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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탁'만 내세운 그들, 과연 애국자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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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탁'만 내세운 그들, 과연 애국자였나?

[해방일기] 1946년 5월 2일

1946년 5월 2일

4월 18일 미소공위의 제5호 공동 성명이 나오자 좌익과 중도파는 즉각 이에 호응, 협의 대상 신청을 했다. 반면 우익에서는 모스크바 3상 회의 지지 선언서에 서명한다는 신청 요건을 놓고 혼선을 겪었다.

양대 영수 중 김구는 선언서 서명에 반탁 운동 포기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이유로 서명을 반대했고, 이승만은 서울에 없었다. 선언서 서명이 반탁 포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하지의 특별 성명이 27에 나오고 같은 취지의 편지를 이승만이 보낸 뒤에야 우익 단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주의원을 비롯한 우익 정당·단체들이 4월 30일에서 5월 2일 사이에 협의 대상 신청 방침을 결정, 발표했다. 그들의 성명과 담화에 미소공위에 참가해서 반탁 운동을 벌이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 눈에 띈다. 반탁 명분의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민주의원 성명서

본원은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성명이 발표되자 대리의장 金奎植의 명의로써 본원을 대표하여 성명한 바 있거니와 사건의 중대성에 감하여 신중에 신중을 가하여 토의를 거듭한 결과 하지 중장이 성명한 바와 같이 동 5호 성명에 포함된 선언서에 서명하는 것은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하여 임시 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신탁 통치를 반대할 수 있는 계기인 것을 확인하고 본원은 본원에 관계된 각 정당과 단체에 대하여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협의함을 가타 인정한다.

대한민국 28년 5월 1일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성명서
본회는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성명이 발표되자 문제가 중차대한 만큼 냉정·엄격히 심의한 결과, 신탁 통치를 절대 반대하고 완전 자주 독립을 전취하는 한 방책으로 전기 성명서에 포함된 선언서에 서명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기로 한다.

단기 4279년 5월 1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상 <조선일보> 1946년 5월 3일자)

◊ 한국독립당 발언인 嚴恒燮 담화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성명이 발표된 후 이에 대한 견해가 구구하였다. 제5호 성명에 제시된 선언서 중에 삼상 회의 결정 제3절에 관한 점이 좀 더 명랑하지 못한 것과 또 그 선언서 말단에 당과 대표자의 서명을 요구하는 등 두 개의 사실이 반탁자로 하여금 약간의 고려할 시간을 가지지 아니치 못하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신중한 태도는 국가의 존망과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현 단계에 있어서 중책을 진 자들의 당연히 취할 바라고 확인할 바인 것이다. 우리는 찬탁 반탁의 구별이 없이 민주주의 각 정당과 단체로 하여금 일률로 해회와 협의할 기회를 준 데 대하여는 특별히 소련 측에서 고집하지 아니한 그 위대한 민주주의 정신을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다. 특별히 감사하는 바는 하지 장군이 우리의 의혹을 일소하기 위하여 누차 책임 있는 성명을 발한 점이다. 본당은 제5호 성명이 있은 후에도 의연히 미소공동위원회를 협조하는 것이 가하다고 인정하였다. 해회의 공작은 우리 독립의 완성을 협조함에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해회 중에서 신탁 이외의 방법으로도 연합국이 우리 독립을 원조할 수 있다는 것을 일치하게 주장하면 그들이 신탁을 주장할 이유가 없게 될 까닭이다.

(<동아일보> 1946년 5월 1일자)

◊ 한국민주당 성명서
본당은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성명이 발표되자 사건의 중대성에 감하여 신중히 토의를 거듭한 결과 동 성명에 포함된 선언서에 서명하는 것은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하여 임시 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신탁 통치를 반대할 수 있는 계기를 확인하였기 때문에 동 위원회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였다.

