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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의 '미친 존재감'…활짝 열린 그 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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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의 '미친 존재감'…활짝 열린 그 방으로!

[프레시안 books]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철학자의 서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하여 매주 연재해온 서평코너 '철학자의 서재'가 한권의 책으로 묶였다. 무려 '100명의 철학자'가 쓴 '107편의 서평'이다. '무려'라는 말을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규모의 기획이 진행된 전례가 또 있을까 궁금할 정도니까. 혹자는 "'100명의 철학자'라니? 한국의 철학자는 다 동원된 거 아니냐?"란 생각도 들지 않을까?

한국철학계의 동향에 과문한지라 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말 그대로 '한국철학사상'을 연구하는 단체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한철연은 시대의 모순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진보적 소장 철학연구자들이 모여 1989년에 창립한 학술공동체"다. 1989년에 '소장'이었다면 21년이 지난 지금은 대개 '중견'이거나 '노장' 철학자들이 다수일 법한데 책의 표지에는 '한국의 젊은 지성 100명'이라고 돼 있다. 지난 21년간 함께 연구하며 키워온 '연대의식'이 연재를 이끌어온 밑바탕이었다고 서문에는 적혀 있는데, 어쩌면 그 연대의식이 이 지성들의 '젊음'을 유지시켜온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연대할 때 늙지 않는다?! 아니면 설마 '철학'이 비결일까?

개인적으로 <프레시안>에 자주 드나드는 편은 아니어서 '철학자의 서재' 코너를 꼬박꼬박 챙겨 읽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억에는 <지중해 철학기행>(클라우스 헬트 지음, 이강서 옮김, 효형출판 펴냄)에 대한 서평인가를 통해서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됐고 막연하지만 나중에 책으로 묶이겠거니 짐작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거지만, 그 '나중'은 언제나 '지금'이 된다! '찾아보기'까지 포함해 903쪽의 책이 그래서 내 책상에도 떡 하니 놓여 있다. 푸짐하고 번듯하다. 이 책 한권만으로 어느새 나의 서재 또한 '철학자의 서재'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존재감이 충만하다. 요즘 유행어로는 '미친 존재감'이지만, 손에 들어보니 '미친 무게감'이 마음에 더 와 닿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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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의 서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알렙 펴냄) ⓒ알렙
107편의 서평이 10개의 장으로 분류돼 있으니 비유컨대 아주 푸짐한 뷔페식당에 들어선 기분이라고 할까. 니체는 이미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뇌는 우리의 위장을 닮았다고. 그래서인지 독서욕은 때로 식욕과 잘 구분되지 않는다. "무엇 먼저 읽을까?"는 그래서 "무얼 먼저 먹을까?"와 같은 질문이다. 물론 이런 '식당'에 들어설 때는 미리 소화제라도 챙겨두는 게 좋지만, 그렇더라도 어차피 다 읽을/먹을 수는 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두고두고 곶감 빼먹듯이 읽어치우는 게 상수의 전략이다.

그건 서평자의 처지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미식가처럼 이 코너 저 코너에 들러 맛보기 식단을 음미해보지만, 한편으론 '과식'을 경계한다. 하긴 뇌를 위장에 비유한 니체의 경고도 그런 것이었다. 과식이 위에 해로운 것처럼 너무 많은 지식도 뇌에 해롭다는. 아닌가?

전체적으론 만만찮은 두께와 무게로 다가오지만, 개개의 서평들은 가볍고 경쾌하며 또 느긋하고 여유만만이다. 인터넷 공간을 염두에 둔 서평이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량에서도 비롯된 듯싶지만 그건 서평자들이 책에 대해 갖는 태도와도 연관된 것이 아닌가 싶다. 내 경우 서평을 쓰면서 주로 책의 주장과 핵심적인 메시지를 간추리기에 바쁜 편이지만 우리의 철학자들은 그런 거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다. "내 책꽂이 한 구석에는 두 권이 책이 나란히 몸을 맞대고 있다."고 시작하거나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여행을 하다가 큰 기대도 없이 들어간 허름한 밥집에서 그 지역의 깊이 곰삭은 맛을 맛보는 것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는 말로 운을 뗀다. 책을 읽어나가면 이런 능수능란한 서평가들이 '100명'이란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동시에 '인터넷 서평꾼'으로선 긴장하게 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클라우스 헬트의 <지중해 철학 기행>은 내 경우 거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인데, 기억에는 이게 '철학자의 서재'의 서평을 읽고 구입한 책이다. 물론 "650쪽이 넘는, 참 두툼한 책"이어서 아직 완독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평은 이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가를 충분히, 여실히 전달해주었다. 가령 서평자는 헬라스에서 왜 학문이, 그리고 철학이 생겨났는가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정관사 문제로 간추린다.

