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월 12일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한국에서 일어난 변화 가운데 청년층의 움직임에는 특별히 주목할 의미가 있다. 가장 반응이 활발한 연령층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는 주체로서 비중을 키워 갈 연령층이라는 점에서.
모든 행동의 동기에는 이기심과 정의감의 두 측면이 있다. 이기심은 이해관계에 따르는 것이므로 물질적 측면이라 할 수 있고, 정의감은 신념에 따르는 것이므로 정신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해방이 막 된 시점에서는 물질적 동기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적 동기가 청년들의 움직임을 뒷받침했다. 각지의 건준 지부나 인민위원회를 지지하는 치안대 조직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해방을 반기고 독립을 바라는 소박한 민심이 좌우익이 분화하지 않은 채로 펼쳐져 나온 것이었다.
좌익과 우익의 정치적 목적의식을 가진 청년 조직은 뒤늦게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불과 6개월도 안 되어 좌우 대립이 청년 운동을 휩쓰는 양상으로 변했다. 1946년 2월이 되면 애초의 자연발생적인 중도적 운동은 눈에 보이지도 않게 된다. 정치계보다도 청년 운동에서 좌우 대립이 더 빨리 가파르게 진행되었다.
류상영은 '8·15 이후 좌·우익 청년 단체의 조직과 활동'에서 실업율의 상승과 유입 인구의 증가 등 사회·경제적 불안정성을 이 시기 청년 단체 형성의 배경으로 중시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4>, 60~62쪽)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와해와 38선 분단으로 제조업 부문이 마비된 위에 해외와 이북으로부터 유입되는 인구 증가에 따라 사소한 동기에 의해서도 쉽게 움직이는 '가두(街頭) 청년'이 남한, 특히 서울에 넘쳐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질적 기반이 취약한 가두 청년들은 특히 물질적 동기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우익계 학생 단체 이북학련에서 활동한 바 있는 1930년 평양 출생의 채병률은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 장충동 부근에 그 당시 이북에서 넘어온 학생들이 많이 모이니까 이북학련 천막을 쳐줬어요. 그때부터 반공 투쟁이 시작된 거예요. 이북에서 넘어온 어른들은 서북청년회, 학생들은 이북학련회. 우리의 활동은 좌익 세력을 쳐부수는 행동 부대로서의 역할이었어요.
(…) 우리가 집단 생활하는 데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자나 깨나 밥 먹는 문제였어요. 잠이야 아무데서라도 잘 수 있지만 배고픈 건 다른 문제지요. 학교도 모두 야간에 다녔어요. 주간에는 장사를 하든 뭐라도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흔히 말해 서울에 있는 좌익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집도 있고 먹을 것도 있고 부모도 있는 사람들 아닌가요?
우리는 부모도 없는 사람이 대다수였어요. 당시 맛있는 밥 실컷 먹고 싶다는 게 절실한 소원이었어요. 그러니 이북 사람들이 군대나 경찰에 많이 들어가게 된 것도 다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들어간 거예요. (<8·15의 기억>, 352~353쪽)
룸펜 상태 가두 청년층은 극우파에게 손쉬운 조직 대상이었다. (이 시점에서 '극우파'라 함은 식민지 시대에 확보하고 있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일반 한국인이 원하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원리에 저항한 반동적 정치 세력을 말하는 것이다.) 극우파는 룸펜 청년들을 유혹할 수 있는 자금력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직후 현금 분포 상황이 정국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점을 그 동안 몇 차례 강조했는데, 룸펜 층의 동원이 가장 뚜렷한 예다.
엊그제 국군준비대와 관련해 건국청년회(건청) 자금이 주로 공장주들에 의해 조달된 사실을 언급했는데, 우익 청년 조직을 처음 조직한 것은 공장 경영자들이었다. 산업 현장에서 직원위원회와 노동조합에 맞서기 위해 룸펜 청년을 모아 폭력 조직을 만들었고, 한민당에서 그 이용 가치에 착안해 정치 폭력에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11월 20~22일 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 파괴 공작이 대규모 정치 폭력의 첫 시도로 보인다. 12월 16일 일기에 인용한 기사의 일부를 다시 인용한다.
