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하였던 <슈퍼스타 K>라는 프로그램은 케이블 방송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기적을 노래하라'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이 프로그램은 134만6402명 중 단 한명의 슈퍼스타를 선발하는 쇼였다. 최고의 노래와 춤 실력 그리고 스타성을 가졌다고 평가받은 단 한명, 어마어마한 경쟁에서 승리한 1등은 큰 액수의 상금과 고가의 부상을 수여받고 연예계에 진출할 수 있는 특혜를 제공받았다.
높은 시청률과 이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분명 성공(?)한 프로그램이었음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들에게 이 프로그램이 그토록 매력적이었는가?
어떤 칼럼에서는 이 프로그램의 성공 요인으로 '정의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을 충족시킨 점을 들고 있다. 허각이라는 최종 승자는 환풍기를 다는 노동자였는데,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키가 큰 것도 아니며 몸매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1등을 차지하였다. 이런 점을 미루어 그 칼럼의 필자는 장관 딸 특채와 같은 부정의(不正義)한 사회적 문제로 얼룩진 우리의 사회에서 오로지 '실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정의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이전에 영화 <슈퍼맨>을 보면서 대중들이 열광했던 것처럼, 대중이 최종 승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다고 본다면 이해가 된다. 배경도 없고 돈도 없어 늘 사회적 경쟁에서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대중은 자신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당당히 경쟁에서 오직 실력만으로 1등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의가 세워지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프로그램에서 내세운 '기적을 노래하라'는 슬로건에서 '기적'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바로 정의로운 것들이 부정의한 것들을 뒤집어엎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꾸는 바로 그러한 '기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적에 대한 열광에는 불편함이 남는다. 그 불편함은 어느 코미디언이 외치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를 떠올리며 시작한다. 왜 1등에게만 상금과 부상을 수여하는가? 왜 오직 단 한 사람의 승자만이 모든 분배를 '독식'하는가? (물론 최종 승자인 허각 외의 사람들이 비록 상금과 부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연예계에 진출하면서 나름의 보상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그 쇼의 목적이 어쨌든 최후의 승자 1인을 선출하는 것이었으며 그 1인에게만 상과 부상을 수상함으로써 1등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문제를 야기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주는 책이 바로 로버트 프랭크와 필립 쿡의 <승자 독식 사회(The Winner-Take-All Society)>(김양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이다.
이긴 자가 모두 가지는 사회
▲ <승자 독식 사회>(로버트 프랭크·필립 쿡 지음, 김양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
이러한 승자 독식 사회는 "최고 실력자가 고부가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서비스를 얻으려는 경쟁이 있"(81쪽)을 때 만들어진다. 이는 오늘날 유명한 연예인의 한 달 수입만 보더라도 이해가 된다. 최종적으로 선발되는 우리의 슈퍼스타는 그만큼의 충분한 고부가 가치를 생산할 수 있으며, 그러한 슈퍼스타를 원하는 기획사가 있으며, 그에게 열광하는 수많은 팬이 있다. 비단 승자 독식 사회의 모습은 연예계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 경제 등과 같은 많은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즉,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승자 독식의 구조가 엄연히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승자 독식 사회에서의 경쟁이 지위 군비 경쟁을 부추긴다는 데 있다. 그것은 대학의 서열화(192~215쪽)만 보더라도 확인할 수 있다. 일류 대학을 나온 자는 그렇지 못한 자들에 비해 더 많은 수입과 사회적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지위를 확보할 확률이 크다. 따라서 일류 대학에 진학하려는 경쟁은 심화될 수밖에 없으며,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지출되어야 하는 비용(예컨대 사교육비 증가)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소득=학력'이라는 구조로 연결된다. 한 신문사의 조사에 따르면 고소득 가구일수록 학력 수준이 높으며 그러한 가구의 자녀가 소위 명문 대학에 진학할 확률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경향신문> 2009년 3월 15일자) 부와 학력의 대물림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머턴의 말을 인용하여 이런 현상을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요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마태복음>의 구절을 따서 '마태 효과(Matthew effect)'(57쪽)라고 부른다.
경쟁과 사회적 욕망 그리고 승자와 패자
그렇다면 승자 독식 사회에서의 경쟁을 부추기고 있는 근본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보크에 따르면 그것은 "욕망에 대한 사회적 승인"(99쪽) 때문이다.
