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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북 오른 전설의 주인공, 박주봉을 아십니까?

[예병일의 '스포츠 뒤집어보기'] 배드민턴의 신화, 박주봉

51년 만에 우승을 노리던 아시안컵 축구 대회에서 한국 대표 팀은 아쉽게 3위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이왕이면 우승을 했으면 밤잠을 설친 팬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겠지요. 하지만 3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아시안게임이나 아시안컵 대회에서 볼 수 없었던 환대를 받으며 귀국할 수 있었으니 이번 대회만큼은 팬들이 결과보다 과정에 비중을 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이 아시안컵 대회를 계기로 세계적인 축구 선수 박지성이 국가 대표 팀을 은퇴해 많은 팬들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또 지난 1월 30일에는 이용대와 정재성으로 구성된 배드민턴 남자 복식 대표 팀이 한국 오픈 배드민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세계 랭킹 1위에서 10위까지의 강호가 모두 출전한 대회에서 연일 승승장구하여 결승에 올라가더니 세계 랭킹 1위인 덴마크의 카르스텐 모겐센과 마티아스 보에를 33분 만에 이겼습니다.

이미 20세의 어린 나이에 베이징 올림픽에서 혼합 복식 금메달을 손에 넣었지만 작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남자 단체전 은메달, 남자 복식 동메달에 그친 이용대가 먼 훗날 한국 배드민턴 계의 전설로 남을 수 있을까요? 아직은 확실치 않지만 배드민턴 계에도 새로운 전설이 탄생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세계 정상에 오른 최초의 한국 배드민턴 선수는?

개인에 따라 건강을 위해 주로 하는 운동이 다를 것입니다. 배드민턴도 동호인들이 이른 아침 또는 주말을 이용하여 흔히 하는 운동의 하나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제5공화국이 들어서기까지 일반인에게 배드민턴이 전문 선수들이 메달을 놓고 겨루는 경기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비인기 종목이기는 하지만 아무나 즐길 수 있는 쉬운 운동이고, 전국체전 종목의 하나라는 내용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 이유는 1980년대가 시작될 때까지 배드민턴이 올림픽 정식 종목이 아니었고, 비인기 종목인 까닭에 매스컴을 타는 일도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연일 정치적인 문제가 뉴스 첫머리를 도배하던 1981년에 무명의 한국 여자 선수가 세계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 황선애라는 스타를 탄생시킨 대회는 1899년에 창설되어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오픈 배드민턴 대회였습니다.

당시는 아직 중국이 배드민턴 강국으로 도약하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가 남녀 모두 아시아 최고의 실력자였고, 말레이시아를 당해 내기도 쉽지 않던 시절이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덴마크를 필두로 한 유럽 선수까지 등장하는 세계 대회는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참가에 의의를 두는 대회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배드민턴의 변방 국가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선수가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에서 정상에 올랐습니다. 세계는 깜짝 놀랐지요. 그리고 그 후로 지금까지 30년 동안 우리나라는 세계 대회에서 꾸준한 성적을 올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부터 황선애, 김연자, 이은구, 성한국 등의 선수가 매스컴에 통해 알려졌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배드민턴 신화'의 주인공 황선애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 해에 여러 국제 대회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여자 복식에서 우승한 황선애는 일찍 선수 생활을 그만둬야 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체계적인 선수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던 시절에 입은 부상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남자 국가 대표에 발탁된 고등학생

