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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 일어난 가장 끔찍한 일을 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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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 일어난 가장 끔찍한 일을 들려줘!"

[김용언의 '잠 도둑'] 피터 스트라우브의 <고스트 스토리>

'프레시안 books'는 2011년, 책벌레들의 독서일기 연재를 시작합니다. 그 하나는 <씨네21> 김용언 기자의 '잠 도둑'입니다. 김 기자는 추리, 공포, 판타지, 로맨스 등 이른바 '장르 문학'이라고 불리는 책들을 골라서 격주로 소개합니다. 김 기자가 고르는 '잠 도둑'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편집자>

차디찬 겨울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을 읽는 건 안락한 경험이다. 살인 사건이 어떻게든 해결되고 어긋난 일상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살인과 탐욕을 다루는 추리 소설이 안겨주는 모순된 위안이다.

그러나 당신이 혹시 피터 스트라우브의 공포 소설 <고스트 스토리>(조영학 옮김, 황금가지 펴냄)를 집어 든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당신은 책을 읽기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이전엔 깨닫지 못했던 일상 속 악의 심연으로 한 발짝 다가가게 된다. 한적한 마을이 악마의 공격을 받아 폭설에 뒤덮이며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미쳐가는 이 잔혹한 이야기는, 냉기로 당신 주변의 기온을 3도쯤 내려놓을 것이다.

▲ <고스트 스토리>(피터 스트라우브 지음, 조영학 옮김, 황금가지 펴냄). ⓒ황금가지
프롤로그. 어떤 남자가 아홉 살 소녀를 납치하여 24시간 동안 하염없이 달린다. 당연히 그는 소아성애자이거나 유괴범쯤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남자의 독백은 예상치 못한 지점에 가닿는다.

'당신에게 일어난 가장 끔찍한 일은 무엇이지?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의 침대 옆에서 옷을 벗은 일? 칼을 소지하고 다닌 일? 아니면 그녀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사실인가? 아니, 그것보다도 훨씬 끔찍한 일이었어.' 남자는 불면증과 초조함과 살의에 시달리며 아이에게 묻는다. "넌 뭐하는 아이지?" "난 아저씨예요." "아냐, 내가 나고 넌 너야." "아뇨, 난 아저씨예요." "넌 도대체 누구야?"

여기까지가 긴 프롤로그다. 그리고 이야기는 껑충 건너뛴다. 배경은 평화롭고 고풍스런 소도시 밀번이다.

"밀번은 그 안에 스스로의 연옥을 만들어내고 안주하려 할 것 같은 그런 고장이다. (…) 밀번은 항상 조용하면서도 진중한 곳이지만 동시에 신경과민에 젖어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그들은 항상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로 인해 항상 불안해한다. (…)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결코 이런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아무튼 뉴잉글랜드 풍의 불안감이 이 작은 마을에 퍼져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래비푸트 박사에게 더없는 장소가 된 것도 그 때문이고."

칠순의 노인들, 리키 호손과 시어즈 제임스, 존 제프리와 루이스 베네딕트는 '차우더 클럽' 멤버들이다. 이들은 연회복을 입는 정중한 드레스코드를 지키며 멤버들의 집에 모여 매번 '이야기'를 나눈다. 멤버 중 하나였던 에드워드 원덜리가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은 뒤부터 그 이야기의 주제는 '내게 일어난 최악의 일, 가장 끔찍한 사건'을 들려주는 것으로 좁혀졌다.

이중 시어스가 들려준 50년 전 사건, 유령과 악마와 근친상간과 근친살해가 뒤범벅된 이야기는 그저 옛날이야기 한 토막처럼 삽입된다(이 일화는 명백하게 헨리 제임스의 고요한 호러 <나사의 회전>을 고쳐 쓴 버전이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될수록 그 옛날이야기는 더욱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에드워드 원덜리의 조카 단이 마을에 도착하고, 단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긴 여성 알마와 형 데이비드의 기이한 삼각관계가 등장한다. 에드워드 원덜리의 죽음에 영향을 끼친 여배우 앤 베로니카 무어, 그리고 '차우더 클럽' 전체에 크나큰 상처를 안긴 여배우 에바 겔리, 에바 겔리의 조카딸 안나 머스틴의 갑작스런 등장. '래비푸트 박사의 재즈 연주'를 듣게 되는 소년 피터까지.