(…) 이 날 오전 10시 반경 대회가 개최되어 진행되려 하는 때에 회장 남쪽 담을 뛰어넘어 회장에 침입하려는 괴한이 있는 것을 경비대원이 발견 체포하였는데 그자는 강원도 洪川에 원적을 둔 安東洙(23)라는 자인 것이 판명되어 곧 미 헌병에게 인도하고 취조한 결과 그자의 자백에 의하여 그 배후의 일당을 알게 되었다.
안동수는 17일에 일당 열 명과 함께 元山서 상경한 것인데 그들 열 명은 원산에서 해산물상을 하는 韓承基(28)에게 인솔되어 상경하여 서울시 觀水町에 있는 전 일인 경영의 和光敎團 안에 있는 觀水部隊라고 하는 청년대에 소속하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19일에 이르러서 전기 韓承基의 명령으로 서울시 수송정 太古寺에 가서 그곳에서 朝鮮建國靑年會本部 위원장 崔泓銖, 부위원장 吳炳喆에게 인사를 하게 되고 비로소 20일에 개최되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를 파괴하여 그 회를 진행치 못하게 하여야 될 것이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약 300명이 일단이 되어 일인당 50원씩의 돈의 배당을 받은 후 (…) 이번에 대표자 대회를 깨트리자는 데에는 조선건국청년회를 통해서 전기 원산 출신의 韓承基와 모 정당과의 사이에 밀의가 되어서 이번 운동 자금으로 40만 원을 모 정당에서 제공하기로 되었는데 그 중 4만 원을 전기 부위원장 吳炳喆을 경유하여 韓承基에게 지불하였다 한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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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00명 장정들이 50원씩 받고 11월 20일부터 동원되었는데 그중 10명은 사흘 전 원산에서 함께 상경한 한 패거리였고, 공원 전날 건청 본부에 가서 행동 지시를 받았다. 300명 인원 동원을 위해서도 이런 패거리들을 불러 모아야 할 정도라면 조직은 그리 크지 않은 데 비해 자금은 넉넉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만한 인원을 동원하고도 대회 파괴에 실패한 것을 보면 조직적 파괴 공작에 아직 익숙지도 못한 것 같다.
'청년 단체'라기보다 '폭력 단체'라 할 우익 조직이 풍부한 자금력을 발판으로 자라나는 데 대한 반작용으로 원래는 정치색이 약하던 자연발생적 청년 단체들이 연대 및 통합의 추세를 일으켰고, 이들의 조직화-의식화에 좌익이 나서면서 좌익 색깔이 차츰 강해지게 되었다. 12월 11~12일 결성된 전국청년단체총연맹(청총)은 좌익 지도력에 상당히 의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까지 중립성을 굳게 지키고 있던 국군준비대도 몇 주일 후 미군정의 탄압으로 와해되는데, 중립적 단체들도 군정과 경찰의 탄압을 이겨내기 위해 좌익으로 기울지 않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북 전조선의 진실하고 용감한 근로청년은 학생인데 청년의 총의를 집결하여 조국완전독립의 추진력을 일으키려는 全國靑年總同盟 결성 대회는 11·12 양일 자유 해방된 300만 청년들의 진보적 열의를 뭉치어 서울시 慶雲町 천도교대강당에서 개최하게 되어 11일 오전 11시 반부터 제1일의 대회가 열리었다.
금차 대회의 참가 범위는 지역적으로는 전국 13도에 亘하여 總 市數 22市중에서 20市의 대표가, 總 郡數 217郡에서 대표가 출석하였는데 그 인원으로는 總 代議員數 639명 중 602명이 출석한 거국적 청년대표대회이었다.
韓東正이 개회를 선언하고 李昊濟의 열열한 개회사에 뒤이어 임시집행부선거에 들어가 의장(李昊濟 韓東正 외 4명), 서기, 사찰을 선거하고 대회의 명예의장으로 呂運亨, 金武亭, 金元鳳, 金日成, 朴憲永의 5혁명 선배와 그리고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 진보적 민주주의 청년 대회 의장 미젤손을 추대하였다.
다음에 각지 대표로부터 긴급동의가 있어 金九의 來臨을 청하여 청년의 진정한 부르짖음을 듣도록 하자, 李承晩의 獨立促成中央協議會의 반동성을 폭로하고 그 해체를 권고하자, 본대회의 경과와 결의를 연합국을 위시하여 제 혁명 선배에게 전달하자 등을 결정하였다. 이어 각도 연맹 결성과 지방 대표의 소집 상경을 연락하기 위하여 각지에 파견원을 보내서 활동하여 그 투쟁의 성과로 今次의 대회를 열게 된 것을 보고하고 현재의 가맹 조직 2340개 단체 맹원 72만3405명에 이르렀다고 하자 박수소리가 컸다.