황선애의 등장으로 세계 대회에서 어깨에 힘을 줄 수 있게 된 한국 배드민턴 대표 팀에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국가 대표에 뽑힌 선수가 있었습니다. 박주봉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1964년생인 박주봉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 때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초등학교 4학년 때 배드민턴을 시작하고 나서 5학년 때 소년체전 단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장차 한국 배드민턴계의 대들보로 자라날 가능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6학년 때는 종별 선수권 대회 초등부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전주서중에 진학한 박주봉은 1학년 때부터 중학교 정상권의 실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교사였던 아버지에 의해 중요한 수업을 빼먹지 않으면서 훈련에 열중하던 그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학교를 찾을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수업에 별다른 배려가 없는 전주농고에 진학한 그는 종별 선수권 대회에서 쟁쟁한 선배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실력과 나이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정상의 실력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 직후 박주봉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 대회가 한일 고교 선발 교환 경기입니다. 배드민턴 단체전 경기는 랭킹 순서(랭킹이 확실치 않은 경우에는 잘 하는 순서)대로 출전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일본에서는 당연히 한국에서 제1단식에 최고 실력을 가진 선수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한국의 첫 출전자는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1학년이었으므로 항의를 했습니다. 실력이 떨어지는 1학년 선수를 1순위로 낸 다음 실력이 좋은 선수를 차례대로 내보내 다음 경기를 모두 이기려는 작전을 세웠다는 오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주봉은 박주봉은 일본 랭킹 1위 선수를 보기 좋게 이겨버렸습니다.

1980년 11월에 발표된 국가 대표 명단에 박주봉이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니 장차 세계를 주름잡을 남자 배드민턴계의 스타가 태극 마크를 달게 되는 순간이었지요.

▲ 한국, 아시아를 넘어 세계 '배드민턴의 신화'가 된 박주봉 선수. ⓒ연합뉴스

세계를 주름잡은 박주봉

고등학교 1학년 때 국가대표로 선발된 박주봉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향상되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2년에는 마침내 덴마크 오픈 대회에서 이은구와 한 조를 이루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미 1년 앞서 황선애가 단식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국제 대회 복식 경기에서 한국이 우승을 차지한 것은 이것이 처음입니다.

이때부터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린 1992년까지 박주봉은 매년 국제 대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눈부신 활약을 했습니다. 남자 복식에서는 김문수와 짝을 이루었고, 혼합 복식에서는 파트너를 바꾸어 가며 우승을 차지하여 "복식의 황제"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배드민턴의 교과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별명을 가지게 된 그의 경기를 보노라면 기대한 대로 경기가 진행되는 모습에서 감독이 특별히 할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게 할 정도로 출중했다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는 서서히 잊혀 가는 서울 올림픽은 한국 스포츠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대회였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전혀 예상치 못하게 4위를 했지만 이보다 14년 앞서서 올림픽에서 12개의 금메달을 기록하며 소련, 동독, 미국에 이어 4위를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박주봉은 금메달을 획득했을까요?

안타깝게도 정답은 "아니오!"입니다. 출전만 하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던 박주봉이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한 것은 배드민턴이 올림픽 정식 종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김문수와 짝을 이루어 남자 복식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다만 이때도 혼합 복식은 정식 종목이 아니었습니다.

실력이 뛰어나서 우승하다 보니 여러 가지 기록도 따라붙었습니다. 1985년 캘거리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김문수와 짝을 이룬 남자 복식과 정명희와 짝을 이룬 혼합 복식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한국 최초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한 것입니다. 그는 이밖에도 1986년 아시안게임 3관왕,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영국 오픈 대회 남자 복식 3연패 등 수많은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 1991년에는 세계 대회 복식 최다인 50회 우승 기록을 세움으로써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선수 생활 말년과 지도자로서의 활약

박주봉이 전성기를 구가하는 동안 혼합 복식 파트너로 박주봉과 짝을 이루어 25회에 걸쳐 국제 대회 우승을 함께 한 정명희(국가 대표 팀 감독 김중수의 배우자)는 혼합 복식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지 못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끝난 후 은퇴를 했습니다. 박주봉도 이 때 일시적으로 은퇴를 했다가 1993년 세계 혼합 단체전에서 잠깐 복귀하여 김문수와 함께 남자 복식에서 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95년에는 국제 심판으로 활약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나 싶었는데,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혼합 복식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박주봉은 다시 컴백을 했습니다. 그러자 경쟁 국가에서는 혼합 복식에 출전시키려던 우수 선수들을 다른 종목으로 바꾸었다는 믿기 힘든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박주봉은 새로운 파트너로 낙점된 나경민과 함께 일본, 영국, 한국, 스위스 오픈 대회를 모두 정복한 다음 올림픽에 출전하였습니다. 이미 라이벌들이 자리를 비워 준 다음이어서 그리 어렵지 않게 결승전까지 승승장구했으나 결승에서 김동문-길영아 조에 패배하는 바람에 은메달에 머문 후 은퇴를 했습니다.

