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황영조·이봉주…새로운 마라톤 영웅의 등장?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황영조·이봉주…새로운 마라톤 영웅의 등장?

[예병일의 '스포츠 뒤집어보기'] 마라톤 유망주 정진혁

지난 3월 20일, 동아일보가 주최한 서울국제마라톤 대회에서 새로운 신인이 등장했습니다. 처음부터 선두 그룹에 몸을 담고 있다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갈 무렵, 선두로 나서는 모습은 19년 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몬주익의 언덕을 넘어서는 순간 앞으로 내달리던 황영조의 모습을 연상시켰습니다.

국내에서 벌어진 경기이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한국 선수가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보나 했는데 안타깝게도 막판 역전을 허용하며 2위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1990년대만 해도 한국 마라톤은 세계 정상권에 근접해 있었습니다. 2시간 10분 이내의 기록을 가진 황영조, 이봉주, 김완기, 김재룡, 김이용 등이 경쟁적으로 기록을 쏟아내고 있었고, 2000년이 되어서야 9분대에 진입한 백승도도 1990년대에 2시간 10분 7초의 기록을 보유하면서 5000미터 달리기에서 얻은 명성을 마라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한국 마라톤이 보여 준 것은 그 이전의 10년과 비교할 때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우승자인 지영준이 2003년 서울국제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8분 43초의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등장함으로써 김이용과 함께 1990년대 4인방의 뒤를 이을 기대를 가지게 했을 뿐, 그 지영준과 김이용이 모두 수년간 기록을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의 중반부에는 1990년대의 스타 이봉주만이 한국 마라톤을 혼자 어깨에 걸머지고 2003년 런던마라톤대회, 2004년과 2007년 서울국제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8분대를 기록하면서 한국 마라톤을 지켰습니다. 다행히 한동안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을 한 지영준이 2009년 4월 12일에 열린 대구국제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8분 30초를 기록하며 자신이 건재함을 과시했고,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이봉주와 김이용이 떠난 한국 마라톤계의 명실상부한 간판스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정진혁이라는 새로운 유망주가 등장했으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라톤을 평정한 걸출한 신인

▲ 지난 3월 20일, 2011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겸 제82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9분 28초 기록으로 2위를 차지한 정진혁이 잠실종합운동장 결승선을 통과하며 환호하고 있다. ⓒ뉴시스
지금까지 정진혁은 마라톤을 단 세 번밖에 완주하지 않았습니다. 마라톤 팬을 자처하면서도 이름조차 생소한 정진혁이 아주 훌륭한 기록으로 등장했기에 관련기사를 검색하다 재미있는 표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연합뉴스>에서 황영조, 이봉주, 정진혁 등 세 선수의 기록을 비교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보기)

스포츠 계에서 유망주라 불리는 신예들은 수시로 등장하지만 그 중 일부만이 기대에 걸 맞는 활약을 펼칠 뿐 많은 유망주들이 유망주로 머물다 그냥 사라지고 합니다. 정상은 하나지만 정상을 노리는 선수, 정상에 도전할 만한 자질을 가진 선수들은 얼마든지 있으니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체코 출신의 자토펙(1922~2000년)은 마라톤에 처음 출전한 것이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한 것이었으니 인류 역사상 가장 걸출한 신인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5000미터 은메달, 1만 미터 금메달을 획득했고,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5000미터와 1만 미터 달리기 두 종목에 걸쳐 금메달을 획득하여 두 종목에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는 상태에서 마라톤 출전을 선언했을 때 육상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금메달 후보로 손색이 없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가 대단하다는 건 우승을 했을 뿐 아니라 올림픽 기록을 세웠다는 점입니다. 자토펙은 마라톤계의 유망주였을 뿐, 진짜 실력은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처음 출전한 마라톤 종목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으니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마라톤 계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었으니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여자 마라톤 한국 신기록 보유자인 권은주가 그 주인공입니다. 1997년 10월 11일, 제78회 전국체전대회에서 5000미터 달리기에서 한국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할 때만 해도 흔히 등장하는 새로운 유망주의 한 명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2시간 8분 29초를 기록하며 10년 묵은 이미옥의 20킬로미터 달리기 한국 신기록을 깨는 순간, 누가 봐도 한국 여자 마라톤을 짊어질 기대주임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이미 마라톤 훈련을 받고 있었고, 그 지도자가 바로 당대 최고인 코오롱의 정봉수 감독이었으니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2주일이 지난 10월 26일, 춘천에서 열린 조선일보국제마라톤대회에서 중계 화면에 비친 여자 선수는 권은주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시작부터 혼자서 달려 나갔기 때문입니다. 해설자는 권은주 선수의 페이스를 설명하면서 한국 신기록 수립이 유력하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고, 체코에만 인간 기관차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도 새로운 인간 기관차가 나타났음을 보여 주듯 권은주 선수는 지칠 줄 모르는 질주에 의해 중간 지점에 이르기 전부터 한국 신기록 수립이 유력함을 보여 주더니 첫 출전한 마라톤 대회에서 한국 신기록으로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러나 혜성처럼 나타난 권은주는 족저근막염이라는 운동선수에게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해 그 후로 뚜렷한 활약을 하지 못한 채 결국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한국 여자 마라톤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줄 것이 분명했던 권은주가 병마와 싸우다 결국 마라톤 계를 떠난 것은 본인에게나 한국 육상계 모두에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로지 유망주에만 그친 한국 남자 선수들

자토펙이야 마라톤 출전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다시피 출전한 것이었으니 한 번의 출전 후 곧 은퇴를 했지만 단 한 번의 정상 정복이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한국 마라톤을 짊어질 만한 기대주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낸 후 더 이상의 향상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져버린 선수들이 꽤 있습니다.

