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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 농구 최우수 남매 선수, 그들의 뒤에는…

[예병일의 '스포츠 뒤집어보기'] KCC-허재의 시즌 우승을 축하하며

2010-2011 시즌 한국농구연맹(KBL) 경기가 모두 끝났습니다. 2008-2009 시즌에 그랬던 것처럼 1, 2위 팀인 부산 KT 소닉붐과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가 플레이오프에서 떨어지고 3, 4위 팀인 전주 KCC 이지스와 원주 동부 프로미가 챔피언 결정전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두 팀이 박진감 넘치는 명승부를 벌여서 팬들을 즐겁게 했지요.

KCC가 우승하면서, 이 팀은 프로 농구가 15회의 시즌을 보내는 동안 다섯 번 정상에 올라 최다 우승팀이 되었습니다. 감독 허재는 최근 3년간 두 번이나 우승하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또 앞선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챔피언 결정전에서 누나 하은주가 최우수선수로 선정된 데 이어서 동생 하승진도 최우수선수로 선정돼 겹경사가 났지요.

프로 농구 첫 시즌 전후의 기아자동차

우리나라에서 남자 프로 농구가 시작된 것은 1996년의 일입니다. 그 전까지 실업, 군, 대학팀이 참여하여 온 겨울 내내 농구팬을 열광의 도가니에 몰아넣던 농구대잔치는 1983년에 시작되었습니다.

1980년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대학 농구는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양강 구도가 장기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중앙대학교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장신화가 이루어지지 않고는 장차 농구계의 정상에 설 수 없다는 철학을 가진 중앙대 감독 정봉섭은 1982년에 미완의 대기 한기범을 스카우트했습니다.

이듬해에는 고등학교 최고 선수라 할 수 있는 김유택은 물론 중거리슈터 강정수까지 데려오는데 성공했습니다. 여기에 화룡점정을 한 것이 바로 허재의 보강이었습니다. 3학년 한기범, 2학년 김유택, 1학년 허재가 포진한 중앙대는 대학 최강 전력을 구축했고, 이전까지 우승을 다투던 연세대와 고려대는 2위를 놓고 다투어야 했습니다.

호시탐탐 농구대잔치 우승을 넘보던 중앙대는 최종 결승까지는 진출했으나 우승은 하지 못한 채 대학 최강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한기범의 졸업과 동시에 창단된 기아자동차에 연세대의 유재학과 정덕화가 입단했고, 이후 김유택, 허재가 입단함으로써 기아자동차는 현대와 삼성의 양강 구도를 깨고 실업 최강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농구 프로 리그가 생기기까지는 강산이 한 번 변해야만 했습니다. 그 사이 한기범, 유재학, 정덕화는 은퇴를 했고, 김유택과 허재는 은퇴를 코앞에 둔 노장으로 프로 농구 첫 시즌을 맞이했습니다. 첫 해의 우승은 예상대로(?)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였습니다.

노장 소리를 듣던 김유택과 허재, 선수 생활에 한창 물이 오른 강동희와 김영만이 맹활약하며 우승컵을 가져다주었으니 아마추어의 정상이 프로 리그에서도 그대로 유지된 셈입니다. 외국인 선수에게 중앙을 내 준 김유택은 그 해 식스맨상을 받음으로써 노병은 죽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KCC 우승의 추억

삼성과 동시에 창단되어 20년간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던 현대가 금년 시즌 우승팀 KCC의 전신입니다. 프로 리그 첫 우승을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에 넘겨 준 대전 현대 다이넷은 1997-1998 시즌을 앞두고 예상치 못한 횡재를 했으니 조니 맥도웰의 입단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용병과 비교할 때 키도 그다지 크지 않고, 뚜렷한 특징도 보여주지 못한 상태로 한국 프로 리그에 참여하게 된 조니 멕도웰이 숨겨진 보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감독 신선우가 이끌던 대전 현대 다이넷에는 지금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 이상민, 조성원, 추승균 트리오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외국인 선수 두 명이 주전으로 뛰었으며, 이상민과 맥도웰의 궁합은 "찰떡"이라는 표현 외에 더 필요한 게 없었습니다. 외곽 슛이 좋은 세 국내 선수가 수시로 3점 슛을 꽂아 넣는 데다 파워포드 맥도웰은 오랜 기간 한 팀에서 활약하면서 이상민이 배급하는 공을 시도 때도 없이 골로 연결시키며 국내 최고 득점 기록을 수시로 갈아치웠습니다. 그 결과 통산 7000점에 제일 먼저 도달했고, 리바운드에서도 맹활약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신선우가 이끈 대전 현대 다이넷은 1997-1998 시즌부터 두 시즌 연속 정규 리그 1위와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99-2000 시즌에는 팀 이름을 대전 현대 걸리버스로 바꾼 후 정규 리그 1위를 차지했으나 챔피언 자리는 서장훈이 버틴 청주 SK 나이츠에 넘겨주었습니다. 이 세 시즌 동안 맥도웰은 이상민, 조성원, 추승균과 함께 늘 경기장을 누비고 다녔고, 이들을 이끈 감독은 신선우였습니다.