그것은 저자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내용들을 미루어 본다면 한편으로 '차이=차별'이라는 도식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소비 사회에서의 차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가진 것과 소수의 사람이 가진 것, 그 소수의 사람과 그보다 더 소수의 사람이 가진 것이라는 구분을 통해 차별이 된다. 소유의 차이가 동일하지 않음의 강조로, 그리고 비동일성이 결핍의 이름으로 명명되고, 나아가 그 결핍을 충족시키는 것을 욕망으로 코드화한다.
이것을 좀 더 확장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설명하는 '물신주의'를 떠올릴 수 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물신주의는 양화할 수 없는 대상의 가치를 화폐 가치와 동일하게 놓고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이것은 허위의식이라는 의미에서 이데올로기 효과의 결과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행하고 있다(Sie wissen das nicht, aber tun est)"고 말한다.
지젝이라는 철학자는 이러한 마르크스의 명제를 다시 해석한다. 지젝에 따르면 우리가 교환을 하면서 '모르는 것'은 물신주의적인 환영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가 아무리 '냉소적 거리두기'를 하여도 마찬가지이다. 값비싼 고급 승용차의 화폐 가치가 그 사람의 가치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의식적으로 안다는 냉소적인 이성을 작동시켜도 여전히 그것을 '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것은 "초연함으로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근본적인 수준을,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인 현실 자체를 구조화하는 수준"을 방치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게 하는 환영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지젝에 따르면 이 환영은 잉여 향락에 따른 믿음의 전이에서 발생한다. 우리의 몸은 오랜 관습적인 생활에서 그것에 따라 행동할 때 어떤 잉여를 전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물의 가치를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동일시하는 것은 많은 유용성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지젝이 들고 있는 예를 옮기자면, 유태인이 우생학적으로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믿는 이유는 자신이 유태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유태인이 그렇다고 믿음으로써 자신에게 어떠한 잉여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젝에게 이러한 믿음은 사유를 통해 형성되는 앎이 아니다. 그것은 잉여 향락을 경험하였거나 기대하는 우리 몸의 경험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형성되는 '현실 추상화'의 결과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개인의 욕망은 신체의 행위와 관계하는 것인 동시에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욕망이다. 또한 그 욕망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믿는 것은 타인의 믿음이 된다.
타인의 믿음을 믿는 것은 우리를 사회적 욕망 속에 계속해서 잡아둔다. 그 욕망은 차이를 생성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차이를 제거하려는 긴장 속에서 지탱된다. 최고는 최고가 아닌 것과 차이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최고가 아닌 것은 최고와 차이를 좁히기 위해, 더 정확히는 또 다른 최고가 되려고 한다. (이는 소위 사치품이라 불리는 신분재(status goods), 지위재(positional goods)의 가격 상승률이 여타의 것보다 훨씬 빠르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64쪽)
이것은 우리 안에서 모두가 욕망해야 하는 욕망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욕망은 정상적인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욕망을 가지지 않는 자는 나약하거나 꿈이 없거나 괴상한 자 곧 비정상이 된다. 그리고 사회로부터 어떤 잉여를 향유할 수 없는 경계 밖의 '그 무엇',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하거나 기껏해야 아주 작은 보상을 받는 패배자가 된다.
승자 독식 사회를 벗어나기 위하여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승자 독식 사회가 우리를 무한한 경쟁의 쳇바퀴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 쳇바퀴는 차이와 동일성의 경계, 승자와 패자의 경계를 의미한다. 승자 독식 사회에서 우리는 그 경계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한 고단하고 무한히 회귀적인 마라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러한 승자 독식 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방안들로 조세 제도의 개혁 등 몇몇 분야에서의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270~294쪽). 하지만 오히려 이 책의 저자가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주목할 만한 방안은 글의 전반에 걸쳐 관통하고 있는 내용 속에서 읽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연봉이 몇 억이 되는 CEO, 톱스타는 그것을 희망하는 수많은 사람 중 지극히 소수이다. 나머지는 그 최고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최고가 아닌 것이 될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지속되어야 하는 환상이다. 그 환상은 모두에게 동일한 꿈을 꾸게 하면서 자신의 내적 에너지를 허비하게 만든다.
따라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오히려 '각자가 각자의 꿈'을 꾸라는 것에 있는 것 같다. 그때에 비로소 경쟁의 과잉 밀집을 막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삶의 고단함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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