각계 대표의 축사로 임시정부 張建相, 중앙인민위원회 安基成, 조선공산당 李觀述, 조선인민당 金午星, 임시정부 金元鳳, 경기도인민위원회 白斗現, 건국부녀동맹 丁七星, 서울부녀인민위원회 金重然, 문화건설중앙위원회 金南天, 조선공산청년동맹 裵元弼 외에 全評, 農總, 失業者同盟, 革命者救援會, 國軍準備隊 등 제 단체와 金台俊의 축사가 있었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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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 청년단체들은 12월 21일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을 결성했다.
젊은 청년들은 마침내 궐기하였다. 그 순진성 그 정열을 한데 뭉쳐 조국 재건에 바치려는 젊은 조선 청년들의 총의는 이에 결속을 보았다.
즉 전국의 수많은 청년 단체를 통일 결속하기를 염원하는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의 결성 대회는 21일 성대히 막을 열었는데 착잡한 현 정국 밑에 우리 임시정부를 봉대하여 독립 달성을 촉진할 것과 민족적 비극으로 지금 3000만 동포가 다 함께 철폐를 요망하는 소위 38도선을 급속히 제거하여야 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21일 오전 10시 대회장인 천도교회당에는 임시정부 대표 嚴恒燮, 李承晩, 하지 중장(대리)등 내빈 다수 첨석 아래,
建設靑年同盟 高麗靑年團 基督靑年同盟 朝鮮建國女子靑年隊 朝鮮女子國民黨婦女部 등 조선 43 남녀 청년 단체 500여 대표 및 일반 방청자 2000여 명이 모여 독립 촉성에 불타는 건국 청년들이 합동한 가운데 막이 열리었다. 대회는 金山의 개회사가 있고 개회 벽두 긴급동의로 金九 李承晩 외 몇 분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할 것을 가결한 다음 하지 중장의 축사(니스트 대좌 대독), 이승만 박사 축사(윤치영대독), 임시정부를 대표한 엄항섭을 비롯하여 한국민주당, 자유사회건설연맹측의 축사에 이어 동총연맹 대표 申均으로부터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전 조선의 남녀 청년이 조국을 찾고자 하는 대한임시정부의 전 민족적인 노선에 따라 한 덩어리가 되어 조국 광복의 대업을 완수하기를 맹서한다는 답사가 있은 후 장 주석, 트루만 대통령, 스탈린 원수에게 보내는 감사 결의문을 긴급 동의로 가결하였다. 이어 경과 보고, 국내 국외 정세 보고가 있고 오후 1시 반 일단 휴회하였다가 동 2시 재개하여 선언, 강령, 규약의 통과, 중앙집행위원 선거가 있고 지방정세 보고 등이 있고 동 3시 지나 마치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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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우익 청년 단체도 거대 조직 건설을 시도했지만, 좌익(으로 통상 지칭되는) 단체와 같은 통합성은 이룰 수 없었다. 이 차이를 류상영은 "개인에 대한 충성도에 많이 의존했던 우익 청년 단체와는 대조적으로 좌익 청년 단체의 경우에는 개인의 이해에 따른 조직의 변화는 있을 수 없었는데, 이는 결코 복잡하지 않은 계보표에서도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이익 집단과 이념 집단의 차이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1월 12일 대한건국청년회 명의의 삐라가 살포되었다. 좌우 대립이라기보다는 공산당과 한민당 사이의 논쟁 양상을 보여주는 자료다. 그 양상을 보여주기 위해 옮겨놓는다. 같은 날 대한청년의혈당도 비슷한 취지의 삐라를 뿌렸다. 삐라 뿌리는 것도 '지원금'이 따르는 일이기 때문에 단체마다 '담화문'을 따로따로 내고 있었을 것이다.
공산분자의 사기적 모략에 빠지지 마라
○○일파의 민족기만적 모략 수 건을 우리의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아래에 기록하여 본다.