두 차례 출전한 올림픽에서 금메달 한 개, 은메달 한 개에 머문 것은 다른 대회에서 거둔 혁혁한 성과에 비추어 볼 때 부족한 느낌이 있지만 전성기에 배드민턴이 올림픽 정식 종목이 아니었던 것이 아쉽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박주봉의 배트민턴 인생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박주봉은 은퇴 후, 배트민턴 종주국인 영국 대표 팀 코치로 활약하면서 한 때는 강국이었으나 국제 무대에서 쇠락을 거듭하던 영국의 수준을 한층 높여 주었고, 1999년에는 세계 배드민턴계 최고의 대우로 말레이시아 감독으로 부임함으로써 선수 시절의 전설이 지도자가 되어서도 큰 대접을 받음을 보여주었습니다.

2003년에는 약 1년간 아시아와 세계를 순회하는 코치를 맡았으며, 2004년에 잠시 국가 대표 팀 코치를 역임하고 나서, 그 해 11월부터 현재까지는 일본 국가 대표 팀 감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여자 복식 8강전에서 마에다 미유키-스에쓰나 사도코 조가 세계 랭킹 1위인 중국의 양웨이-장제원 조를 꺾고 준결승에 진출하는 기적(?)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준결승에서 이경원-이효정 조에 지기는 했지만 세계 수준과는 거리가 있는 일본 배드민턴 대표 팀 감독으로 활약하면서 지도자로서도 성공적인 결과를 얻고 있습니다.

박주봉이 전설로 남은 이유는?

1. 1981년에 바덴바덴에서 24회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결정되자 한동안 비인기 종목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전국체전을 비롯하여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경기가 공중파를 타고 방송되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으며, 그 후로 배드민턴에서는 박주봉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텔레비전 해설자는 "주봉 버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여 관심을 끌었고, "주봉버그" 외에도 "주봉 아이스크림", "주봉 주스" 등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습니다. 배드민턴이 아주 인기가 있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박주봉이 참가하면 경기장 근처의 장사꾼들이 박주봉의 이름을 붙인 햄버거, 아이스크림, 주스 등을 판매하는데 이것이 아주 인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박주봉이 워낙 실력과 인기가 좋으므로 햄버거를 파는 장사꾼들이 "박주봉이 잘 먹는 햄버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박주봉은 이 햄버거를 먹으므로 실력이 뛰어납니다"와 같은 식으로 선전을 하는데 이 이야기를 곧이듣지는 않았겠지만 '주봉 버그'라는 이름을 가진 햄버거가 제일 많이 팔린다는 해설자의 이야기는 박주봉의 이름을 국내 팬들에게 널리 알려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2. 이미 15년이나 지난 일입니다만 박주봉이 은퇴를 번복하고 올림픽에 출전한다고 해서 경쟁국에서 혼합 복식에 출전시키려던 선수들을 다른 종목으로 바꾸었다는 내용은 과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1월말에 개최된 한국 오프 배드민턴 대회에 국제 배드민턴연맹 사무총장으로 참석한 덴마크의 토마스 룬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재미있는 말을 남겨 주었습니다.

"박주봉이 은퇴한 후인 1993년과 1995년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했어요. 1996년 박주봉의 복귀로 혼합 복식을 포기하고 이듬해에 은퇴했지요." (<동아일보> 2011년 1월 28일자)

3. 박주봉이 남긴 가장 대표적인 기록은 국제 대회 72회 우승입니다. 김문수와 짝을 이룬 남자 복식에서 32회 우승, 정명희와 짝을 이룬 혼합 복식에서 25회 우승을 기록했으니 단짝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국내 남자 단식 106연승, 1991년 국제 대회 50회 우승으로 기네스북 등재, 1997년에는 국제 배드민턴연맹이 선정하는 배드민턴계의 최고상인 스칠 상 수상, 2001년 배드민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선수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루었기에 전설로 남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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