5월 1일 한국민주당

(<조선일보> 1946년 5월 1일자)

◊ 비상국민회의 발표
1) 비상국민회의 소속 각 정당과 각 사회 단체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되 탁치를 전제로 한 일체 문제는 절대 배격한다.
1) 과도 정권 수립에 있어서는 자동적 역할을 하여야만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가 주권을 수립할 수 있는 것이고 피동적이 되면 그 주권은 혼을 잃은 정권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전 민족에게 선포한다.

(<서울신문> 1946년 5월 3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우익 정당·단체들에게는 협의 대상 신청을 위해 두 가지 요건이 요구되었나보다. 그 하나는 미소공위의 공식적 요구로서 3상 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선언서에 서명하는 것이었는데, 또 하나의 비공식적 요구가 있었던 것 같다. 김구와 이승만을 영수로 하는 우익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탁의 뜻을 접지 않는다는 성명서나 담화문을 별도로 발표해야 했던 것.

꼴이 참 누추하다. '반탁'에는 두 가지 자세가 있을 수 있었다. 그 하나는 신탁 통치의 가능성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연합국의 결정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능성의 제기 자체는 인정하면서 그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옳고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그른 것이 아니다. 다만, 연합국의 힘으로 해방이 되었고 연합국의 힘에 대항할 능력이 없는 현실에 비춰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자세인지 따질 여지가 있을 뿐이다.

김구와 이승만이 이끈 반탁 운동은 연합국의 결정권을 부정하는 초현실적인 방향으로 펼쳐져 왔다. 이제 협의 대상 신청에 임해 현실적인 방향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참가 신청을 하면서 반탁 의지를 굳이 재확인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Q 식의 '정신적 승리'를 바라는 것인가?

소련이 아니라 중립적인 연합국 입장에서 봐도 이건 아니다. 연합국의 결정권을 부정하는 민족주의 선동으로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고 심지어 미군정의 통치권을 탈취하려는 쿠데타 시도까지 있었다. 연합국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과 어떻게 '협의'를 한단 말인가? 미국 측이 3상 회의 결정을 뒤집기 위해 그런 세력을 키워준다는 의심을 소련 측은 갖고 있었다.

제5호 공동 성명에서 '과거를 묻지 않고' 선언서 서명을 통해 지금의 의사를 밝히면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이 소련 측으로서는 대단한 양보였다. 선언서 서명 요구는 반탁 세력에게 이전의 극단적 반탁운동을 반성하라는 요구였다. 그런데 손으로는 선언서에 서명하면서 입으로는 "나 반성 안 해!"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하지가 27일의 특별 성명으로 부추긴 것이다.

미소공위가 무기 정회에 들어간 뒤 하지는 5월 9일의 성명서에서 정회의 책임을 소련 측에 미루는 중에 이 문제를 크게 부각시켰다.

조선 임시 정부를 수립하려고 미소공동위원이 회담할 때에 소련 대표는 조선 사람으로 모스크바 협정을 반대한 사람은 전혀 조선 임시 정부 조직에 참여치 못하도록 제외하자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 대표는 그러한 제외 원칙은 조선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의 근본인 의사 발표권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반대했다.

(…) 소련 대표는 상 제 정당이 공동 성명서 제5호에 있는 선언서에 서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정당들이 이러한 견해를 포기하지 않는 한(포기할 때까지는) 그들과 협의할 용의가 없다는 것을 명시했다.

이렇게 소련 대표로 말미암아 생긴 신 사태는 이 문제(정당·단체 대표 문제)로 이미 없이 한 과거 6주간은 막론하고 이 앞으로도 임시 정부를 조직하자면 상당한 지연이 있을 것은 불가피한 사실이매 미국 대표는 이 현안을 해결시키는 동안 조선 재통일의 일대 장애물인 38도선 철폐에 착수하자고 제의했고 소련 대표는 이 안을 거절했다. 이 거절을 당한 미국 대표에게는 이 단계에 있어서 더 다른 과제가 없으매 부득이 휴회를 구하는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정당 대표와의 협의 건의 해결이 현안으로 있던 동안은 무기 휴회하기로 1946년 5월 6일에 결정되었다.

