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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화의 정신은 오늘도 빛난다

[中國探究]<132>

칭화(淸華)의 정신은 오늘도 빛난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는 양대 명문대학이 있다. 중국 사람들은 베이징대학(北京大學)과 칭화대학(淸華大學)을 그 양대 산맥으로 꼽는다. 그들에게 물어보면, 베이징대학은 문사철(文史哲)이 강하고, 칭화대학은 이공계가 강해서 각유천추(各有千秋)라고 대답한다. 1990년대 베이징에서 유학을 했던 필자도 대충 그렇게 알고 수년 간 강의실을 들락거렸다. 그런데 필자가 이렇게 두 대학을 양분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1990년대 중반 루젠둥(陸鍵東)이란 작가가 쓴 책 한권이 홀연히 중국대륙을 강타했다. 세간에 그리 알려지지 않았던 천인췌(陳寅恪, 진인각)란 학자에 관한 책이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진인각, 최후의 20년>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알려지면서 조용하지만 매우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이 책이 중국 지식인에게 던진 충격은 매우 거대했다. 그들은 <최후의 20년>을 읽으면서 잃어버렸던 지식인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반사(反思)했고, 내면에 흐르는 참회와 감격의 눈물을 억누르지 못했다. 천인췌의 울림은 중화권 전역을 순식간에 장악했다. 그것은 신화(神話)의 되찾음이자 비주류 정신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었다.

▲ 만년의 천인췌

이 천인췌가 바로 80여년 전에 세워졌던 칭화대학 국학연구원(國學硏究院)의 4대 도사(導師) 중의 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1990년대 천인췌를 통해 그들이 망각했던 '칭화(淸華)'의 정신을 되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 되살아난 칭화의 '독립정신과 자유사상'은 2009년 11월, 80여년 세월 만에 칭화대에 국학연구원이 다시 설립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80여년 전 칭화대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당시는 서세동점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서학(西學)이 '권력의 의지'로 대두되던 시절이었다. 1915년에서 1919년에 일어났던 신문화운동은 서학과 중국 전통학문을 날카롭게 대립시켰다. 칭화 국학연구원은 서학이 주류가 된 시대에 국학(國學)을 지키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시대적 사명 속에서 설립되었다. 1925년에 설립된 이 국학원은 당대 최고의 국학대사들을 초빙하여 강학을 맡겼다. 당시 칭화 국학원에는 여러 교사 중에서도 4대 도사(導師)로 꼽히는 인물이 있었는데, 량치차오(梁啓超), 왕궈웨이(王國維), 천인췌(陳寅恪), 자오웬런(趙元任)이었다.

▲ 왼쪽에서부터 자오웬런 , 량치차오, 왕궈웨이, 천인췌, 우삐
후쓰(胡適)는 1921년에 이미 "서양과학의 방법론으로 중국고유의 문화를 연구하자"는 기치 하에 베이징대학에 국학문(國學門)을 창건한 상태였다. 이와 달리 량치차오는 "칭화학생은 서학을 연구하는 것 외에도 응당 국학을 연구해야 한다. 국학은 입국(立國)의 근본이다"라고 말했다. 칭화의 4대 도사들은 유학파로서 서학에도 능통했다. 천인췌의 경우 10여개 언어에 능통할 정도로 서양 학문에 밝았다.

그러나 칭화 국학연구원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7년 왕궈웨이가 비분에 못 이겨 자살하고, 이듬해에 량치차오가 병으로 교정을 떠나게 되자, 국학원은 1929년에 문을 닫게 됨으로써 칭화 5년이란 신화를 남기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짧은 5년이란 세월동안 국학원은 80여명의 연구생을 배출했다. 그리고 이들 중에 50명의 졸업생이 훗날 중국의 국학 연구에 길이 빛날 대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를 두고 중국에서는 칭화의 '신화(神話)'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야말로 다시는 복제할 수 없는 빛나는 전설의 5년이었다.