"왜 정관사는 철학이 태어나는 데 산파 역할을 했을까? 정관사는 어떤 말 앞에 붙어서 그 말을 명사로 만든다. 그리하여 정관사가 붙은 말은 실체가 된다. 쉽게 말하자면 정관사가 붙은 말은 무엇이든 간에 그 무엇으로 불릴 수 있다. 자립적인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 관사가 붙는 말은 명사이다. 학문은 바로 이 명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36쪽)

예컨대, 사물의 속성을 나타내는 '붉다(red)'라는 형용사에도 관사가 붙으면 '붉음(the red)'이란 명사가 된다. 그리고 이 추상명사가 학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고대 헬라스 사람들은 정관사를 갖고서 자유자재로 명사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명사들이 개념적 사유의 도구가 됐다. 헬라스 학문과 철학의 탄생 조건이 된 것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그런 정관사가 없었다면 '철학'의 탄생도 없었을 것이고, 철학자란 직업(?)도 등장하지 않았을 테니, '철학자의 서재'도 따로 꾸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정관사인가!

흔히 형이상학의 고유한 물음 형식이 "X란 무엇인가?"(What is X?)라고 한다. 그런 물음에서 X의 자리에 놓이는 것이 명사다. 그런 물음과 궁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선 명사라는 자격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명사를 만들어주는 것이 정관사라면, 한국어에는 무엇이 있을까? 명사형 어미 정도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일까? 서평은 <지중해 철학 기행>에 대한 관심과 함께 '한국철학'에 대한 궁금증도 불러일으킨다. 사실 그렇게 뭔가를 촉발하고 자극하는 것이 서평다운 서평의 몫일 것이다.

물론 서평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이 따로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굳이 철학자들까지?"란 의문을 혹 가지시는가? 철학자들 또한 나름대로 '내부 사정'이 있다는 걸 나는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다. 이런 자문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철학의 소재나 문제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 속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이 아닌가? 다만 우리는 그것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문제의식이 없었고, 그것들로부터 삶의 지혜를 걸러낼 수 있는 안목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우리는 그러한 삶의 문제들을 등한시한 채 그저 딱딱하고 골치 아픈 이론들과 화석화된 활자들 속에서만 철학을 찾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철학은 소수 전문가들만이 이해하는 비밀스러운 코드로 인식되고 있지는 않은가?" (42쪽)

비록 <통합적으로 철학하기>(휴머니스트 펴냄)란 책의 의의를 설명하기 위해 끌어낸 질문들이긴 하지만, 나는 이러한 반성적 질문이 <철학자의 서재>를 관통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 책의 서평 목록에는 소위 '철학서'로 분류되는 책이 의외로 많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또한 "딱딱하고 골치 아픈 이론들과 화석화된 활자들" 속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사유와 문제의 단초를 찾으려는 적극적인 시도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소수 전문가들'이 아닌 '우리'가 같이 읽고, 같이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들이 어떤 것인지 함께 짚어보고 함께 고민하자는 취지가 아닐까. 그럴 때 '철학자의 서재'는 옆집 아저씨의 서재만큼이나 가깝고 푸근하게 다가온다.

서평집에 대한 서평은 잘해야 군말이기 십상이다. 무얼 더 보태겠는가. 음식의 맛을 아무리 말로 잘 표현한다고 해도 직접 맛보는 것만 못하다. 그저 일독해 보시길. 가볍지 않은 사유와 무겁지 않은 성찰이 잘 어우러져 우리의 지성을 자극하고 인식을 확장하는 서평들이 발에 차이는 수준이다. 나도 나름으로는 서평집을 낼 만큼은 읽고 쓰고 했지만, 책에서 다루어진 책들의 목록을 보니 읽지 않은 책이 읽은 책보다 훨씬 더 많다(세어 보니 갖고 있는 책이 절반 조금 못 된다). 그러니 내게도 더없이 요긴한 책이다.

매주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책의 홍수 시대'라고도 하고 '책의 바다'라고도 한다. 그렇다고 좌절할 건 아니고, 이런 '좋은 안내서'를 길잡이 삼아 자기만의 독서 여정을 꾸리는 것이 독서인의 보람이고 호사다. 우리는 어쩌면 제법 멀리 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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