1) 인민공화국이란 것은 ○○ 일파의 공산 분자 수명이 모여 남의 안방에서 一夜間에 창작 선전한 것임은 한성 시민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지마는 3000만 민중의 총의에서 나온 것처럼 교묘히 전 국민에게 기만 선전하여 于今껏 민족 모욕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 일파는 국부 李承晩 박사의 승락도 없이 제 마음대로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과감히 결정 발표하여 동포를 기만하였다.
3) ○○ 일파는 전 한성 시민의 인민공화국 반대에 송구하여 죄상을 他에 전가하려고 한국민주당에서 金九 선생을 주석으로 한 임시정부를 국내에서 또다시 조직한 것처럼 발표하여 민족을 기만하려고 하였으나 동당의 부인 성명으로 실패를 歸하였다.
4) ○○ 일파는 인민공화국을 해체하겠다고 전국인민위원대표자대회 허가를 圖得하고 11월 21일 동 대회 석상에서는 급히 인민공화국 절대지지의 결의문을 성명하여 군정청을 기만하였고 드디어 하지 중장의 격노를 사서 엄중한 해체 명령을 재삼 받았으나 ○등은 言을 좌우로 하고 이 명령을 위반하여 아직까지도 모욕의 대상 인민공화국을 내세우고 있다.
5) ○○ 일파는 소련에 대표자 10명을 보내어 탁치를 애원하여 놓고 1월 3일 전까지는 임시정부에서 탁치를 미국에 요청한 것처럼 책임 전가 모략하여 민족을 기만하기에 노력하였다가 조선이 독립될 듯한 대세가 보이므로 1월 3일에 가면을 벗고 탁치 지지의 음모를 비로소 노출 선전하여 드디어 탁치제 승리로서 우리 민족의 노예화를 획책하였다.
6) 1월 1일 ○○ 一派는 민족통일전선 결성권고문을 1일간의 기한부로써 교부하여 임시정부로 하여금 요인 간에 숙의할 시간도 없게 하여 놓고 회답이 無하니 민족 통일 전선 결렬의 책임이 임시정부에 있다 하고 억지의 구실을 만들어 민족을 기만하기에 애를 썼다.
7) ○○ 一派의 소위 민족 통일 전선이라는 것은 민족 적화로의 통일 전선을 의미한 것인데 이자들이 노골적으로 적화 又는 공산주의화라는 언명을 피하고 민족 통일이라는 교묘한 용어를 사용함은 분명히 동포를 기만하여 적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8) 1월 3일의 반탁시민대회는 ○○ 一派 공산분자의 주최이다. 그러나 ○○ 등은 시민을 기만 집합한 후에는 졸연히 탁치 지지 시민 대회의 깃발을 날리고 이것을 사진박인 우리 민족이 탁치를 지지하는 것처럼 전 세계에 기만 선전하는 재료를 만들었다. 기만당한 시민은 于今껏 울분을 금치 못하고 있다.
9)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에서 발표된 조선 신탁 관리 전문은 旣己 전 세계에 알리어진 것인데 최근 ○○ 一派는 이것을 僞譯하여 탁치를 후견이라 칭하고 이것을 지지하라고 동포에게 力勸한다. 그러나 후견이라는 것은 미성년자에게 적용되는 법률적 용어인즉 조선을 미성년자로 자처하라는 모욕적 기만에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10) 공산당은 그 명칭과 같이 공산주의이다. 그러나 이자들은 소위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교묘한 용어를 창작 사용하여 동포와 민주주의 열국을 기만함으로써 정권의 획득에 급급하고 있다. 정권 획득만 된다면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공산주의의 독아를 여지없이 노출할 것은 종래의 사기 수단으로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상 10條目 외에도 ○○ 一派의 민족 기만적 모략은 하도 많아 일일이 枚擧키 어렵다. 이자들의 선전 유혹에는 항상 경계 주의를 요한다. ○○ 一派 기관지 人民報나 또는 이자들의 선전 비라를 열독하는 것도 大히 불가한 것이다.
○等은 우리 동포가 유치하니 저의들의 해석 설명과 교양을 받으라고 성명하지 아니하였는가 민족을 모욕함도 이에서 더 심함이 없다는 것을 동포는 잘 알고 오로지 그 사기적 모략에 빠지지 말기를 약속하자.
신탁관리절대배격
대한민국임시정부만세
1월 12일
朝鮮建國靑年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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