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분류에 따르면, 나는 "소설을 읽는 사람, 특히 장르 소설을 읽는 사람"에 속한다. 그렇다고, 남다른 마니아여서 장르 소설에 대단한 식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장르(?) 구분 없이 읽는 편이다. 그러던 내가 몇 년 전부터 꼭 챙겨서 읽는 장르 소설들이 있다. 바로 '저널리스트가 쓴 장르 소설'이거나 혹은 '저널리스트가 등장인물인 장르 소설'이다.
사실 이 둘은 많이 겹친다. 외국의 유명한 장르 소설 작가 중에는 저널리스트 출신이 정말로(!) 많고, 그들은 대개 자신을 모델로 했을 법한 저널리스트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소설을 한 편 이상 (혹은 시리즈로) 쓰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을 읽으면서 외국의 동종 업계 종사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재미가 쏠쏠하다.
부제 '여기자 안니카 시리즈'를 달고 나온 리사 마르클룬드의 <폭파범>(한정아 옮김, 황금가지 펴냄)을 보자마자 집어든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를 단숨에 읽고서, 이른바 '스칸디나비아 누아르'에 호기심이 생긴 것도 또 그것의 작가 목록에서 리사 마르클룬드의 이름이 보였던 것도 한몫했고.
'애 딸린 아줌마' 기자는…
▲ <폭파범>(리사 마르클룬드 지음, 한정아 옮김, 황금가지 펴냄). ⓒ황금가지 |
스포일러가 돼서도 안 될뿐더러, 이 책을 잡아든 첫 번째 이유도 '여기자'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었으니 여기서는 그 얘기를 해보자. <폭파범>의 주인공 안니카는 30대 초반에 아이 둘을 둔 맞벌이 여성으로, 스웨덴의 타블로이드 신문 <크벨스프레센>의 최연소 사건팀장으로 막 발령을 받은 상태다.
기본적으로 안니카의 취재를 따라서 전개되다 보니, 이 소설은 자연스럽게 스웨덴에서 '애 딸린 아줌마' 기자의 삶이 어떤지 생생히 보여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복지 국가에서도 애 딸린 아줌마가 기자를 하기는 쉽지 않다. 직장 안팎에서 기자 안니카의 활약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공무원인 남편은 중요한 사건만 터지면 마치 가정은 없는 것처럼 일에만 몰두하는 안니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가스레인지나 조리대를 닦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설거지할 그릇을 식기 세척기에 넣는 일도 거의 없었으며, 옷가지와 뜯어보지 않은 우편물을 침실 바닥에 던져놓곤 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엄마!", "엄마!"를 외치며 안니카의 사랑을 원한다. 다행히 주중에는 "스웨덴의 모든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있기 때문에 마음이 편할 수 있지만" "토요일에는 빵을 구우며 아이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 불행히도 안니카는 "빵을 굽거나 특별한 일을 벌일 때 전혀 즐겁지 않다."
그렇다고, 밖에서 안니카가 마냥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의 승진에 대한 반발이 이렇게나 거셀지 그녀는 꿈도 꾸지 못했다." "사건팀장 자리가 자기 거라고 생각했던" 쉰세 살의 선배부터 펄쩍 뛰었다. "전에는 잠자코 있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안니카의 복장을 트집 잡기도 했다. 그의 성품과 능력에 대해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소설 전체에 걸쳐서 다양한 에피소드로 변주되는 이런 모습에 몇 번이나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이건 한국과 똑같잖아!" 특히 이 소설에서는 여성으로서 스웨덴에서 살아가기가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하는데, 작가는 안니카의 삶을 통해서 그 팍팍함을 생생히 그리고 있는 것이다.
언론의 위기
이 소설에서 관심을 끄는 또 다른 대목은 언론 환경의 변화에 대한 통찰이다. 안니카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스웨덴 언론에서도 후배가 기라성 같은 선배를 제치고 팀장이 되는 경우가 그리 흔한 일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처럼 연차에 따라서 직책과 임무가 부여되는 경직된 모습은 아닌 게 확실하다.
소설 속에서 안니카는 총 3명의 팀원과 1명의 비서를 거느린다. (<크벨스프레센>은 규모만 보면 한국의 대형 언론보다는 <프레시안> 같은 매체의 모습에 가깝다.) 그런데 이 3명의 팀원 중에서 안니카의 후배는 단 한 명뿐이다. 그리고 젊은 그를 팀장에 올린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의 유력한 후견인으로 등장하는 편집국장 안데르스 쉬만의 속내를 들어보자.
"<크벨스프레센>의 표준 독자는 스웨덴 남성으로서, 20대부터 줄곧 <크벨스프레센>을 구독해온 54세의 블루칼라 노동자였다. (…) 신문들은 저마다 하늘이 무너져도 달려가서 자기네 신문을 집어들 충직한 독자들을 갖고 있었다. (…) <크벨스프레센>의 경우에는 그런 독자들이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처럼 그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 이제 (<크벨스프레센>은) 새로운 독자층을 확보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 그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간부들이 필요했다. 45세 이상의 남자 간부들한테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안데르스 쉬만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개혁을 단행할 방안도 마련해 두고 있었다."
쉬만은 안니카를 바로 그런 변화를 이끌 적임자로 생각한다. 이런 <크벨스프레센>의 고민은 사실 한국 언론의 고민과 그대로 겹친다. <폭파범>이 발표된 시점이 1998년이니, 이미 10년 전부터 스웨덴에서는 '이탈하는 독자'를 잡기위한 언론의 치열한 몸부림이 시작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독자는 계속 떨어져 나가는데도 여전히 40대 이상의 남성 기자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내용, 형식을 똑같이 재생산하는 한국 언론은 그런 변화를 위한 몸부림을 시작했는가? 한국의 안니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법한 여기자들이 여기저기서 유리 천장에 부딪쳐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면, 글쎄….
스칸디나비아 누아르의 진짜 매력
사실 미국의 마이클 코넬리나 일본의 미야베 미유키 같은 작가의 작품에 익숙한 혹은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이 보이는 무협지(!) 뺨치는 전개를 기대한 독자라면 <폭파범>은 지루한 편이다. 의외의 결말도 그다지 와 닿지 않아서 "스웨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자 "스칸디나비아 5개국 전체에서 베스트셀러"였다는데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폭파범>이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진짜 이유는 앞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고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점이 아닐까? 한국 소설이 정작 '한국 사회'를 보여주지 못할 때, 스웨덴의 장르 소설은 끊임없이 '스웨덴 사회'에 대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의 저널리스트 중에는 왜 한국 사회에 밀착한 장르 소설(혹은 소설)을 써내는 작가가 나오지 못할까? <폭파범>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이 한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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