1992년은 많은 분들이 기억하듯이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제패한 해입니다. 1991년에 처음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그는 동아마라톤대회와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연속하여 2시간 12분대의 기록을 보여주며 유망주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동계 훈련이 막바지에 이른 1992년 2월 2일, 벳부-오이타 마라톤 대회에서 약 3개월 전에 세워진 김완기의 한국 기록(2시간 11분 2초)을 자그마치 2분 15초나 앞당기며 우승을 차지하자 그 소식이 국내 텔레비전에 긴급 속보 자막으로 전해졌습니다.

유망주의 한 명에 불과했던 신예 황영조가 두각을 나타내자 그 해의 동아마라톤 대회는 시작 전부터 기대가 대단했습니다. 2시간 11분 2초라는 이전 한국 기록을 깰 만한 능력을 지닌 선수가 여럿 있었고, 이미 황영조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며 커다란 자극제가 된 상태에서 올림픽을 앞두고 모두들 동계 훈련을 착실히 받았기 때문입니다.

2시간 11분벽을 처음 깬 것은 황영조였지만 수년 전부터 한국 신기록을 수립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재룡과 김완기 선수가 2시간 9분 30초와 2시간 9분 31초를 기록하며, 단숨에 자신의 최고 기록을 1분 30초 이상 앞당기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로써 세계 마라톤 계에서 변방 취급을 받던 대한민국에서 2시간 10분 이내의 기록을 가진 선수만으로 올림픽 선수단을 구성하게 되었고, 결과는 황영조의 우승으로 연결되었습니다.

56년 만에 한국 마라톤이 올림픽을 제패하자 르네상스가 찾아오는 듯했습니다. 김연아의 올림픽 제패 이후 여자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관심이 배가되었듯이 마라톤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배가된 것입니다. 그 해 11월 6일, 조선일보마라톤대회의 열기도 대단했으며, 우승자는 2시간 10분 12초를 기록한 건국대학교의 장기식이었습니다.

그 해 동아마라톤대회에서 3위를 한 백승도의 기록이 2시간 10분 7초였으므로 한국 현역 선수 중 5위이자 역대 5위이기도 한 대단한 기록을 대학생이 작성한 것입니다. 황영조, 김완기, 이봉주, 이창우를 보유한 코오롱과 김재룡, 백승도에 장기식, 유영훈이 가세하게 되는 한국전력이 선의의 경쟁을 통해 한국 마라톤을 이끌어 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 것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황영조의 뒤를 이어 한국 마라톤을 세계에 알릴 것으로 기대했던 장기식은 그 날의 기록이 평생 최고의 기록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동아마라톤대회 역사상 한국 선수들끼리의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해는 1987년일 것입니다. 무더기를 이룬 선두 그룹의 컨디션이 워낙 좋았으므로 출발 후 5킬로미터를 지날 무렵부터 한국 신기록 수립이 기대되더니 20킬로미터를 지나면서부터는 몇 명이 어떤 기록으로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을 뿐, 누구도 한국 신기록 수립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1974년부터 10년간 이어져 온 문흥주의 한국 기록(2시간 16분 15초)이 10년 만에 동아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14분 59초를 기록한 이홍렬에 의해 깨진 후(2시간 15분 16초로 2위를 한 채홍락도 한국 신기록을 수립함), 계속해서 유망 선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에 매년 동아마라톤대회가 열릴 때면 한국 신기록을 기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의 한국 기록은 그 전해 동아마라톤대회에서 유재성이 기록한 2시간 14분 6초였으며, 이때도 2위와 3위를 차지한 정만화와 반영만이 모두 한국 신기록을 수립한 바 있습니다. 1987년 대회의 1, 2, 3위는 각각 2시간 12분 21초, 23초, 26초를 기록한 이종희, 허의구, 김원탁이었습니다. 이미 국가 대표 급 활약을 보여주고 있던 허의구, 김원탁과 더불어 신인인 이종희가 선수그룹을 형성할 때만 해도 이종희의 우승을 점치는 이들은 드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인이라 할 수 있는 이종희가 기대주인 선배들과 한 덩어리를 이룬 채 경기를 벌인 후 마지막에 한국 신기록으로 우승을 하자 마라톤 계는 축제 분위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한국 마라톤도 30킬로미터를 지날 때까지는 5~10명의 선수가 함께 한국 신기록을 노리다가 막판에 질주하는 선수가 우승을 하는, 세계적인 유명 대회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한국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김원탁은 2시간 11분 38초, 허의구는 2시간 10분 19초로 자신들의 최고 기록을 바꾸며 한국을 대표할 만한 선수로 활약한 것과 달리 이종희는 그 날 이후 어떤 활약도 보여주지 못한 채 사라져 갔습니다.

