의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토대를 닦은 분이라 여길 것입니다.

그 방법이 민주적이었는지, 5개년 경제 개발 계획이 그 이전의 정부에서 마련해 놓은 것인지 등은 차치하고라도 집권하는 동안 대한민국 경제가 발전한 것만큼은 여러 지표로 증명됩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가 아무리 경제 발전에 사활을 걸었다 해도 이미 유치해 놓은 1970년에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했던 아시안게임을 반납해야 할 정도로 1960년대의 한국 경제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방콕은 1966년에 이어 두 번째로 아시안게임을 개최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안게임을 2회 개최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1970년대에 한국의 경제 발전이 잘 이루어진 혜택을 입은 서울은 1981년에야 7년 후에 개최될 올림픽 개최권을 따냈고, 그 후광을 입어 1986년 아시안게임을 개최하게 되었으니 대회를 반납한 후 16년이 지난 다음에야 빚을 갚은 셈입니다.

아시안게임을 반납하게 한 대통령은 태국의 킹스컵을 딴 이름의 박스컵 축구 대회를 창설했습니다. 이 대회는 1980년에 대통령컵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93년 대회를 끝으로 현재는 중지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야구가 축구보다 더 인기를 끌고 있지만 한국 야구가 아시아 밖으로 나가본 것은 1975년이 처음이었으니 박스컵 축구 대회가 창설될 당시에는 축구가 대표적인 국민 스포츠였습니다. 이 박스컵 축구 대회는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배, 태국의 킹스컵,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배와 더불어 우리 대표 팀이 참여하는 대표적인 네 대회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른 세 대회와 마찬가지로 동남아시아 지역 국가들을 불러 첫 대회가 벌어진 것은 1971년이었습니다. 결승에 오른 두 팀은 한국과 버마(지금의 미얀마)였고, 두 팀은 무승부로 공동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지금은 군사 독재에 의해 국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조차 드문 버마가 40년 전에 우리와 맞수였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질 분도 계시겠지만 1970년도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우리나라와 무승부로 공동 우승을 차지한 팀도 버마였다는 점을 돌이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참고로 이 아시안게임에서 버마는 예선에서 일본에 패해 2위로 올라왔지만 결승 진출 리그에서 우리나라에 1대 0 승리를 거두며 준결승에 올랐고, 준결승에서 일본을 이긴 우리나라와 결승 경기를 벌인 바 있습니다.

1972년의 2회 박스컵에서는 조 1위로 예선을 통과한 우리나라가 준결승에서 상대 조 2위를 차지한 버마와 만났습니다. 결과는 1대 0 패배였고, 버마는 결승에서 인도네시아를 꺾으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73년의 3회 박스컵에서도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말레이시아에 져 2위로 예선을 통과한 버마가 준결승에서 또 우리나라를 1대 0으로 이긴 것입니다.

결승에서는 버마와 크메르(오늘날의 캄보디아)가 무승부로 공동 우승을 차지했지만 크메르가 예선 첫 경기에서 우리나라에 6대 0으로 졌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2년 연속 준결승에서 버마에 1대 0으로 진 것이 주최국으로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듬해 개최된 4회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또 크메르와 한 조가 되었고, 버마는 반대 조에 편성되었습니다. 1년 전 우리나라에 6대 0으로 져 놓고도 공동 우승을 차지한 크메르는 그 경기를 끝으로 팀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펼쳐진 예선 경기에서 림삭 골키퍼의 신들린 선방 속에 우리나라를 1대 0으로 꺾으며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듬해에 공산 혁명이 일어나고 무차별 살상이 벌어지면서 국제 무대에서 크메르 축구는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크메르는 나머지 두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했고, 우리나라는 2승을 거둠으로써 조 1위로 예선을 통과했으며, 상대는 또 버마였습니다.

