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가공할 위력을 지닌 강진에 이은 엄청난 지진 해일, 그리고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같은 대재앙이 생기면 공중은 과학적 지식이나 합리적 사고에 바탕을 둔 행동을 하지 않는다. 특히 과학기술이나 과학기술자, 정부와 정부 관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지면 비이성적 사고와 행동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간다. 이런 틈을 타 일부 종교인(기독교)들은 땅 속에 묻힌 지 오래된 '신의 천벌' 이야기를 다시 부활시킨다.
이성적 사고가 마비된 공황(패닉) 상태의 공중은 소금을 사재기하거나 요오드가 다량 들어있다는 식품 구입에 열을 올린다. 요오드가 들어 있는 식품 구입이나 소금 사재기, 요오드 알약 구하기 등이 방사능 피폭 공포에 휩싸인 일본에서보다도 러시아와 중국, 미국에서 더 심각하게 벌여졌다고 하니 이 또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대재앙 앞에서는 첨단 과학도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대재앙을 신의 천벌로 본 인간의 역사는 오래됐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중세 흑사병이다. 당시에는 질병의 전염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쁜 공기(장기, 瘴氣)와 지진, 혜성, 고양이, 개, 나환자, 집시, 그리고 유대인 탓을 했다. 전 유럽에서 대학살이 시작됐다. (독일) 마인츠에서만 1만2000명의 유대인이 산 채로 불탔다. 일본 관동 대지진 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인의 희생양이 됐듯이 유대인들은 흑사병이라는 대재앙을 맞아 이성을 잃은 기독교인들의 제물이 됐다.
흑사병을 신의 천벌로 본 사람들은 자신을 채찍으로 갈기며 속죄함으로써 신의 분노를 달래려 했다. 유럽의 거리마다 수만 명의 편타고행자(鞭打苦行者)들이 넘쳐났다. 교황도 처음에는 그들의 행진, 집회에 '내 큰 탓이오(Mea Maxima culpa)'라는 외침 소리로 축복했다. 하지만 그 수가 많아지고 폭도로 변하며 그 집단이 종교화되자 교황은 칼과 불(화형)로 그들을 억압했다. 그래도 흑사병은 멈추지 않았다. 흑사병은 신의 천벌이 아닌 병원체가 옮기는 전염병이었으므로.
▲ 중세 시대 흑사병이 창궐하자 집단 화형을 당하는 유대인. ⓒwikipedia.org |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탐험 이후 유럽인들은 두창과 홍역 등의 무서운 전염병을 원주민들에게 전파했다. 원주민들에게 이들 전염병은 불벼락과 같은 대재앙이었다. 콜럼버스가 처음 상륙한 바하마에서는 전염병이 돌아 1548년 이 섬의 인구가 100만 명에서 500명으로 줄었다. 한 총독은 이렇게 말했다.
"신도 그렇게 못생기고 타락하고 죄 많은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죽은 것은 신의 뜻이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도 유럽인들이 뿌린 전염병의 병균을 피해갈 수 없었다. 뉴잉글랜드 주지사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이 유행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올 봄에 또 무역관 부근에 사는 인디언들이 두창으로 쓰러져 아주 비참하게 죽었다. 그들은 더 무서운 병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흑사병보다 더 두려워했다. (…) 추장인 사쳄이 죽었고 그의 모든 친구와 친척들도 죽었다. 그러나 신의 놀라운 은총과 자비 덕분에 영국인들은 한 명도 그렇게 아프지 않았고 심지어 병에 걸리지도 않았다."
유럽인들은 인디언들이 두창에 걸려 저항하지 못하고 손쉽게 그들의 삶터를 내주자 신이 자신들에게 내린 축복이라고 여겼다(<전염병의 문화사>(아노 카렌 지음, 권복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160~162쪽).
비과학 또는 반과학이 사회를 지배하고 비이성적 사고가 만연한 사회는 한마디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말했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다. 전염병을 신의 벌로 보았던 중세 흑사병 창궐 시대가 그런 세상이었다. 그 때만이 아니다. 첨단 과학 시대에서도 '악령'은 출몰하고 있다. 일본 사상 최대의 지진과 지진 해일 참사를 겪고 있는 일본에서 출몰한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악령'이 출몰했다.