"밀리, 친구들한테 떠나라고 해줘. 다들 달아나라고 말야. 다른 세상을 보았어, 밀리. 너무 무서워."

<고스트 스토리>를 읽을 때 당신은 단 한 순간도 방심하면 안 된다. 여기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모든 단어가 천천히, 끈기 있게 모여들어 마지막 순간 거대한 모자이크를 총체적으로 일별하게 되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단어 없이, 그냥 흘려버리는 묘사 없이, 사소한 (것처럼 보였던) 악의와 이해할 수 없던 전조들은 중반부터 모습을 바꿔가며 드러내는 악마, '어둠의 감시자'의 거대한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완벽하게 직조되었다.

스티븐 킹이 <죽음의 무도>(황금가지 펴냄)에서 인용한 피터 스트라우브의 설명에 따르면, "(<고스트 스토리>는) 입수 가능한 미국의 모든 초자연적 소설을 다 읽고 말겠다는 포부의 결과물로서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나사니엘 호손, 헨리 제임스, 러브크래프트의 모든 책, 앰브로즈 비어스, 이디스 워튼,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이 거론된다.

이들의 특징이라면 자신들이 머무르는 공간에 대한 철두철미한 관찰로부터 글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대륙' 프랑스의 19세기 공포 소설들이 인간의 심리에 깊숙이 몰두했다면, '신대륙' 미국 작가들은 자신들이 속한 새로운 공간을 입증하고 파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마치 공간에 인간의 무의식이 스며들듯, 공간과 나 사이에 혹은 객체와 주체 사이에 있다고 믿어지던 견고한 벽이 어느새 흐물거리기 시작한다. 종국에는 기이한 존재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끔 바뀌어버리는 믿을 수 없는 파수꾼이 된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의 투쟁. 그것은 결국 "난 유령을 봤어요"가 "난 유령이에요"로,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있던 '나'에게 건네는 말, "유령은 바로 당신이야"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일반적인 유령 이야기와 모든 고딕 스토리가 밟아온 변천사를 거쳐 가장 섬뜩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제 앞으로 모든 유령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유령은 당신이다. 당신은 그 명제에 순응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악마가 두려운 것은 그 끔찍한 형체 때문이 아니다. 사람을 문자 그대로 먹어치우고 인간적인 모든 것을 경멸하는 그들의 차디찬 영혼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인간에게 가하는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유혹' 때문이다. 우리를 그들과 같은 선상으로 추락시키려는, 그럼으로써 "당신은 유령이다"라고 조롱함으로써 승리를 맛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선 <고스트 스토리>의 결말은 어정쩡한 해피엔딩에 가깝다. 악마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악의는 엔트로피 법칙을 어김없이 준수하며 이 세상을 떠돈다. 그 와중에서도 우리는 안간힘을 다해 살아가야만 한다. "그래, 여기서 날 잡았다고 해보자고. 자네 자신은 어디에서 찾을 건가?"라는 악마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마지막 고백. 나는 이 책이 2004년 처음 발간되었을 당시 읽지 않았다. 피터 스트라우브라는 작가 이름이 귀에 설었고, <고스트 스토리>라는 제목은 지나치게 진부하거나 아무런 개성이 없었다. 그리고 2010년 말 읽은 스티븐 킹의 신들린 '공포' 입담집 <죽음의 무도>를 통해 <고스트 스토리>를 처음 접했다.

832쪽에 달하는 이 두꺼운 책을 완독하느라 꼬박 이틀 밤을 공포의 쾌감에 바쳐야만 했다. 너무 늦게 도달한 자들이 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듯, 그러나 기꺼이 순응할 만한 고통이었다. 스티븐 킹의 <그것> 같은 공포 소설을 사랑했던 이들이라면 양팔 벌려 환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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