2년 연속 주최국을 물 먹인 버마는 "올해도 다시 한 번"을 외치며 준결승에 임했지만 차범근, 박이천, 이회택, 김재한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공격진(당시는 4-2-4가 주된 전술이었고, 가끔씩 4-3-3을 시도하던 때였습니다)에 맞서 전반전에 호각세를 이루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 번째 당하면 어쩌나'하는 우려와 '이번만큼은 이길 거야'라는 기대가 교차하는 가운데 후반전을 맞이한 우리나라는 세 골을 터뜨리며 속 시원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두 번을 졌지만 세 번째는 시원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이 스포츠이고, 이를 위해 선수들은 매일 땀방울을 흘리고 있습니다. 여세를 모아 결승에서 인도네시아를 7대 1이라는 큰 점수 차이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한국 대표 팀은 3년 만에 단독 우승을 이룩했습니다. 버마는 이듬해 결승에서 우리나라와 다시 만났지만 한국 축구 팀은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었고, 후진 양성에 실패한 버마 축구 팀의 모습은 그 후로 우리나라 텔레비전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여름밤을 뜨겁게 달군 한국 축구 팀의 설욕전은 축구팬들에게 "축구가 있어 좋은 날"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차범근이 이룬 기적의 해트트릭(1976년)

버마에 당한 2년간의 치욕을 갚았으니 이제는 도약을 할 만도 했건만 1974년 9월에 테헤란에서 벌어진 아시안게임에서는 승부 조작(?)이 있었고, 그 결과 우리나라 축구 팀은 4위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8년 전 이탈리아를 꺾고 월드컵 8강에 오른 팀의 후예인 북한 축구 팀은 그 해 봄, 일본 원정에서 4연승, 동남아 원정에서 8연승을 기록하며 우리나라 정부(또는 중앙정보부)를 긴장하게 했습니다. 지금과는 다른 당시의 국민 정서상 국민 스포츠인 축구에서 북한에게 지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선에서 태국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승 진출 리그에서 북한을 피하기 위해 쿠웨이트에 져야만 했고, 실제로 4대 0 패배를 기록했습니다. 결승 진출 리그는 8개 팀이 2개조로 나뉘어 진행되었고, 각조 1위 팀이 결승전, 2위 팀이 준결승전을 가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란에 지는 바람에 이란이 2승, 이라크와 비긴 우리나라가 1무 1패를 기록한 상태에서 마지막 경기 상대는 말레이시아였습니다.

이 경기에서 이기면 3-4위전에 진출할 수 있었으나 우리나라는 또 예상 외의 졸전 끝에 3대 2로 지는 바람에 네 팀 중 4위에 머물렀습니다. 비록 강팀이 참가한 대회는 아니었지만 박스컵에서 보여 준 경기력은 어디론가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졸전 끝에 탈락하자 분위기가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승에서는 이란이 이스라엘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고, 말레이시아는 한국 정부(또는 중앙정보부)의 예상과 다르게 북한을 2대 1로 이기고 3위를 차지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졸전이 누군가 힘 있는 사람이나 집단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으나 경기 내용은 그런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5회 박스컵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이것도 잠시 우물 안에 아무도 없는 틈에 개구리가 잠시 주인이 되었을 뿐 경기력은 나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6회 박스컵이 다가왔고, 대회는 아시아를 넘어서 첫 국제 대회로 면모를 일신했습니다. 6회 대회의 첫 경기는 뮌헨 올림픽 예선에서 우리에게 물을 먹인 말레이시아였습니다.

말레이시아는 1970년대 초까지 우리의 맞수였다고 할 수 있지만 테헤란 아시안게임 결승 진출 리그에서 우리가 진 걸 제외하면 수년간 서서히 우리보다 못한 팀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안게임 이후 한국 대표 팀이 워낙 헤매고 있다 보니 승리를 낙관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9월 11일에 벌어진 이 경기에서 경기 내용은 비슷했으나 집중력에서 문제를 보인 우리나라 수비진을 압박하며 좋은 골 결정력을 보여 준 말레이시아가 네 골을 터뜨리며 4대 1로 앞선 상태에서 경기는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을 장식한 공격수 박이천은 은퇴를 했고, 이회택도 팀을 떠난 상태였지만 한국 팀에는 차범근이 있었습니다.

▲ 1976년 말레이시아와의 축구 경기에서 차범근 선수는 후반 38분에 세 골을 연거푸 넣으며 기적을 연출했다. ⓒ프레시안
후반 38분이 지나면서 한국 축구가 죽지 않았음을 보여 준 차범근은 세 골을 몰아치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첫 출전한 브라질 프로 팀에 이어 2위로 예선을 통과한 우리나라는 결승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며 브라질과 공동 우승을 차지했고, 말레이시아는 그 후 3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서 우리에게 두 방을 먹인 걸 제외하면 오늘날까지 우리의 맞수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차범근의 해트트릭은 1978년 월드컵 예선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했지만 아시아에서는 한 팀밖에 참가하지 못하는 규정상 이란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우리나라가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란이 불참한 그 해 아시안게임에서 우세한 경기 끝에 북한과 공동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그 후에 많은 선수들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1980년대 프로화의 기틀을 닦는 데에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 축구의 흐름을 바꿔 놓은 일대사건이었습니다.