일본인들이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을 때 순복음교회의 창시자이며 지금도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하고 있는 조용기 원로목사가 중세 때의 '악령'을 이 땅에 부활시켰다. 그는 일본의 불행을 두고 "다신주의 국가인 일본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다른 일부 기독교 목사들도 아무 거리낌 없이 '악령 숭배'에 기꺼이 동참했다. 부끄러운 '마녀 사냥'을 하던 중세 교회의 '악령'이 되살아난 것일까? 길거리에서 '불신 지옥'을 외치던 광신도의 '악령'이 깃든 것인가?
한국의 일부 기독교 목회자들은 지진이나 지진 해일과 같은 대재앙이 기독교 국가에서 생기면 자연재해로, 비기독교 국가에서 생기면 신의 천벌로 매우 편리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기독교 국가가 아닌 곳에서 재앙일 생길 경우 이를 자연재해나 인재(人災)가 아닌 신재(神災), 즉 "하나님"이 내린 벌로 여기는 것은 참회해야 할 어두운 중세 교회의 과거를 되살리는 것임에 틀림없다.
일본 재앙을 지켜보면서 대재앙 앞에서 인간은 여전히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은 첨단 과학 시대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는 사실도 새삼 느끼고 있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과 사회 지도층도 말기암에 걸려 의사들이 치료를 포기할 경우 민간에서 떠도는 유황오리, 죽염 등 이른바 암에 좋다는 비과학적 요법이나 식품에 매달린다. 이를 악용해 엉터리 암 특효약을 팔아먹는, 배짱 좋은 사이비 치료가들도 있다.
100년 전에도 이런 악령이 출몰한 적이 있다. 악령은 혜성과 함께 갑자기 나타났다. 혜성의 이름은 핼리였다. 1910년 핼리 혜성은 76년 만에 지구를 다시 찾아왔다. 혜성, 특히 핼리 혜성이 지구 가까이 올 때마다 사람들은 악령에 깃들었다. 핼리 혜성의 꼬리 부분이 지구를 스쳐지나갈 것이라는 예측과 혜성 꼬리에는 시안이 들어있다는 천문학자(윌리엄 허긴스)의 연구 결과가 겹쳐 수많은 사람들이 겁을 먹었다. 사람들은 혜성의 꼬리 부분이 아주 희박한 기체로 이루어져 있고 혜성의 꼬리 독은 공장 연기로 오염된 1910년의 대도시 대기오염 물질보다도 훨씬 안전하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일부 신문들도 매우 자극적이고 비과학적인 제목을 뽑았다. <로스앤젤레스 이그재미너>는 "혜성의 시안은 아직도 당신을 죽이지 않았는가" "전 인류가 마침내 무료 가스실로" "난장판이 다가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시안의 냄새를 맡았다' 따위로 독자들에게 겁을 주었다. 이런 악령이 깃든 신문을 읽은 사람은 혜성의 독(시안)이 별 것 아니라고 과학자들이 말해도 이를 믿지 않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칼 세이건은 그의 명저 <코스모스>, <혜성> 등을 통해 1910년에는 시안 가스 오염으로 지구의 종말이 오기 전에 즐겨야 한다며 세계 곳곳에서 파티가 유행했다고 전했다. 당시에는 또 장사꾼들이 '혜성의 액땜 알약'이라든가 방독 마스크를 팔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혜성의 독가스는 단 한명의 지구인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군인들)이 진짜 독가스로 죽어 간 것은 그로부터 4년 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해 독일이 독가스를 화학무기로 사용하면서부터다. 1986년 핼리 혜성은 어김없이 76년 만에 다시 지구를 방문했지만 더는 '악령'과 함께 오지 않았다.
▲ 76년 주기로 긴 꼬리를 휘날리며 지구에 근접하는 핼리 혜성의 모습. 1910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wikipedia.org |
우리 인간에게는 여전히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인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두려움 앞에서는 이런 비이성적 유전자에 불이 켜진다. 일단 이 유전자에 불이 켜지면 그에게는 과학적 사고에 따른 행동을 하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정보의 소통이 막히고 불신이 판을 치면 비이성적 유전자는 증폭된다.
핵은 그 어느 위험보다도 인간의 비이성적 유전자 스위치를 켤 가능성이 높은 위험이다. 일본 핵 재앙은 이제 핵발전소를 판도라의 상자 속에 다시 넣거나 더욱 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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