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대흥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니 안개비가 내렸다. 초의선사가 머물렀다는 일지암과 달마산의 미황사, 윤선도의 유적지인 녹우당과 금쇄동을 오가는 동안 비는 점점 굵어져 다산초당을 올라가는 길에는 제법 소나기가 내렸다.
겨울의 추위가 남긴 상처를 보듬고 봄기운에 몸이 퍼진 부드러운 산이 안개를 뿜어내며 비를 맞고 있었다. 우산을 받쳐도 옷자락이 흠뻑 젖었지만, 봄비에 초목이 싱그러워질 것처럼 나 자신 또한 새봄을 앞두고 솟아나는 생명의 에너지를 예감할 수 있었다.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 나온다
(박노해의 '길이 끝나면' 부분)
답사를 하고 다녀오는 길에 봄비를 생각했다. 그리고 답사 여행을 이끌어 준 학교도서관네트워크의 공동대표 김경숙 선생님과 부군 되시는 자래 선생님을 생각했다. 저절로 내리는 봄비가 산천초목에게 더없는 이로운 일이 되듯이, 그분들의 남도에 대한 애정과 시가 문학의 해박한 지식을 맛있게 나누어 준 답사 일정은 일행들에게 참으로 이로운 일이 되었다. 열심히 살아가는 삶이 누군가에게 이로움을 주는 일에 대해 생각이 오래 머물렀다.
새 학기에 서울의 강서쪽, 산자락에 자리 잡은 학교로 둥지를 옮겼다. 여고 1학년의 담임을 맡고, 3월 2일 입학식을 치르는 날, 두 명의 학생이 전학을 갔고, 다음날 한 학생이 전학을 왔다. 수녀님이 손을 잡고 온 전학생은 우리말이 서툴고 얼굴에 흉터가 있지만, 참 눈매가 고운 아이였다. 그 아이는 3개월 전에 혈혈단신으로 북에서 건너와 타국을 떠돌다 한국으로 들어온 앳된 소녀였다.
바람에 꽃씨가 난다
하얗게 하얗게
길 없는 허공을 난다
하지만 저 작은 꽃씨는 안다
바람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다 주는지
세계의 바람이 분다
거세게 거세게
똑같은 길로 모두가 날아간다
하지만 그 누구도 모른다
바람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박노해의'그 누구도 모른다' 전문)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박노해 지음, 느린걸음 펴냄). ⓒ느린걸음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걸음 펴냄)는 지난해 출간된 박노해 시인의 신간 시집이다. 1980년대 노동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시를 쓰며 노동의 가치를 일깨우고, 조국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시인은 생명과 평화의 사상으로 서남아시아,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등 지구 속 가장 어둡고 아픈 곳을 누비며 평화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그 속에서 썼던 깊고 맑은 시, 언어가 허실이 되지 않고 사랑이 되고, 기도가 되는 300여 편의 시를 묶어 출간했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총구 앞에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양심과 정의와 아이들이 학살되는 곳
이 순간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다.
(박노해 '나 거기 서 있다' 부분)
시인은 가장 아프고 힘든 상처 속에서 희망을 본다. 겨울의 폐허 속에서 새봄을 본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상처투성인 삶이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온통 세상이 절망으로 무너져 내리는 감당하기 힘든 현실 앞에 시인은 "힘들게 쌓아올린 지식은 사라져도 지혜는 남아", "사람은 사라져도 사랑은 남아"라는 작은 위로의 노래를 불러준다.
그대 눈물로 상처를 돌아보라
아물지 않은 그 상처에
세상의 모든 상처가 비추니
상처가 희망이다.
('상처가 희망이다' 부분)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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