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월 17일
12월 29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모스크바 회담 결정 중 한국에 관한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조선에 주재한 미소 양국군사령관은 2주간 이내에 회담을 개최, 양국의 공동위원회를 설치 조선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원조한다. 또 美, 英, 蘇, 華 4국에 의한 신탁 통치제를 실시하는 동시에 조선임시정부를 수립케 하여 조선의 장래 독립에 備할 터인바 신탁 탁치 기간은 최고 5년으로 한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와 조선 각종 민주적 단체와 협력하여 동국의 정치적 경제적 발달을 촉진하고 독립에 기여하는 수단을 강구한다. 이 신탁 통치제에 관한 외상이사회의 제안을 검토키 위하여 美, 蘇, 英, 華 각국 정부에 회부된다.(☞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것은 12월 28일 정오(현지 시간) 공식 발표된 결정문의 7개항 중 제6항이다. 서중석은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304~305쪽에 아래 내용을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의의 전문"이라고 소개했는데, 이 책의 드문 착오 중 하나다. 이 내용은 결정문 발표에 앞서 27일 미·소 양국 외상이 합의한 '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 결의서'였다. 3국 전체 회의에 앞서 당사국들 사이의 1차 합의 내용인데, 공식 결정문의 세부 사항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관련된 주11에서 송남헌 <해방 3년사 1> 248쪽을 출처로 표시했는데, 그 위치에 실려 있는 것은 회담의 공식 결정문 7개항이다.)
1.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조선을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하고, 일본의 장구한 조선 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가급적 속히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 교통, 농업과 조선 인민의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취할 임시 조선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2. 조선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의한 방책을 연구 조정하기 위하여 남조선 미국점령군과 북조선 소련점령군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그 제안 작성에 있어 공동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야 한다. 그들이 작성한 제안은 공동위원회 대표들의 정부가 최후 결정을 하기 전에 미·영·소·중 각국 정부에 그 참고에 공하기 위하여 제출되어야 한다.
3.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과 독립국가의 수립을 원조 협력할 방안을 작성함에는, 또한 조선임시정부와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서 공동위원회가 수행하되,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한으로 4국 신탁 통치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영·소·중 제국 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공동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참가시키고 조선 민주주의 제 단체를 인입하여 조선 인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과 또는 조선 국가 독립의 확립을 원조 협력(후견)하는 제 방책도 작성할 것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조선임시정부와 협의 후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조선에 대한 4개국 후견의 협정을 작성하기 위하여 소·미·영·중 제국 정부의 공동 심의를 받아야 한다.)
4. 남북 조선에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를 고려하기 위하여 또는 남조선 미합중국 관구와 북조선 소련 관구의 행정, 경제면의 항구적 균형을 수립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소 양군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제3항 내용에 관해 좌익과 우익 사이에 논쟁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 측 번역문을 괄호 안에 붙여놓았다. 제3항의 미군 측 번역문은 앞쪽이 졸렬한 번역으로 보이고, 뒤쪽은 완전히 요령부득이다. '신탁'과 '후견'이라는 용어 차이 외에는 소련군 측 번역문이 옳은 내용으로 보인다.
제1항에서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1차 과제를 명시하고 제2항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그를 위한 방법으로 제시했다. 제3항에서는 다음 단계 과제인 4개국 신탁 통치(후견)의 접근 방법을 규정하고 제4항에서는 미·소 양군 사령부가 취할 첫 조치를 결정해 놓았다.
<조선일보> 1946년 1월 17일자에는 "제1차 미소공위 개막"이란 제목의 아래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실제 미소공위의 개막은 3월 20일의 일이다. 1월 16일의 회의는 위 합의문 제4항에 따른 첫 조치였고, 정식 미소공위의 준비 회담 역할을 한 것이다.
세계의 시청을 총집중한 가운데 민주 조선의 중대한 앞날을 결정할 미소공동위원회 제1차 정식 회담은 16일 오후 1시 서울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마침내 개막되었다. 오후 1시15분 정면의 태극기를 중심으로 좌우에 미소 양국기를 세운 회장에는 내외 기자단을 비롯하여 사진반 미국 장교 등이 기다리는 가운데 소련 측으로부터 쉬티코프 中將 이하 委員 6명, 미국 측으로부터 하지 中將 이하 委員 8명이 입장한 후 먼저 하지 중장으로부터 인사의 말이 있자 이를 미군 로넬 장교가 영어로 통역을 하고 李卯黙 박사가 조선어로 통역을 하였다.
다음으로 쉬티코프 중장이 인사의 말을 하자 소련통역관 코간 女史가 영어로 통역을 하고 조선인 소련 장교 崔드미트리 대위가 조선어로 통역을 한 후 이어서 기자단 급 기타 방청자가 일제히 총퇴장을 하고 회는 일찍이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발표된 공동코뮤니케 제4조에 의하여 조선 건국의 일대 지장인 38도선 철폐문제에 대하여 신중한 토의 사항으로 들어갔다.
이 날 참석한 미소 양국위원은 다음과 같다.
소련 측: 쉬티코프 中將(代表委員) 짜라프킨(全權大使) 샤림 委員 로마넨코 委員 발라샤노프 委員 붓소프 委員 마스로바 委員
미국 측: 하지 中將 아놀드 少將(代表委員) 러취 少將(委員) 베닝호프 委員 붓스 委員 부리톤 委員 언더우드 委員 헐리히 委員 코넬슨 委員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하지는 사실 회의에 위원으로 참석한 것이 아니고 회담 장소를 관할하는 점령군 사령관으로 인사하러 나간 것이었다. 미소공위가 흔히 두 나라를 대표하는 기구로 인식되는데, 사실에 있어서는 한반도의 두 점령군, 미군과 소련군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물론 실제에 있어서는 점령군 대표를 넘어 본국을 대표하는 역할이 있었다. 소련군 대표위원 스티코프 중장의 위상이 그런 측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극동군 사령부 정치위원으로 있던 스티코프(1907~1964년)는 스탈린의 확고한 신임을 받는 군 인사의 하나로서 보직과 관계없이 소련의 한반도 정책 결정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로 널리 지목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 후 4년간 주재대사를 지냈다.
반면 미군 대표위원으로 아놀드 소장이 나선 것은 미국 정부가 아니라 남한 점령군을 대표한 인상이다. 12월 10일 그의 군정장관직 경질은 점령군 사령관 하지와의 의논도 없이 본국에서 일방적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이 조치에 하지가 열을 받았던지 악착같이 아놀드를 끼고 돌았다. 12월 16일 군정장관에 임명된 러치 소장이 도착했지만, 인수인계가 끝난 뒤에 발령하겠다고 미뤄놓고는 러치를 지방 시찰하라고 서울에서 쫓아냈다. 1월 12일 패터슨 육군장관의 방한을 앞둔 1월 8일에야 러치를 군정장관에 취임시켰다. 그러고는 아놀드를 미소공위 대표위원에 임명한 것이다.
미소공위는 3월 20일부터 5월 6일까지 계속되다가 긴 정회에 들어갔고, 2차 회담이 1947년 5월 21일 재개되었으나 5개월 만인 10월 21일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세워진 연합국의 '조선 독립' 방침이 4년 만에 포기되고, 이 과제를 넘겨받은 유엔은 남한 단독 건국의 뒷바라지를 맡았다. 미소공위의 실패가 바로 통일국가 건설의 실패로 이어진 것이다. 이번 작업에서 더듬어볼 가장 중요한 흐름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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