세 시즌을 보내는 동안 주축 선수들은 서서히 나이가 들면서 뭔가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지만 세대 교체가 원활하지 않은 데다 맥도웰도 서서히 위력을 잃어 갔습니다. 수년간 우승 전선에서 멀어진 사이에 맥도웰도 팀을 옮겼고, 2001년 5월에 KCC가 현대 걸리버스를 인수하면서 이름을 이지스로 바꾸고 프랜차이즈 도시도 옮기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때까지 줄곧 벤치를 지키고 있던 신선우는 어제의 용사들 이상민, 조성원, 추승균을 한데 모으고, 찰스 민랜드를 앞세워 2003-2004 시즌을 대비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아직 은퇴를 하기에는 아쉬움이 있음을 증명하듯 이제는 노장 소리를 들어도 이상할 게 없는 3인방은 정규 리그 2위라는 괜찮은 성적을 올린 후 챔피언 결정전에서 정규 리그 1위를 차지한 원주 TG 삼보를 4승 3패로 물리치고, 다시 한 번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듬해에도 신선우는 전력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비웃기라도 하듯 정규 리그 2위에 챔피언 결정전 2위를 차지함으로써 감독 재임 기간 동안 3회 우승, 2회 준우승이라는 좋은 성적을 남기고, "박수칠 때 떠나라"라는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 창원 LG 세이커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감독이 된 농구 대통령

아마추어 시절, 누구 못지않은 농구 실력을 발휘하여 "농구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가진 허재의 활약상은 아주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었습니다. KCC 우승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놓고, 기아자동차와 기아 엔터프라이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허재의 선수 시절 이야기를 잠시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다섯 번 우승을 차지하여 KBL 프로 농구 팀 중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KCC가 앞의 세 번에 걸쳐 우승컵을 안겨준 사람은 신선우고, 뒤의 두 번 우승컵을 안겨준 사람은 허재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허재의 선수 시절 마지막 경기가 원주 TG 삼보 시절, KCC에게 우승을 안겨 준 경기였다는 것입니다.

7차전까지 혈투를 벌인 이 챔피언 결정전에서 선수로서의 마지막 경기를 벌인 허재는 스타팅 멤버로 출장을 하기는 했으나 출장 시간 11분 8초, 득점 4, 리바운드 2를 기록한 채 벤치에서 쓸쓸히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해야 했습니다. 이 시즌이 끝나면 은퇴를 할 것이라는 예상 보도가 있었던 가운데 벌어진 경기에서 관중들은 농구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를 원했으나 허재는 자신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보여줄 기회를 잡지 못했고, 시즌이 끝난 후 본인이 원치 않은 상태에서 은퇴 기자 회견을 함으로써 선수 생활을 끝내야만 했습니다.

