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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짜리 대표로 전락한 김구, 민주주의도 팽개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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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짜리 대표로 전락한 김구, 민주주의도 팽개치다

[해방일기] 1946년 2월 1일

1946년 2월 1일

1946년 2월 1~2일자 신문은 두 가지 기사로 뒤덮였다. 비상국민회의 결성과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준비위원회 발족.

1월 21일 임시정부가 추진해 온 비상정치회의 주비위가 이승만의 독촉 합류와 함께 비상국민회의로 방향을 바꾸면서 임정 인사 중 '좌파'로도 불리는 비주류 인사 몇이 탈퇴를 선언했다. 비상국민회의가 좌익의 참여에 연연하지 않고 우익 통합에 주력할 방침을 정했기 때문이다. 비상국민회의는 임정까지 분열시키며 우익 중심으로 결성되어 이승만과 김구를 영수로 추대했다.

좌익 제 단체는 1월 19일 민전 결성을 선포한 바 있었다. 좌익은 임정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정당 간의 논의를 통한 민족통일전선 구축을 주장해 왔다. 1월 6~7일의 4당 회의, 그리고 1월 8일 이후의 5당 회의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민전을 내세우고 나섰다.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만을 제외한 모든 단체의 참여를 표방했지만, 물론 우익의 참여에 연연하지 않는 좌익 주도의 움직임이었다. 2월 1일 비상국민회의 결성에 맞서 준비위를 발족, 2월 15일 결성대회의 초청장을 발송했다.

두 개의 큰 조직 사이에 또 하나의 조직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 사령관의 자문위원회였다.

인민당 총무국에서는 하지 중장 개인자문위원회에 동당 대표로 白象奎·呂運弘·黃鎭南·李貞求를 파견하는 데 대하여 1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1) 우리는 하지 중장 개인의 자문위원회가 당면한 민생 문제에 한한 자문기관인 것을 인정함
2) 본 자문위원회가 결의제가 아님을 인정함
3) 본 자문위원회가 임시정부 수립 등 정치문제에 언급하지 않은 것을 인정함

1월 31일 본당 대표 呂運弘·黃鎭南이 하지 중장 고문 굿펠로우를 회견했을 시 본 자문위원회의 성격에 대한 본당 대표의 질문에 관하여 이상 3조항을 승인하고 본당의 대표 파견을 요청하였으므로 전기 4인을 파견함

이상 3개 조항에 위반되는 시는 본당 대표는 즉시 탈퇴할 것을 언명함" (<조선일보> 1946년 2월 2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월 28일자에 "굿펠로우와 이승만, 그리고 하지가 민주의회의 설계자들"이었다는 대목을 커밍스의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에서 인용했다. 굿펠로우는 하지의 '자문위원회'란 명목으로 포장한 민주의회에 정치 지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부심하고 있었다. 1월 26일 박헌영을 만나 "이 기관에서 시급한 식량, 통화 등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래 임시정부로 발전할 수도 있으며, 국민대회의 소집과 신탁 통치 문제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참여를 권유했으나 박헌영은 이틀 후 참여를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임경석, <이정 박헌영 연대기>, 276~279쪽)

인민당은 굿펠로우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문위원회가 민생 문제의 협조를 위한 것이지 정치기구가 아니라는 엄격한 조건을 걸었다. 석 달 전 여운형은 군정장관 자문단 참여를 수락했다가 자문단이 한민당 인사 위주로 구성된 것을 보고 바로 사퇴한 일이 있다. 이번 자문위원회 참여에 엄격한 조건을 건 것은 우익의 책략에 말려들어 들러리 노릇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굿펠로우의 설득 방법에 눈에 띄는 점이 있다. 박헌영을 설득할 때는 자문위원회의 정치적 의미를 크게 내세웠다가 인민당을 설득할 때는 자문위원회의 비정치성을 확인해 주었다는 것이다. 인민당의 자세에서도 우익의 책략을 경계하되 명분이 보장하는 범위에서는 참여한다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이 자문위원회가 2월 14일에 '민주의원'이란 이름으로 정체를 드러내자 여운형은 불참여를 선언했다.