장기식의 맞수라 할 수 있는 유영훈(최고기록 2시간 10분 12초)과 형재영(최고기록 2시간 10분 37초)이 1990년대 중반에 유망주의 꼬리표를 떼고 국가 대표 팀에 끼었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을 때 황영조, 이봉주, 김완기, 백승도 등이 한국 마라톤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거의 40세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좋은 성적을 거둔 이봉주를 예외로 하자면 이들이 모두 하향 길에 접어들며 21세기를 맞이할 때까지 유망주라곤 김이용 한 명밖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형재영마저 하향 길에 접어들어 이제 세계 시장에 내놓은 만한 선수라고는 이봉주와 김이용밖에 남지 않았을 때 새로운 유망주가 출현했습니다. 2000년 3월 19일, 서울 국제마라톤대회에서 한국체육대학 소속의 정남균이 우승을 차지한 것입니다. 1986년 아시안게임 남자 800미터 달리기 금메달리스트로 중거리 달리기 지도자 생활을 해야 마땅할 한국체대 김복주가 정남균이라는 마라톤 유망주를 지도하기 위해 마라톤 공부를 새로 했다는 인터뷰는 물론, 동아마라톤대회가 국제마라톤대회로 승격(?)된 후 우리나라 선수가 우승하는 일이 흔치 않던 상태에서 우승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2시간 11분 29초라는 기록에 대한 아쉬움을 덮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한국 마라톤을 짊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이종희, 장기식, 정남균 모두 첫 단추만 잘 꿰었을 뿐 더 이상의 뭔가를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이외에도 1986년 아시안게임 5000미터 달리기에서 금메달을 딴 김종윤도 계명대학교 재학 시절인 1982년에 처음 출전한 (동아)마라톤대회에서 문흥주 이후 처음으로 2시간 16분대를 기록하며 그 해 아시안게임 대표 선수로 선발되었으나 그것이 최고 기록이었고, 제2의 황영조라던 제인모도 선수 생활 초창기에 세운 기록을 끝까지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유망주가 정상에 서는 것이 어려운 일임은 물론,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진혁은?

마라톤 관계자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2011년도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기록을 보고 있자니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정진혁을 제외하고 세 선수가 10위 안에 들었고, 모두 젊은 모두 젊은 선수들이어서 장래를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건 좋지만 2시간 16분대의 기록은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20년도 더 전에 동아마라톤대회에서 5위 안에 들지도 못할 기록으로 한국 선수 중 2, 3, 4위를 기록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작년 대회에서는 코오롱의 박영민이 2시간 12분 43초, 건국대학교의 김민이 2시간 13분 11초를 기록한 바 있습니다. 가냘픈 체구에도 불구하고 30킬로미터 지점까지 (2시간 6분대로 한국에서 개최된 마라톤 대회 역사상 최고 기록을 수립한) 우승자와 나란히 달렸던 김민은 올해 큰 기대를 안고 출발했으나 악천후에 따른 체온 저하로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선수들과는 현격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그의 신체 조건(키와 비교할 때 체중이 워낙 적어서 체지방량이 부족하므로 추운 날씨에 취약함)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가 아니라 할 수는 없습니다. 부디 다음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지영준, 정진혁과 함께 8월에 대구에서 벌어지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주었으면 합니다.

정진혁이 1990년대에 2시간 9분 28초를 기록했다면 황영조, 김완기, 김재룡에 이어 백승도, 장기식과 함께 또 한 명의 잘 하는 선수로 남았을지 모르지만 20년이 지나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국 마라톤을 생각하면 가뭄속의 단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위에 예를 든 다른 유망주들처럼 이대로 사라질 것인지, 앞으로 한국 마라톤의 대들보가 될 것인지 예상하기가 쉽지 않지만 제가 내기를 걸어야 할 상황이 온다면 저는 대선수로 성장하는 일에 베팅을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번 기록이 첫 출전이 아니라 세 번째 출전이며, 지난 1년간 계속해서 기록이 향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궂은 날씨 탓에 우승자의 기록이 작년보다 3분이나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2시간 9분대를 기록하여 우승자와 18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은 것은 대단한 기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 출전한 작년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15분 1초, 다음 출전한 중앙국제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10분 59초, 이번에 2시간 9분 29초를 기록했으니 기록이 계속 향상되는 것은 물론이고 세 번 출전하여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점이 그의 실력은 잠깐 발휘된 초능력이 아니라 이미 기본이 갖추어져 있는 상태에서 형성된 기록임을 증명해 줍니다.

지영준 혼자 짊어지다시피 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진혁, 김민과 같은 대학생 유망주들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반가움을 느끼며, 앞으로 이들이 수시로 매스컴에 오르내리며 과거에 황영조, 이봉주, 김완기 등의 선수가 그랬듯이 마라톤을 "바로 우리 곁에 있는 경기"로 만들어주기를 기대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