이탈리아를 초토화한 한국의 청소년 대표팀(1981년)

1983년에 멕시코에서 개최된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우리나라 청소년 팀이 4강에 진출한 것은 이제 전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 팀을 이끈 박종환 감독은 고졸 선수들로 구성된 서울시청 팀을 맡아서 조직력을 극대화하며 좋은 성적을 냈고, 훗날 프로팀 성남 일화와 대구 FC를 맡아서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국가 대표 팀 감독으로는 뭔가를 보여주지 못했지만 다른 팀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둔 박종환 감독이 처음 맡은 청소년 국가 대표 팀은 멕시코보다 2년 앞선 1981년 오스트레일리아 대회에서였습니다.

최인영 골키퍼에 최순호, 이경남, 곽성호, 김석원 등 당시로는 최고의 공격수들과 막내둥이 게임 메이커 김삼수와 김경호가 볼 배급을 맡은 청소년 팀에는 수비수로 전종선, 백치수 등 훗날 태극마크를 달게 되는 선수들까지 포진되어 있어서 사상 최강 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아시아 예선에서 결승에 오르기까지 한 골도 내 주지 않고 매 경기에서 3점 이상을 득점했으며, 결승 상대인 카타르에 3대 1승리를 거두며 본선티켓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 때까지 FIFA가 주최하는 대회에서 한 번도 예선 통과를 해 본 적 없는 우리나라의 1차 목표는 예선 통과였습니다. 같은 조에 속한 상대는 브라질, 이탈리아, 루마니아였고 첫 상대는 이탈리아였습니다. 1966년 영국 월드컵에서 북한이 이탈리아를 이긴 것에서 위안을 삼으며 첫 경기를 준비했고, 개막일인 10월 3일 저녁 6시 반에 경기가 벌어졌습니다.

시차가 문제가 되지 않는 멜버른에서 벌어진 경기여서 많은 이들이 저녁 식사 전후에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미 1년여 전에 국가 대표 팀에 선발되어 1980년 아시안컵에서 대표 팀 부동의 중앙 공격수로 자리 잡은 최순호의 진가는 경기시작과 동시에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전반 7분이 지날 무렵 곽성호의 골을 어시스트한 최순호는 12분과 29분에 직접 골을 획득함으로써 축구에 미친 이탈리아 팬들의 코를 납작하게 했습니다. 후반 38분에 이탈리아의 마리아니가 추격(?) 골을 터뜨리자 5분 후에 최순호는 또 이경남의 골을 어시스트하며 경기를 끝냈습니다.

이날 이후 최순호는 여러 차례 이탈리아 프로 팀의 스카우트 표적이 되기도 했으며, 5년 후에 열린 멕시코 월드컵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도 1대 0으로 뒤진 후반 17분에 회심의 중거리 슛으로 동점골을 터뜨리며 이탈리아에게 일격을 가하게 됩니다.

브라질, 서독과 더불어 세계 축구의 3강이라 할 수 있는 우승 후보 이탈리아를 첫 경기에서 무참히 눌러 버린 것은 이탈리아 팬들에게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고, 우리나라에게는 세계 대회 첫 예선 통과를 꿈꾸게 했습니다. 아울러 장차 10년은 한국 축구를 짊어질 최순호의 등장이 밝은 미래를 꿈꾸게 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루마니아와의 2차전에서 석패하고, 브라질에게도 패하는 바람에 또 예선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었고, 운 좋게 예선을 통과한 카타르가 8강전에서 브라질을 3대 2로, 준결승에서 영국을 2대 1로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결승까지 오르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우승국은 결승에서 카타르를 4대 0으로 이긴 서독이었습니다.) 이때의 경험이 2년 후 멕시코에서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오래 전에 본 장면을 떠올리며 축구가 있어 좋았던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차범근의 해트트릭이나 최순호의 2골 2어시스트가 승부 조작에 의한 것임이 밝혀진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팬들을 축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이 빨리 해결되어 더 즐거운 마음으로 축구를 즐기게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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