우익의 비상국민회의, 좌익의 민전, 군정청의 민주의원, 모두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에서 한국인을 대표하는 위치를 구축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건국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각자 그밖의 다른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좁은 범위의 목적을 가진 것은 군정청이었다. 군정청이 추진한 민주의원은 모스크바회담 직전 '랭던 제안'에서 제시한 '정무위원회'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지만 폭이 좁아졌다. 정무위원회는 임정과 이승만을 앞세워 전 한국인을 대표하는 기구를 구상한 것이었는데, 민주의원은 좌익을 포기하고 최소한의 구색 맞추기에 급급하게 되었다. 북한의 인민위원회 등 다른 대표 기구에 대항하는 방어적 목적이었다.

우익의 비상국민회의는 김구와 이승만의 동상이몽(同床異夢) 형국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 안의 건국을 원하고, 분단 건국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속셈이었다. 김구는 이와 달리 완전한 통일 민족국가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임정의 권위를 과신한 것이었을까? 이승만과 한민당의 '임정 추대' 바람잡이에 말려들어 좌익 등 다른 세력과의 협력과 연대를 도외시하고 미소공위에 대해서도 오만한 태도를 견지했다.

2월 2일자 <조선일보>의 비상국민회의 기사는 이런 내용이었다.

◊ 201名 초청에 167명 참석

회의는 오전 11시 安在鴻 사회로 시작되어 먼저 개회를 선언하고 의원을 점명한 결과 전원 201명 중 167명 출석으로 국기최경례 애국가 합창이 있은 후 安在鴻의 개회사에 이어 임시의장에 金炳魯가 피선되었다. 朴允進으로부터 본 비상국민회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당면정책 제 6항의 규정에 의하여 장래 할 과도정권 수립에 관한 권한을 향유케 하고자 임시정부의 소집으로 1월 20일 임시정부 내에서 비상정치회의주비회가 각 혁명단체·종교단체·정당 등 18단체 초청으로 조직된 후 李承晩을 회장으로 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사업을 비상정치회의와 합류케 된 것, 조선민족해방동맹 대표 金星淑 조선민족혁명당 대표 成周寔 양인 외 몇 요인이 동 회의에서 진행시키고 있는 정책이 전 민족 통일단결 원칙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퇴하기까지의 경과 보고와 南相喆의 임시정부에 대한 감사결의문을 낭독한 후 柳葉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연합국에 대한 결의안을 상정, 이어서 러취 장관의 축사를 뉴맨 대좌가 대독하고 아놀드 소장의 메시지를 낭독한 다음 오전부를 끝냈다. 오후 2시에 속회하여 의사규정 및 비상국민회의 조직대강을 상정 만장일치 가결하고 의장 부의장 및 위원선거로 들어갔다.