칭화의 신화는 위대했지만, 사회주의와 혁명으로 대표되는 중국 근현대사의 궤적 속에서 국학대사의 전설은 퇴색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국공 전투에서 패배한 국민당 정부는 당시 저명한 학자들을 대만으로 공수하려고 집요하게 공을 들였다.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중국 정부는 전 학문에 걸쳐서 이데올로기적인 수정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후쓰는 대만으로 건너가서 자유주의의 학문을 펼쳤고, 꿔머루어(郭沫若)는 신중국의 학문적 작업을 주도하게 되었다. 반면 칭화 4대 도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천인췌는 국민당의 포섭에 응하지 않고 남쪽으로 내려가 광저우 중산대학에 남게 되었다.

▲ 칭화대 국학연구원 원훈
1920년대가 청화의 신화가 발흥한 1기였다면, 신화의 2기는 천인췌가 60세가 되어 중산대학에 머물렀던 무렵인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가 바로 루젠둥이 서사한 <진인각, 최후의 20년>이다. 제1기는 '국학의 정신'으로 보편화되었다면, 제2기는 한 학자의 개인사를 통해 '자유의 의지와 독립의 정신'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제2기의 신화는 중국 내 주류 이데올로기와의 불화 속에서 정련되었다. 천인췌는 195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반우파투쟁의 정서 속에서 학문의 독립과 자유의 사상을 고수했다. 후금박고(厚今薄古)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이 노학자의 학문 방법은 골동품 취급을 받고 퇴물로 매도당했다. 특히 대약진을 거쳐 문혁에 이르는 시기에 이르자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이 천재학자에 대한 세상의 태도는 졸렬의 극치를 달렸다.

눈마저 멀어 볼 수 없게 된 이 노학자의 곁을 지키던 조교들은 모두 탄압을 받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돌아선 제자들은 천인췌의 사상을 비판하는 논문을 잇달아 기재했다. 혁명정신으로 무장한 학생들은 노학자를 앉힌 가상의 의자를 운동장에 놓고 공개 성토하고 침을 뱉었다. 천인췌를 옹호하는 동료 학자들은 수만 장의 대자보 공격을 받았다. 이 와중에서도 천인췌는 불굴의 학문정신을 지키며 수많은 저작들을 조용히 완성시켰다. 그의 인생 역정은 문혁이 한참 달아올랐던 1969년에 끝을 맺었다.

일찍이 천인췌는 1929년 왕궈웨이의 비문을 작성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로지 독립정신과 자유사상만이 천만 년을 거치면서 하늘 땅과 더불어 오래갈 것이며 삼광과 함께 영원히 빛날 것이다." 이 선언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천인췌 자신의 삶을 통해 검증되고 부활하였다.

2009년 11월, 중국 칭화대에서 국학연구원이 다시 설립되었다. 임의로 이름을 붙이자면 제3기 칭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신 국학연구원을 이끌 인물로 천라이(陳來) 원장과 류둥(劉東) 부원장이 추대되었다. 과거의 신화가 너무도 위대하고 격정적이었던지라 칭화 국학연구원의 설립은 국내외 많은 매체들의 주목을 받았다. 매체들은 하나같이 새 국학원의 방향이 중건(重建)인가 신건(新建)인가를 물었다. 후광이 크면 기대도 큰 법이다.

▲ 현 국학원 천라이 원장
이에 대해 천라이 원장은 먼저 국학원의 설립이 오늘날 중국에 불고 있는 국학열과 중국굴기의 시대적 분위기에 힘입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는 결코 과거의 위대한 신화를 재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중건'은 무겁다고 말한다. 그러나 '독립의 정신과 자유의 사상'을 계승하고 세계의 학문과 회통하는 국학원의 유산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볼 때 '신건'만이 아니라는 점을 또한 강조했다.

80여년 전 칭화대학을 떠나 세계를 주유하던 '칭화'의 간판이 다시 본 대학으로 돌아왔다. 신 국학원은 교학보다는 연구를 위주로 하고, 세계 유수의 학자를 초빙하여 강연하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아카데미의 방향을 지향한다고 한다. 중국굴기의 시대에 '칭화의 정신'은 과연 어떤 형태로 구현될 것인가?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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