(…) 미국 대표로는 단순히 신탁 통치보다는 즉시 독립을 더 좋아한다는 의견을 솔직히 공개 발표했다고 해서 모스크바 협정에서도 보장된 조선 정부 조직에 참여하는 그 권리조차 100여 개 이상의 민주 정당과 사회 단체에게 거부하자는 공동위원회의 안은 찬동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겠다. 이러한 배제안에 찬동한다는 것은 오직 앞으로 신탁을 감수하겠다는 소수당을 제한 기타 모든 사람의 정치적 활동을 제거할 뿐 아니라 대서양헌장에 공약한 세계적으로 승인한 모든 사람의 의사 표시 자유권에 위반하는 것이다.

(<서울신문>, <동아일보> 1946년 5월 10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월 26일자 일기를 맺으면서 제1차 미소공위가 성과 없이 끝나는 과정에서 소련 측 인내심과 포용력에도 아쉬움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 측면을 더 세밀히 살펴볼 뜻을 밝혔다. 그런데 더 살펴봐도 회담 공전에 대한 소련 측 책임으로 뚜렷하게 눈에 띄는 것이 없다. 하지의 성명 중 밑줄 친 부분을 보면 우익 정당·단체들이 미소공위가 요구한 선언서에 서명하면서 동시에 반탁 의지를 공공연히 표명하는 데 대해 소련 측이 항의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항의가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는 '의사 표시 자유권'을 들먹이지만, "나는 너를 무시해" 하는 의사를 공공연히 표명하면서 '협의'에 임하겠다는 것은 인권 문제가 아니라 프로토콜 문제다.

이와 직접 관계되는 일은 아니지만 오늘 있었던 일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국립도서관, 법제 관계 도서의 사법부 법제도서관 이관 반대 진정서

조선의 유일한 종합도서관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한 국립도서관은 그 간 전화를 피하여 각지로 소개했던 수만의 서적을 복귀시키고 일제하 소위 비밀히 사장해 두었던 도서를 공개하여 시민의 호평을 받아오던 중이었는데, 4월 30일 갑자기 군정청 사법부로부터 법제도서관을 창설한다고 국립도서관 소장의 법제 관계 도서 전부를 이관하라고 명령하자 국립도서관 직원 일동은 이것을 반대하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진정서를 2일 러취 장관에게 제출하였다.

"본관은 문화 각 부문을 망라한 도서를 일반에게 공개하여 문화 발전에 공헌하는 종합도서관이므로, 그 중 일부분의 책이 없어도 완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법무부 내의 도서관에 불과하는 법제도서관에 법제 관계 도서 전부를 이관하라 함은 천만 부당이다. 그러므로 만일 필요하다면 본관 내 특별조사실을 만들고 또한 도서를 대여하는 등의 편의를 도모하겠노라 말하여 작년 12월에 원만히 해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4월 30일에 법률 관계 도서를 기어코 반출하려고 하여 본관으로서는 상부에서 하등의 지시가 없으니 2~3일간의 여유를 달라고 하였으나 군정법령 제67호 3조의 위반이라 하며 전기 법제 서적 반출을 요구하고 있으니, 진상을 잘 이해하고 선처하여 주기 간망한다."

(<서울신문>, <동아일보> 1946년 5월 3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미군정의 잘못이 나쁜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만 보는 데 나는 반대한다. 지나치게 탐욕적이고 독선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가진 미군정 당국자들이 있었고, 그런 태도가 조선 사정에 나쁜 영향을 끼친 일들이 물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잘못의 대부분은 조선을 망치려는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너무 무식하고 게으른 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법제도서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훌륭한 법제도서관을 만들려고 애쓰는 데 무슨 나쁜 의도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법제도서관 잘 만들겠다고 종합도서관인 국립도서관의 그 분야 책들을 몽땅 내놓으라니. 미군정의 해악은 두 개 층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의도적으로 조선을 망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의도 없이 저지른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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