◊ 임시정부에의 감사문 결의 내용

"전 민족의 총의를 집결한 본 비상국민회의의 개회 벽두에 있어서 우리 조국 광복을 위하여 국내 해외에 전전고투하며 혈육을 바친 허다한 의열사의 영령을 묵묵히 추모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하여 충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한다. 5천 년의 빛난 문화적 역사를 가진 한민족의 정치적 생명은 숙적 일본의 제국주의 하에 치명상을 받고 3천만 대중은 그 압제 하에 도탄의 고역에 빠졌으나 애국열사의 혈성은 부단히 광복 운동을 계속하였으며 특히 기미년의 민족적 혁명운동의 결과 민족의 총의로 창립된 임시정부는 30년의 장구한 세월을 해외에 망명하여 온갖 고초를 맛보면서 우리 광복운동을 영도하여 오던 바 제2차 세계 전쟁에 제회하여 혹은 군사에 혹은 민중 조직에 다각적으로 광범위에 걸쳐서 광복 운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으로써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적 공약을 받게 하고 환국 이후에는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절대한 노력을 경주하며 관계열국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능히 자주독립에 대한 금일의 서광을 보게 된 것은 3천만 대중이 감사하여 마지아니하는 바이다. 본 비상국민회의는 전 국민과 함께 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우 의결함. 대한민국비상국민회의"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비상국민회의 의장과 부의장에는 임정 임시의정원 의장과 부의장이던 홍진과 최동오가 선출되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논하려면 민의를 대표하는 의회기구의 존재가 필요했고 임정에게는 임시의정원이 의회기구였다. 망명 상태에서 의회기구 기능에는 물론 한계가 있었고, 환국에 임해서는 그나마 지켜온 틀이 무너져버렸다. 원래 비상정치회의는 임정의 의회기구를 확충·재건하려는 목적이었는데, 비상국민회의로 방향을 돌리고도 의장과 부의장을 임시의정원 의장과 부의장으로 선출함으로써 연속성을 지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비상국민회의는 임정과 별개의 기구였다. 그래서 비상국민회의가 임정에게 바치는 감사문을 채택한 것이다. 비주류 몇 사람의 탈퇴로 임정에서 비상국민회의로의 연속성에 흠이 생기고 임정의 실체도 깨어진 데 이어 임정의 공식적 존재가 이 감사문을 받음으로써 퇴장한 것이다.

민족 지도자로서 김구의 권위도 이로 인해 크게 손상되었다. 26년간 '대한민국' 이름을 지켜온 임정 주석의 위치가 사라진 것이다. 1942년 가을의 좌우 합작 이래 임정은 독립운동의 본산으로서 상징적 권위를 누렸다. 임정의 광복군보다 수십 배 규모의 의용군을 포용하고 있던 독립동맹도 임정의 권위를 존중해 왔다. 그런데 그 주석이던 김구가 좌파가 배제된 절름발이 조직의 영수 자리를 이승만과 나눠 갖는 신세로 떨어져버렸다.

비상국민회의는 2월 1일의 결성 대회에서 '최고정무위원회'를 두기로 했다. 김구 측에서는 임정 국무위원회를 대신할 행정부를 구상한 것이다. 좌파 비주류와의 합작이 한계에 이른 임정을 포기하고 임정 우파 주류가 국내 우익과 결합해 비상국민회의-최고정무위원회 구조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결성대회에서는 최고정무위원회의 인원과 위원을 모두 김구, 이승만 두 영수에게 일임하기로 결정했다. 서중석은 이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과정은 없고, 오로지 최고 영도자의 명령 일하에 복종하는 전형적인 극우적 선출 방식"이었다고 논평했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342쪽) 이에 따라 28인의 위원이 결정되어 2월 13일 발표되었다.

비상국민회의에서 李承晩, 金九 두 분에게 일임했던 최고정무위원은 양씨 영도 아래 신중히 전형 중이던 바 13일 다음 28명이 발표되었다.

李承晩(임시정부요인) 金九(同) 金奎植(同) 趙素昻(同) 趙琬九(同) 金朋濬(同) 崔益煥(신한민족당) 咸台永(기독교) 張勉(천주교) 鄭寅普 金俊淵(한민당) 金度演(한민당) 金法麟(불교) 金善 金麗植(신한민족당) 金昌淑 權東鎭(신한민족당) 吳世昌 李義植(국민당) 呂運亨(인민당) 白象奎(인민당) 白寬洙(한민당) 白南薰(한민당) 朴容羲(국민당) 元世勳(한민당) 黃鎭南(인민당) 黃賢淑 安在鴻(국민당) (<조선일보> 1946년 2월 14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런데 이튿날 신문에는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가 아닌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의 출범이 보도되었다. 그 성립식은 군정청 회의실에서 열렸다. 민주의원은 군정청 자문기관이었던 것이다.