나이를 감안하면 구단의 은퇴 요구가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김유택이 프로 농구 역사상 최초의 공식 은퇴 경기를 가진 것을 감안한다면 꼭 이런 식으로 선수를 은퇴시켜야하느냐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 것이 이 은퇴 기자 회견이었습니다. 전성기 시절의 허재를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이별을 한 허재는 은퇴 후 미국 패퍼다인 대학에서 코치 연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2005년, 신선우가 떠난 KCC의 감독 자리를 물려 받았습니다. 코치 경력이 지극히 짧았음을 감안한다면 파격적인 감독 선임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만 40이 된 나이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2005년에 전주 KCC 이지스 감독으로 취임한 허재는 2005-2006 시즌과 2007-2008 시즌에 팀을 4강에 올려놓으며 감독으로서 대단한 성취를 할 가능성을 보여준 후 2008-2009 시즌에 정규 리그 3위를 차지해 놓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마술을 보여 주었습니다. 올해와 마찬가지로 정규리그 1, 2위 팀인 울산 모비스 피버스와 원주 동부 프로미를 물리치고 챔피언 결정전에 오른 서울 삼성 썬더스에 4승 3패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플레이오프 6강전에서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에 3승 2패, 4강전에서 원주 동부 프로미에 3승 2패에 이어 챔피언 결정전까지 모두 최종전을 치러야 하는 험난한 여로였지만 올드 스타 중 추승균을 제외하면 하승진, 강병현, 조우현 등이 외국인 선수들과 손발을 맞추는 가운데 허재 감독의 리더십이 빛을 발한 것입니다.

올해 우승의 주역이 된 전태풍이 합류한 2009-2010 시즌에는 정규 리그에서 2위를 기록한 후 챔피언 결정전에서 울산 현대 모비스에 지는 바람에 아쉽게 우승을 놓쳤지만 2010-2011 시즌에서 다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선수들에게는 우승의 기쁨을, 허재와 팀에게는 3년 연속 챔피언 결정전 진출과 2회 우승이라는 영광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 한국을 대표하는 농구 선수로 이번에 각각 남녀 최우수 선수로 선정된 하승진(오른쪽), 하은주 남매. ⓒ뉴시스

남녀 MVP와 그 아버지

서장훈, 김주성에 이은 한국을 대표하는 센터 역할을 하고 있는 하승진이 이번 챔피언 결정전을 앞두고 "김주성 형에게 배운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하겠다"고 했다가 허재로부터 "무슨 소리야. 우리가 우승해야지" 하는 핀잔을 듣는 모습은 팬들에게 웃음을 짓게 하는 작은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자 하승진은 감독의 명령에 절대복종을 하기로 한 것처럼 대단한 실력을 보여 줌으로써 결국 챔피언 결정전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었습니다. 이보다 앞서서 신한은행 소속인 그의 누나 하은주가 WKBL에서 챔피언 결정전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으니 한국 프로 농구에서는 친남매가 한 시즌에 챔피언 결정전 MVP를 모두 차지했습니다.

현재 남녀 국가 대표팀 부동의 센터로 활약하고 있는 이 두 선수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긴 이야기보따리를 펼칠 수 있겠지만 오늘은 이 남매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끝을 맺고자 합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중국은 탁구를 제외하고는 국제 스포츠계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처음 출전한 중국은 아시안게임에서 항상 1위를 차지하던 일본과 주최국 이란에 이어 종합 3위를 차지했고, 1978년에는 일본에 이어 종합 2위에 올랐습니다. 그 후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중국의 스포츠 경쟁력은 계속 커져서 이제는 확고한 세계 정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 남자 농구는 필리핀과 아시아에서 정상을 다투고 있었지만 필리핀에 프로 농구가 도입되면서 필리핀은 떨어지고, 중국과 한판 승부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랜 숙적 일본은 물론 중동세의 성장도 두드러진 추세였을 때 2미터(m)를 넘는 선수가 한 명도 없는 현실은 한국 농구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고등학교 농구계에 2미터5센티미터로 한국 농구 역사상 최초로 2미터가 넘는 장신센터가 출현했으니 삼일상고의 하동기가 그 주인공입니다. 1978년에 고등학교 3학년생으로 국가 대표 유니폼을 입은 그는 오늘날의 장신 선수와과 달리 뭔가 어색함이 보였지만 농구협회는 장래성을 믿고 국가 대표팀에 합류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부상으로 일찍 선수 생활을 그만둔 것입니다. 키 큰 선수가 절실하여 그 후에 협회가 아닌 팀 차원에서 씨름 선수 이봉걸을 농구에 입문시키고자 테스트를 하기도 하던 때였으니 수년 후 한기범이 등장하기까지 2미터 넘는 장신으로 유일했던 농구 선수가 하동기였습니다.

일찍 은퇴를 하는 바람에 농구 선수로서의 꽃을 피우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딸과 아들이 한국 농구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장신 선수로 자라나서 나란히 챔피언 결정전 최우수선수 자리에 올랐으니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흐뭇할 것인지는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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