굿펠로우를 앞세워 군정청에서 추진해 온 하지 사령관의 '개인 자문위원회'가 민주의원이란 간판을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에 뒤집어씌운 것이다. 커밍스의 말대로 하지-이승만-굿펠로우 3인의 획책이 분명한데, 김구가 이에 동의한 까닭이 무엇인지 아직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안재홍은 비상국민회의 설립을 자신의 '임정 보강론'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고 적극 지지해 왔는데, 민주의원에 대해서는 "오직 세간 조소의 관혁으로만 되었다"고 한탄했다.

그 실패의 출발인즉, 반쯤 얽었던 좌방 대표를 포옹치 못함이었다고 하나, 그 외에도 따로 지금껏 못내 궁금한 것은 저간의 소식이다. 처음 종현의 천주교회당에서 장중한 비상국민회의가 열리어, 상해 이래의 법통을 이은 의정원의 정부의장인 홍진-최동오 양씨 만장의 박수로써 의장석에 오를 때, 그분들의 반생의 풍상을 추억하여 눈물조차 괴어었더니, 출발에서 이미 좌방은 놓치었고, 재협동의 의도 익지 못하였고, 믽의원 한갓 '고궁에서 한담만 한다'는 냉소만 받았다. (<민세 안재홍 선집 2>, 269~270쪽)

이후 비상국민회의나 최고정무위원회의 존재 내지 존재감은 사라지고 민주의원만이 초라한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14일의 민주의원 성립식에 여운형, 함태영, 김창숙, 정인보, 조소앙 5인은 출석하지 않았다. 인민당은 그 날 이런 성명서를 발표했다.

조선인민당에서는 14일 오후 11시 긴급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여서 신중 토의한 결과 하기와 같은 결의를 한 후 이를 동당 金午星 선전부장으로부터 출입기자단에게 정식 발표를 하였다.

본당은 하지 중장의 고문 굿펠로우로부터 당면의 민생 문제에 관한 하지 장군 개인의 고문격인 자문위원회를 파견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고 조건부로 4인을 파견한 일이 있었다. 그 뒤 굿펠로우는 본당 당수 呂運亨을 누차 방문하고 출마를 요청하였으나 당의 결의가 있으니 나갈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면 李承晩, 金九 兩氏도 개인의 자격으로 참가하였으니 역시 개인으로 참가하기를 요청하였으며 전기 李 金 兩氏를 만나 민족 통일을 논의하기를 간권하므로 呂氏는 12일에 굿펠로우와 동반하여 먼저 李 박사와 만나 통일의 원칙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동일 오후에 다시 金九 씨를 만났으나 회의는 역시 원칙 문제에 국한되었을 뿐 소위 '非國'최고정무위원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한 바 없었다. 굿펠로우에 대해서는 선반 본당에서 제의한 조건하에 참가하기를 승낙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돌연 嚴恒燮 씨가 呂運亨 씨와 본당에서 파견한 자문위원 3인이 최고정무위원회에 참가하였다고 성명하였는데 이것은 전혀 사실무근이며 본당에서는 13일 오후 4시경에 黃鎭南 씨를 굿펠로우에게 보내어 자문위원회와 최고정무위원회와의 관계를 질의한 즉 굿펠로우는 전연 관계없다고 언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3일 야 하지 중장 성명에는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었고 오직 자문위원회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라고 그 명칭을 변경하였을 뿐이다.

이 전후가 상부되지 않은 사실에 비추어 본당이 제시한 조건에 명확히 위배되는 것이므로 呂 당수가 자문위원 승낙을 취소함은 물론 본당에서 파견하였던 자문위원 白象圭, 黃鎭南 씨도 소환하는 동시 본당으로서 자문위원회로부터 전적으로 탈퇴할 것을 결의하였다. (<서울신문> 1946년 2월 15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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